글. 이돈희 서울대 명예교수 / 에듀인뉴스 발행인

교육계와 교육학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학계에서도 존 듀이(John Dewey)는 누구에게나 이미 잘 알려진 이름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알려진 만큼 그의 이론이 잘 이해되고 소개되어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의 사상은 ‘실용주의’, ‘실험주의’, ‘진보주의 교육’, ‘새교육’이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어 왔고, 우리의 교육계와 교육학계는 그를 현대적 교육사상의 근원인양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교육계에서 심도 있게 평가된 수준은 아니었다. 에듀인뉴스는 정치와 교육의 이념적 갈등이 극심하고 특히 자유주의적 전통과 강령적 기조에 대한 이해의 혼란이 심각한 수준에 있는 이 때, 존듀이의 실험주의적 자유주의와 이에 일관된 교육사상을 검토해 보는 ‘왜, 지금 존 듀이를 읽어야 하나’를 연재한다.

존 듀이(John Dewey, 1859.10~1952.06), 미국의 철학자이자 교육학자로 미네소타·미시간·시카고·컬럼비아 각 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하였고 '전국교육협회' 명예회장을 지냈다. 서민의 경험을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에 의해 소화해 보편적 교육학설을 창출해 세계 사상계에 기여했다. 대표적 저서로는 '논리학-탐구의 이론', '경험으로서의 예술' 등이 있다.(출처=두산백과)
존 듀이(John Dewey, 1859.10~1952.06), 미국의 철학자이자 교육학자로 미네소타·미시간·시카고·컬럼비아 각 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하였고 '전국교육협회' 명예회장을 지냈다. 서민의 경험을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에 의해 소화해 보편적 교육학설을 창출해 세계 사상계에 기여했다. 대표적 저서로는 '논리학-탐구의 이론', '경험으로서의 예술' 등이 있다.(출처=두산백과)

 

실험적 자유주의와 교육의 위상

듀이에 의하면,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모든 성숙한 사람들로 하여금 공동체의 삶을 이끌어 갈 가치의 체계를 형성하는 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민주주의는 인간 본성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것은 바로 인간의 지력과 공동체의 협동적 경험이 지닌 힘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 듀이의 자유주의는 사회적 체제나 운영의 원리라고 말하기 전에 교육의 정신이며 원리라고 할 수도 있다.

그는 자유주의를 고정된 어떤 체제적 형식으로 규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행위와 과정의 원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자 하였으며, 거기에는 인간의 지력이 충분히 성숙할 것을 전제로 하였다.

말하자면, 자유주의의 개념은 인간의 능력, 특히 지력의 힘과 그 성장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교육의 개념과 같은 의미의 것이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하나의 고정된 체제이고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교육을 필요로 한다면, 듀이의 실험주의적 자유주의는 교육을 통하여, 교육과 더불어 사회적 체제를 계속적으로 재구성해 간다.

그러므로 교육의 기회를 누구에게 배분하느냐는 그 자체가 별로 의미 없는 질문이 된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교육의 기회가 인간의 지력의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실제적으로 생산하느냐이다.

사회운영의 원리 = 교육의 원리

듀이는 사회운영의 원리는 교육의 원리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흔히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을 하지만, 사실상 그 사회성의 의미는 정치와 같은 부문에서가 아니라 교육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좋은 조직은 민주적 조직이며, 민주적 조직은 교육적 조직, 즉 구성원들의 모두가 성장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조직이다.

교육을 미래의 준비라고 생각하는 것과 성인을 성장의 고정된 한계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성인에게도 경험을 성장시키고 발달시키는 것이 도덕적 과업일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 의존상태와 상호의존의 관계에 있게 마련이고 거기에서 필요로 하는 교육은 어린이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성인을 위해서도 중요한 것이다.

이와 같은 도덕적 과업을 특수한 성장의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특히 아동기의 교육을 보다 의도적이고 공식적으로 계획하는 것은 사회의 진보와 재조직을 위하여 가장 경제적이고 능률적인 수단이 된다.

성인의 생활과 관련된 모든 제도는 각기 얼마나 능률적으로 교육의 기능을 계속해서 수행하느냐로 그 가치를 평가받아야 한다.

정치, 실업, 예술, 종교 등의 모든 사회적 제도는 하나의 의미, 즉 하나의 공통된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 목적은 인종, 성별, 계급, 경제적 지위에 관계없이 인간 개체들의 가능성을 자유롭게 계발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여러 가지의 의미를 지니지만 그것이 하나의 도덕적 의미를 지닌다면, 각 구성원의 전인적 성장에 기여하는 정도가 바로 모든 정치기구와 산업 체제를 평가하는 최상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학교제도의 재구성

듀이는 전통적인 학교가 사회의 계급구조에서 유래한 것임을 인식하고 그것을 새로운 사회의 조건에 맞게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를 생각하였다.

그는 학교제도의 전체를 그 제도의 내적 구조는 말할 것도 없고 자연과 사회와 가정을 연결짓는 외적 관계도 긴밀히 유지할 수 있도록 조직하여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듀이는 학교를 사회와 통합되도록 하고 학습의 과정을 실제의 생활문제와 통합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보았으며, 그것은 민주주의의 원리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일을 철저히 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옛날부터 있어 온 교육제도와 새로운 사회적 삶의 조건 사이에 생기는 대립을 해소할 수 있고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민주적 질서를 건설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존 듀이에 대한 비판적 시선

흔히 그가 체계적인 학문이나 이론을 가르치는 일을 경멸한 것같이 이해하는 경향도 있으나, 그것은 그에 대한 공정한 비판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전통과 관습과 제도를 교육적 관심사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그것은 듀이의 경험과 문제의 개념을 일상적 용어로서 지닌 소박한 의미로만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교육을 아동의 흥미와 욕구가 주도하는 활동 속에서 이루어지게 하여 교육의 본질을 왜곡하였다고 비판하는 경향도 있으나, 인간의 구체적 삶과는 불연속적인, 그것과는 단절된 고답적인 관념이나 본질의 세계가 별도로 존재한다는 가정에 따른 편견에서 보면 그러하다.

듀이에 있어서 구체적인 활동의 세계와 추상적인 이론의 세계, 현실의 세계와 전통의 세계, 욕구와 흥미의 세계와 관념의 세계는 모두 연속된 하나의 세계이다.

듀이의 교육사상은 일면 보수주의자들의 공격과는 다른 측면에서 진보적 진영의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실제로는 심각한 수준에서 대결해야 할 상대가 없었을 정도로 미국의 교육에 새로운 영향을 주었다.

어떻게 보면 미국의 공식적 교육관이라고 할 만큼 되어 버렸다. 어쩌면 역사상 듀이의 이론만큼 교육의 현장에 실제적 원리로 광범하게 실천되어 본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영향이 실제로 듀이가 주장한 방향으로 개혁을 가져 왔으며 개혁이 이루어진 만큼의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느냐에는 회의적 반응이 없지 않다. 그의 이론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왜곡되기도 하였고, 그것으로 인하여 듀이 자신이 부당하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사실상 많은 비판이 바로 듀이 자신이 비판하고 우려하고 있는 그 내용을 다시 언급한 것들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적지 않게는 그러한 오해와 혼란이 듀이 자신의 이론에서 연유한 바도 있다. 여러 가지의 요인들 가운데 나는 듀이 자신이 인간의 지력(Intelligence)에 대하여 지니고 있었던 믿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듀이와 지력

듀이의 지력은 규범적인 것이었다. 내가 여기서 ‘규범적’이라고 한 것은 그가 지력을 현실적으로 그 기능이 행사되고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순수하게 그 힘이 발휘되고 있을 때의 의미로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지력은 전통적인 주지주의자들이 생각한 이성(Ratio 혹은 Reason)의 개념과는 다르다.

우선 그의 지력은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주어져 있다고 가정하거나 어떤 신비적인 힘에 연결되어 있다고 여기는 전통적인 이성의 개념과는 다르다.

그리고 감성이나 의지와는 구별되는 형식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능력으로 이해되는 합리성의 개념과도 다르다. 또한 진리와 허위, 그리고 선과 악을 분별하는 절대적인 판단의 권위를 부여받은 능력으로 이해되는 양심의 개념과도 다르다.

그는 지력을 문제의 해결에 작용하는 우리의 마음이 사태를 처리할 때 발휘하는 능력으로 생각하였다. 전통적인 이성이 지닌 형식적이고 이지적인 요소만은 아니며 감정과 의지와 때로는 신체적 작동까지도 함께 이루어지는 행위의 원리로서 지력을 이해하였다.

그러나 그의 지력이 구체적 상황에서 행동하고 생활하는 인간의 혼란된 욕구와 충동 등에 의해서 그 힘이 얼마나 방해를 받으며 얼마나 한계점에 놓이게 되는지를 크게 우려한 증거는 그의 저술 어디에서도 보기가 어렵다. 어떤 점에서 그는 지력의 힘을 거의 낙천적으로 믿고 있었던 셈이다.

듀이에 의하면 교육은 경제적 해악이나 정치적 악덕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지닌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교육과 경제 사이의 실질적 관계는 항상 교육이 승리할 것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었다. 교육을 통하여 계발된 지력, 예컨대 비판의 정신이나 평등의 사상이나 정의의 개념과 더불어 작용하는 지력이 교육의 밖에 이미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는 사회의 구조적 병리를 청산할 힘을 소유할 수 있느냐에는 회의적이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의 점진주의적 특성은 항상 기존의 질서에 대하여 도구적 작용을 하고 끝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세계대전을 겪은 미국사회는 전체로서 국민의 복지를 증진하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세계질서에 지배력을 행사해야 하는 상황에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듀이 자신이 러시아의 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관찰하였듯이, 자유로운 지력은 여러 가지의 정치적-사회적 요인으로 인하여 어떤 모습으로든지 제약당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이기도 한다.

지력의 순수성과 개혁의 점진성의 상충

듀이는 지력의 이러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순수한 것이기를 기대하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점진주의를 취하는 위치에 있었다. 사실상 지력의 순수성과 개혁의 점진성은 양립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지력은 순수할수록 철저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는 지배와 종속이라는 사회의 이원적 구조의 논리만 청산되면 혁명적 방법은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순수하고 자유로운 지력은 이상주의, 적어도 그가 즐겨 언급한 실현가능한 이상을 의미하는 ‘보이는 목적’(End-In-View)을 추구하는 이상주의를 낳을 수 있고, 거기에 헌신하고자 하는 동기의 강도에 따라서 혁명적 방법은 여전히 수용될 만한 것일 수도 있다.

순수한 지력은 반드시 온건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력의 개념 속에 점진주의가 함의되어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지력의 사용을 규제하는 점진주의를 또 다른 기본적인 원리로서 수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력은 순수한 상태로 있을 수 없고 자체의 점진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악의 세력에 타협하는 것을 그것의 본질이라고 인식해 버리게 한다.

아마도 듀이는 점진주의를 지력에 대등한 원리의 하나로 병행시키고자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지력은 혁명적 방법이 가져오는 결과에 부수되는 온갖 문제를 두려워하는, 결국 기회주의적 조정이나 기술적 타협과 같은 것도 수용하는 어색한 개념이 되어 버리고 만다.

교육이 무언가를 하게 하는 힘 ‘점진주의’

그러나 우리는 이 점에 대하여 어떤 관용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충분히 있다. 즉, 규범적인 것은 규범적인 것이고 사실적인 것은 사실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규범적 원리의 실천에는 사실적인 것을 처리하는 과정의 여러 기술적 난점이 언제나 발생한다.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작동하는 지력이 반드시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 온다는 보장은 없다. 실패하였다고 해서 그것을 지력의 실패로 돌릴 수도 없다. 교육이 그 자체의 원리대로 실천되는 여건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데에 분명히 힘의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그 자체의 힘만으로는 듀이가 생각한 사회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지력을 생산하지 못한다.

듀이도 교육이 만병을 치유하는 방법이라고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교육의 힘이 자라는 만큼의 치유를 생각하게 되고 그러는 한에서는 점진주의가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내가 보기로 점진주의는 지력의 본질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교육의 힘에 의지하고 교육에 기대를 두며 그래서 개혁의 바탕을 더욱 확실하게 하려는 다소 태연하고 원시안적인 사회적-정치적 태도이다.

그것은 교육이 제대로의 기능을 하도록 보호하고 지원하고 지켜보고, 교육으로 하여금 사회의 개혁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여유를 의미한다.

나는 이러한 방법은 전면적인, 혁명적인, 총체적 급진성의 시도보다는 훨씬 적은 문제들을 수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