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희 서울대 명예교수 / 에듀인뉴스 발행인

 

교육계와 교육학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학계에서도 존 듀이(John Dewey)는 누구에게나 이미 잘 알려진 이름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알려진 만큼 그의 이론이 잘 이해되고 소개되어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의 사상은 ‘실용주의’, ‘실험주의’, ‘진보주의 교육’, ‘새교육’이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어 왔고, 우리의 교육계와 교육학계는 그를 현대적 교육사상의 근원인양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교육계에서 심도 있게 평가된 수준은 아니었다. 에듀인뉴스는 정치와 교육의 이념적 갈등이 극심하고 특히 자유주의적 전통과 강령적 기조에 대한 이해의 혼란이 심각한 수준에 있는 이 때, 존듀이의 실험주의적 자유주의와 이에 일관된 교육사상을 검토해 보는 ‘왜, 지금 존 듀이를 읽어야 하나’를 연재한다.

관조적 교사가 가르치면?

교사가 지식을 관조적인 것이라고만 보면 이러한 지식의 학습은 어떤 특징을 지니게 되는가? 앞서 보았듯이 관조적 지식은 대응론적 진리설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관조적 지식은 진리이거나 아니면 허위이거나 어느 한 편에 속한다. 그러나 교실의 교사는 허위를 가르칠 수는 없을 것이고 오직 진리인 것을 가르쳐야 한다. 적어도 진리일 가능성이 높은 것들을 가르치게 된다. 물론 진리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왜 허위가 아닌 진리이며 그것이 진리인 줄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도 학습활동의 중요한 내용으로 포함될 것이다. 어떻던 진리 혹은 허위로 확정된 것을 내용으로 하여 가르치게 된다.

첫째, 관조적 지식 교육은 당시대의 가장 권위 있고 확실성이 높은 지식을 선별하여 가르친다.

오늘의 모든 학교들이 그렇듯이 가르치는 지식들은 잘 선별되고 여러 가지의 관점에서 충분히 검토된 지식들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검증을 요구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이런 경우에 진리인 지식은 “암기”의 대상이다.

관조적 지식의 학습은 진리로 확정된 것에 관하여 그것의 근거와 성격과 용도를 가르치는 학습의 문화를 형성한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는 어느 시기엔가 암기를 요구하거나 아니면 암기된 상태를 확인하고 평가하는 단계가 있게 마련이다. 지금까지도 학교제도 속에서 지식의 암기는 학습의 가장 필수적인 요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 근원은 관조적 지식관과 대응설적 진리관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러한 관조적 지식이 교사를 비롯한 교육내용을 선정하는 위치에 있는 교육자들에게 부담을 주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오늘의 상황과 같이 지식의 양이 급격히 팽창하는 시기에 지식의 평가와 선택에 정책적 어려움을 준다.

그리고 오늘의 공교육체제에서 국가가 직접 혹은 간접으로 교육내용의 구성에 정책적인 관여를 하게 될 때, 집권 측의 정치적 노선이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혼란시킬 가능성이 있다. 근년에 국사교육에 관하여 보수 혹은 진보의 정치적 노선에 따라 교육과정과 교과서의 정책이 좌우되고 정치적 대결의 표적이 되고 있다.

어느 측이든지 간에 그러한 대결은 관조적 지식과 대응설적 진리관에 기본적으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역사에 관한 지식은 우리가 탐색하고 논의할 대상이 아니라 진리로 결정짓고 학습자가 내면화해야 할 대상이라는 전제에 매여 있는 셈이다.

둘째 관조적 지식은 언어의 기능을 최대한으로 활용한다.

특히 학교의 교실은 구체적인 생활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언어를 매체로 하여 그 세계에 관한 이론적 지식을 주고받는 학습의 장이다. 말하자면 언어로써 표현되고 전달되고 숙의되는 지식이 학습되는 곳이다. 상징의 매체인 언어나 기호에 의해서 성립되는 이론적 지식은 인간의 이지적 상상력을 자유롭게 한다. 언어의 상징적 기능만으로 교실은 세상의 수없이 많은 사실들을 다룰 수 있는 학습의 장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염려할 일은 언어의 상징적 기능은 관조적 지식을 성립시키는 대응설적 진리를 보장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허위나 오류나 회유나 기만 등이 알게 혹은 모르게, 때로는 고의로 혹은 선의로 발생할 수가 있다. 여기에 교사가 직업윤리의 준엄한 통제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셋째, 관조적 지식은 많은 내용을 짧은 기간 동안에 가르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특징은 학습의 과정이 위에 언급한 언어적 상징수단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제도적 교육을 받는 기간이 짧지는 않다. 그러나 그 기간에 학습하는 내용은 학습자의 직접적인 경험의 세계에 들어오는 내용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지식을 전달받고 있다. 언어와 문자를 소유한 인간 세계가 받은 축복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만큼 실물적 경험에서 멀어질 경향이 있고, 학습자는 그러한 대량의 지식으로 과부하가 되면 균형적 성장을 방해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탐색적 교사가 가르치면?

듀이는 사실상 관조적 지식에 관해서 단언컨대 별로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오류로 규정하였다. 관조적 지식관은 그 자체의 의미 속에 진리에 관한 대응설적 전제를 수용할 수밖에 없고, 인간 유기체와 환경적 세계를 분리시키는 이원론적 구조를 상정해야 하며, 따라서 경험(혹은 인식)의 주체가 지녀야 할 자율적 성장을 설명하지 못한다. 관조자가 실제로 당면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상적 삶에서 얻은 정보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관해서는 별로 말해주지 않는다. 그냥 피동적으로 관찰하고 있는 구경꾼일 뿐이다.

첫째, 탐색적 지식의 학습은 학습자에게 논리적 구조나 형식의 이해보다는 학습자의 지력에 호소한다.

여기서 지력의 개념은 문제해결의 능력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력이 작동하는 상태를 일컫는 반성적 사고는 인간의 목적지향적인 행위나 삶의 과정이 장애나 혼란을 겪는 상황, 즉 문제상황에 임하여 자신의 지력을 동원하여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적 노력을 의미한다. 지식(혹은 앎)은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사가 학습자의 지력을 동원하여 반성적 사고를 활성화하고 생산적인 학습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하자면, 무엇보다도 적절한 문제상황을 학습자들에게 효율적으로 제공하여야 한다. 그러나 지력의 발달, 사고력의 증진, 현실적인 생활세계와의 관계 등을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못하면 탐색적 지식의 학습이 빈곤한 내용과 혼란된 판단을 가져 올 수도 있다.

둘째, 탐색적 지식관에 의하면 모든 지식은 원천적으로 질성적 사고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한다.

관조적 지식은 언어와 기호 등을 상징적 매체로 한 이론적 지식에 관한 것이다. 대응설의 본질은 상징적 매체에 의해서 표현된 내용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바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언어 혹은 기호는 그 자체가 상징적 기능을 하자면 그것이 대응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내용은 원천적으로 질성적 내용이며, 매체는 질성에 이름을 붙이는 기능을 한다. 탐색적 지식관이 가지는 질성적 관심은 학습자에게 경험의 메마른 형태인 이론적 내용보다는 삶의 현장에 연결된 구체적 문제와 필요에 접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학습의 경험은 논리적 형식과 체제를 갖춘 잘 구조화된 경험을 유지하는 데 불리한 논리적 관심과 다소 방만한 형태를 보일 수가 있다.

관조와 탐색의 이원론을 넘어

듀이가 탐색적 지식관으로 관조적 지식관을 대결하여 비판한 것은 자신이 일관되게 경계해 온 “이원론적 대결”을 자신이 스스로 수용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지식의 추구에서 “관조”와 “탐색”은 상방이 목적과 수단의 관계를 바꾸어 가면서 듀이가 스스로 추구한 경험의 통일성을 충족시키는 성과를 보일 수도 있다. 관조 속에 탐색이 활동하는 자리가 있고 탐색 속에 관조의 여유를 요청하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그 균형이 한 쪽으로 기울면 그것은 그런대로 학습자의 개성이 되기도 한다.

관조적 지식관은 학습의 장에서 “박식한 선비”를 키우고자 하고, 탐색적 지식관은 기능적 사고에 유능한 “문제의 해결사”를 만들고자 한다. 관조적 지식을 주로 한 학습자는 탐색적 지식을 주로 한 학습자보다 세상에 관하여 상대적으로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을 소유할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탐색적 지식을 위주로 한 학습자는 관조적 지식을 주로 한 학습자보다 상대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기능적 능력을 발휘하는 데 더욱 익숙한 모습을 보일 수가 있다. 물론 이러한 비교는 사람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상대적인 것이다.

고도의 이론적 지식을 미루거나 멀리하는 것보다는 그러한 지식을 학습자의 경험이 지닌 성장의 수준에 맞추어 마치 게임에 임하는 경우와 다름이 없는 흥미의 경지를 유도한다면 더 이상 훌륭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생활에서나 직업에서나 요구되는 중요한 정보나 지식을 탐색적 지식의 원리를 적용할 수 있는 경험의 소재로 조직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방법으로는 암기나 주입의 방법에 의한 학습보다 많은 시간을 요구하고 결국에는 덜 경제적인 학습이 될 수도 있다.

새로 구입한 기계를 조작하는 데 그냥 덤비기보다는 차분히 매뉴얼을 따르면 땀을 적게 흘리고 빨리 익숙하게 된다. 운동선수를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코치가 필요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고분고분하게 시키는 대로 하는 선수는 더욱 성장하기가 어렵다. 탐색적 지식은 관조적 지식보다는 학습자의 총체적 경험 속에 훨씬 조화롭게 심도 있게 융합되고 인격의 심층적 구조에 통합된다는 기대를 할 수가 있다.

교사가 상대적으로 더욱 유의미하고 실제적으로 유용한 지식을 중심으로 학습의 장을 구성하고자 할 때, 일반적으로 손쉽게 관조적 지식의 개념에 의존하는 것보다는 탐색적 지식의 개념에 따라서 균형 있는 학습의 장을 만들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