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섭 강원대 윤리학과 교수

우리는 자주 정치와 권력, 집단행동의 유혹에 빠진다. 개인들이 각자 자신의 뜻에 맞추어 행동하고 그것이 모여 사회를 이룬다고 보면 사회가 변하기 위해서는 먼저 개인이 변해야 한다. 그러나 개인의 변화를 통한 사회 변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어떤 개인이 어떤 행동을 하고 그것들이 모여 사회가 어떻게 변했는가를 설명할 수도 없다.

“사회질서는 인간의 의도나 기획의 결과가 아니라 행동의 결과이다”라는 말이 이런 현상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지만, 이 말도 가슴에 잘 닿지 않는다. 개인이 각자 자신의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여 질서가 생겨나지만 그렇게 생긴 질서는 어느 개인의 의도도 아니다. 개인의 의도로 질서를 만들 수는 없다.

질서를 이렇게 이해하면 질서를 바꾸기는 참 힘들어 보인다. 질서 생성의 주체도 파악할 수 없고, 마땅하지 않는 질서가 있을 때 어디에서 손을 대어야 그것이 바뀔지 추측하기도 어렵다. 개인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다는 하소연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스스로 행동하여 세상의 변화를 도모하는 사람들이 쉽게 지치고 좌절한다. 혼자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서는 것은 대낮에 촛불을 밝히는 것처럼 정신 나간 일처럼 보인다. 아무리 의지가 강건한 사람도 변하지 않는 세상 앞에 절망한다.

자생적 질서를 존중하는 자유주의라 하더라도 집단행동과 정치권력에 매혹이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대로의 세상이 완벽할 수는 없기 때문에 존재하는 세상이 대한 불만은 상존하기 마련이다. 이런 질서를 바꿀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을 혁명을 일으켜서 백지 위에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다. 혁명이 어려우면 정치권력을 이용해 세상 질서를 바꾸는 것이다. 정치가들이 항상 권력을 입에 달고 사는 이유는 국민들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권력자의 말 한마디가 세상을 바꾸는 것을 자주 목도한다. 의식 있는 개인이 아무리 외쳐도 세상은 모른 채 하지만, 권력자가 한마디만 하면 세상은 분주하게 움직인다. 언론이 주목하고 예산이 편성되고 공무원이 움직인다. 이것은 권력의 생리고, 세상이 움직이는 방식이다.

요즘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목도한다. 중ㆍ고등학교에서 이념 편향 교육이 문제고, 역사교과서가 문제라고 외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정 교육 단체의 이념 편향 교육을 문제 삼아 고쳐야 한다고 신문 칼럼에서 외쳐 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떤 지식인들은 포럼을 만들고 새로운 역사교과서 만들어도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부 언론이 여기에 가세하였지만 정치권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최고 권력자가 눈질을 두자 세상은 돌변했다. 공무원이 움직이고 국회가 싸우고, 언론이 역사교과서 문제로 도배를 한다. 거리에는 현수막이 내걸리고, 신문에는 광고가 실린다. 대학 교수들은 집단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고, 거리에선 찬반 시위가 열린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연일 계속된다. 이것이 권력의 힘이고 정치의 힘이다. 이런 현상들을 대낮에 밝힌 한 자루 촛불의 위력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이렇게 해도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설사 국정 역사교사서가 발간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교육 현장에서는 별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교육은 교과서가 아니라 교실에서 교사와 학생 사이의 만남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세상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 변해서도 안 된다. 그래도 우리는 해보는데 까지는 해보아야 한다.

교육은 왜소한 인간이 '개인’이라는 위대한 존재로 탄생하는 것을 돕는 행위다. 개인은 독립적 인격을 지닌 존엄한 '단독자’지만, 혼자 살수는 없는 존재다. 존엄한 개인이 자신의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품위 있는 삶을 살기위해서는 품위있는 이웃을 만나야 한다. 그러나 품위 있는 이웃이 개인의 힘만으로 탄생할 수는 없다. 존엄한 개인과 품위 있는 이웃의 탄생을 뒷받침하는 질서와 제도도 필요하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도 바로 교육의 역할이다.

신중섭 (강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joongsop@kangwon.ac.kr)

 

 

*이 글은 필자와 자유경제원의 동의 아래 게재하는 것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