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희 서울대 명예교수 / 에듀인뉴스 발행인

교육계와 교육학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학계에서도 존 듀이(John Dewey)는 누구에게나 이미 잘 알려진 이름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알려진 만큼 그의 이론이 잘 이해되고 소개되어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의 사상은 ‘실용주의’, ‘실험주의’, ‘진보주의 교육’, ‘새교육’이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어 왔고, 우리의 교육계와 교육학계는 그를 현대적 교육사상의 근원인양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교육계에서 심도 있게 평가된 수준은 아니었다. 에듀인뉴스는 정치와 교육의 이념적 갈등이 극심하고 특히 자유주의적 전통과 강령적 기조에 대한 이해의 혼란이 심각한 수준에 있는 이 때, 존듀이의 실험주의적 자유주의와 이에 일관된 교육사상을 검토해 보는 ‘왜, 지금 존 듀이를 읽어야 하나’를 연재한다.

시자는 루비콘 강을 건넜는가?

듀이는 1906년과 1909년의 사이에 여러 논문을 통하여 전통적 철학, 특히 인식론에서 다루는 지식과 진리의 개념에 관하여 집중적인 비판을 가하였다. 비판적 주장을 쏟아낸 것은 주로 “진리”의 의미에 관한 것이었고, 비판의 표적은 주로 전통적인 “대응설”이었다. 대응설에 의하면, 어떤 명제나 신념이 진리라는 것은 그것이 실재하는 것에 대응하기 (혹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듀이와 프래그마티즘 철학자들에 의하면, 어떤 아이디어가 실재하는 것에 일치하고 그래서 진리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어떤 목적지향적인 행위에 그것이 성공적으로 사용되고 있어야 한다. 한 마디로 문제상황의 해결에 도움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프래그마티즘의 이러한 진리설은 특히 럿설(Bertand Russell)을 비롯한 영국의 논리학자들로부터 오는 강한 비판을 감당해야만 했다.

지식과 진리의 조건을 둘러싸고 극심한 논쟁이 계속되자 듀이는 전통적인 의미의 “진리”라는 말이 혼란과 애매성을 낳는다고 보고, 대신에 “확신”(warranted assertibility)이라는 말로 대치하였다. 어떤 아이디어에 의한 탐색의 결과가 성공적이면, 그 아이디어는 확실성을 보장받을 수 있을 정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럿설은 용어의 대치로써 프래그마티즘의 진리설을 수용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가 쓴 「서양철학사」에서 듀이의 진리설을 논의하는 데 한 장을 할애하였다. 그 장의 한 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듀이 박사와 나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그는 신념의 진리 여부를 그 신념이 가져 올 결과로써 판단한다고 하는 반면에, 나는 과거의 어떤 원인에 관련이 있는가의 여부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 원인과 관련성(때로는 매우 복잡한 것일 수도 있지만)이 있다는 확신이 선다면 그 신념은 “진실”이거나, 아니면 진실에 매우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듀이 박사는, 그 신념이 어떤 종류의 좋은 결과를 가져 온다면, 그런 경우에, “진리” 혹은 “확신”이 된다고 하였다. 이런 정도의 상이한 생각은 세계를 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어떤 것도 현재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런고로 진리가 과거의 일로 인하여 결정된다면, 그것은 현재나 미래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논리적으로 말해서, 과거의 것은 바로 인간이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진리임이 밝혀진다면, 혹은 듀이 박사의 말대로 “확신”으로 결정된다면, 우리는 그것의 진리여부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셈이 된다. 왜냐하면 미래는 우리가 바꾸어 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인간의 능력과 자유의 의미를 확대하는 것이다.

시자(Caesar)가 루비콘(Rubicon) 강을 건넜느냐? 과거의 일은 교정이 불가능한 필연성을 지닌 것이므로 나는 그렇다고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듀이 박사는 미래에 있을 결과를 검토하여 “그렇다”라고 하거나 “아니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아니다”라는 대답을 하고 싶으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도록 지금 미래의 상황을 조정해 버리면 된다.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조정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다. 만약 시자가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사실이 매우 불쾌하게 느껴진다면, 내가 우울하게 절망에 빠져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내게 그럴 기술도 있고 힘도 충분하므로, 그가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았다는 진술이 “확신”이 되도록 사회적 환경을 조정해 버리면 된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해서, 럿설의 말대로, “시자가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진술(신념)이 미래에 나를 기분 좋게 혹은 만족스럽게 한다는 이유 때문에 거짓이 아니고 진실이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듀이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주장을 한 것이다. 나의 개인적 기분에 따라서 그 진술이 진리가 되고 허위가 된다는 것도 역시 이상한 말이다.

진리와 허위의 주장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적어도 공공성과 객관성을 지닌 주장이어야 한다. 그 진술이 진실(진리)이려면 시자가 루비콘 강을 실제로 건넜어야 한다. 그러므로 한 아이디어 혹은 신념의 진술이 진리이려면 그 진술이 실제로 존재한 사실과 일치해야 한다. 즉 “대응설의 진리관”이 주장하는 요건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로 듀이가 말하는 진리는 럿설이 이해한 바와 같이 진술과 사실(실재) 사이의 논리적 대응과 일치를 의미한 것은 아니다.

럿설이 시자가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것이 여러 가지 근거에 의해서 역사적 사실이라고 확실시되면, 듀이로서는 그것은 단순히 럿설의 확정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입증된 사실의 진술이므로 진리의 여부로 문제 삼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만약에 듀이가 시자와 루비콘 강의 이야기를 두고 진실의 여부를 가려야 한다는 데 관심을 둔다면, 그 이야기와 관련하여 문제로 삼을 만한 무엇이 발생했어야 한다. 즉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술을 그대로 수용하기 어렵게 하는 근거가 나타났어야 한다. 문제가 전적으로 없으려면 시자가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것이 두말할 나위가 없는 진실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진실이라고 한다면, 그 말은 시자와 루비콘 강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의 역사적 사실의 조사나 흔적이나 전해온 설화 등도 전체적으로 서로 일관되게 일치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만약에 실제로 그렇지가 않다면, 그 진술과 관련 자료들이 하나의 문제상황으로 성립한다. 즉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우며 갈등을 유발하는 상황이 된다는 것이다.

듀이의 경우에, 그러면 그 문제상황을 해결하여 모든 것이 정리되고 확실한 결과로 만족스러운 상태가 된다면 그 진술은 진실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허위는 아닐지 몰라도 진실임을 충족시키기에는 미치지 못하는 수준의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진실이라고 확신하는 수준을 의미하는 “확신”도 계속적인 탐색에서 허위로 판명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듀이는 “오류가능성”(fallibility)을 열어 두고 있다. 듀이는 인간이 지력의 힘으로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는 “탐색적 지식”의 결과는 도구적 효용성으로 평가되며 진리의 개념을 대신단다.

구경꾼과 탐사꾼의 논쟁

럿설의 관조적 지식의 “진리”의 개념과 듀이의 탐색적 지식의 “확신”의 개념은 표현에 있어서만 아니라 그 의미에 있어서도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데 럿설은 두 표현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보고 “진리”의 의미로써 듀이를 비판하였다. 진리와 허위의 문제를 럿설은 인과적 관계(사실)에 근거한 관조적 진술의 논리적 타당성을 중심으로 생각하였다. 진리를 말할 때 그것은 언어로써 진술된 “명제”에 관한 것이며, 문장으로 표현된 것의 진리 혹은 허위의 여부는 명제가 지닌 속성이다. “구경꾼”처럼 세상을 본 그대로 쓴 것이 진실을 말하는 명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듀이의 논리학과 인식론은 진리 여부를 결론으로 말할 수 있는 명제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오해의 가능성 때문에 듀이는 “확신”이라는 말로 바꾸어 쓰고자 하였으나, 전통적 인식론의 틀에 고착된 럿설은 그 자체를 구별코자 하지 않았다. “확신”은 탐색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판단”에 관한 것이다. 판단은 언어로써 진술된 명제일 수도 있지만 그 이전에 본질적으로 실제적 삶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 행위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그러한 탐색적 행위의 “결과”가 확신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듀이가 의미하는 진리(혹은 확신)는 아이디어가 가져올 결과의 단순한 만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해결을 위한 절차적 과정인 반성적 사고(reflective thinking)의 결과에 대한 만족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탐사꾼”처럼 세상의 일을 보고 만족의 여부로써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립된 인식론적 주장은 진지한 교육자들에게 매우 곤혹스러운 부담을 안겨 준다. 지식을 대하는 교사는 관조설과 탐색설의 어느 한편에 동조하여 선택적으로 의존하거나, 양편을 모두 수용하면서 학습자를 만나거나, 아니면 어느 편에도 일관되게 의존하지는 않고 사안에 따라서 선택적으로 임하는 방식이 있게 된다. 교육의 현장에 있는 교사는 지식에 관한 인식론의 문제가 결론적인 해결을 볼 때까지 기다리면서 지식의 학습을 미루어 둘 수는 없다. 교육은 지금 당장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교사는 그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다려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도 좋은 여유의 삶을 사는 위치에 있지 않다. 바로 이것이 교육자의 위치와 철학자의 위치가 다른 점이다.

관조설과 탐색설을 서로 모순되는 관계에 두고 철학적 논의로써 해결하려고 시도하기 전에, 우선 지식교육은 어떤 원리로 진행되어야 하는가를 별도의 시각에서 검토해 볼 필요는 있다. 우리는 교육을 모든 것이 확실한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일종의 아이로니 같지만, 럿설이 말하는 관조적 진리와 듀이가 말하는 탐색적 결론의 사이에 의미상의 차이가 없다는 것보다는 차이가 있다고 하는 편이 교사들의 마음을 편하게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두 철학자는 비록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수준의 논쟁을 펼쳤지만, 진리의 개념에 관하여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는 말은 서로 다른 측면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럿설은 관조적 사고의 진리에 관하여, 그리고 이와는 의미상의 차이가 있는 듀이는 탐색적 과정의 결론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던 만큼, 제3자인 우리는 그들을 반드시 대립적 관계에 두고 어느 한편을 선택하여 지지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교사가 두 관점에 따른 학습의 장을 연다면 각기 어떤 특징을 보이게 되는가를 검토해 볼 필요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