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연 전 평택교육지원청 교육장

김기연 전 평택교육지원청 교육장
김기연 전 평택교육지원청 교육장

문명은 오랜 기간에 걸쳐 진화한 것이지 순간적인 혁명을 통해 형성된 것이 아니다(하이에크). 따라서 사회적 담론은 치열한 토론과 여론 수렴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한국사회 갈등지수가 OECD 회원국 중 네 번째로 높다고 한다. 가히 사회적 지진 수준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에 이르기까지 발전을 위한 몸부림인지 퇴보를 위한 사회적 소음인지 머리가 혼란스럽다. 정호승 시인은 “인생의 힘은 견디는 힘”이라고 말하였지만 인내의 임계점을 벗어나고 있다는 시중의 여론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은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첫째, 정책 불안정성 둘째, 비효율적 관료사회라고 했다. 백 번 맞는 말이다. 필자의 견해를 추가한다면 정치권의 암종(癌腫)이 말기 암 수준이 아닐까 한다. 국회의원의 특권부터 인구대비 숫자는 기업이었으면 벌써 파산하였을 집단이다. 국무위원 청문회 제도를 확대해 국회의원도 준법성, 전문성, 청렴성, 봉사성을 기준으로 선발해야 한다는 것이 대다수 시민의 여론이자 바람이다. 요즘은 국회의원을 흉내 내는 기초의원, 광역의원을 보면서 필설로 쓰기에 거북할 정도로 분노하는 시민이 대다수다.

그래도 믿을 직역(職域)이 교육계인데 이 역시 전술한 집단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헌법정신에 의한 교육의 중립성은 온데간데없고 정치화된 교육감과 일부 동조 교사들이 교육계의 물을 흐리고 있다.

교육감 권력은 ‘다모클레스의 칼’이다

‘다모클레스의 칼(Sword of Damocles)’처럼 권좌(교육감)는 한 올의 말총에 매달린 칼 아래 앉아 있는 것처럼 위험한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렇다 보니 겉으로 보이는 교육계는 평온하다.

그러나 내시경과 현미경으로 보면 암종 덩어리가 전신 암 수준이다. 보편적 복지라는 핑계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공짜 아니면 반값으로 교육받을 수 있다. 학생인권 조례는 미성숙한 학생들의 교육적 생활지도마저 교사들의 손발을 묶어 놓았다. 교육자가 아닌 NGO나 인권 운동가의 구호가 더 적합하고 타당하다.

혁신은 사전 속 공공재다. 특정 집단의 전유물이 아니다. 마치 전매특허처럼 독점권을 주장하니 실소(失笑)를 금할 수 없다. 이 모두가 정론이 아니고 부의(浮議)이다. 권위는 사회를 지탱하는 내구력이다. 한데 내구력이 소진되고 있다.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청와대까지도 권위가 비틀거리자 조롱과 매도가 춤을 춘다. 나꼼수 같은 저질 저널리즘과 SNS도 같이 춤을 춘다. 사색과 논리는 실종되고 나꼼수 같은 조롱이 너울성 판을 친다. 걸레 같은 말이 자기 목을 치는 칼이 될 수도 있다는 소박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사회가 경박해 지면서 일의적(一義的) 가치가 뒤로 밀리고 있다. 중심가치가 흔들리니, 부속가치도 혼란스럽다. 줄기가 흔들리니 가지가 요동치는 격이다. 가치의 뿌리가 흔들리는 곳에서는 ‘비즈니스’가 성공할 수도 없고, 교육이 뿌리내리기도 어렵다. 어쩌다가 대한민국 교육이 이 지경이 되었나?

교육계 양심세력은 어디로 갔나

한국의 사회상을 설교가 헨리 워드 비처(Henry Ward Beecher)의 말을 빌리면, 한국 정치는 스프링 없는 마차와 같다. 길 위의 돌에 부딪힐 때마다 삐걱거린다고 하였다. 이는 완충장치 격인 타협과 양보의 정신이 없는 데 문제가 있고, 사회원로들의 침묵에 기인하고, 교육자적 양심 세력의 실종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같은 원인에는 여러 요인이 있을 수 있지만, ‘하는 짓거리들이 하도 꼴 같지 않아 차라리 외면하고 사는 것’이 본인의 정신 건강에 이롭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노인(老人)’이라는 말에는 어느덧 사회·경제적 ‘부담’이라는 은유(隱喩)가 덧씌워지고 있는 것이 불편한 진실이자 슬픈 현실이다. 이렇다 보니 교육계 원로들은 소외되고 고언(苦言)이 없다 보니 숭례(崇禮)는 커녕 비례(非禮)를 넘어 무례(無禮)도 이만저만이 아닌 역사 부정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김대중 정권에서 원로교사를 무능교사로 매도하여 정년 단축을 시발로 노무현 정권의 무자격 교장이 등장하면서 교육계가 엉망진창이 되었다. 원로교사가 창고세일 신세가 되다 보니 침묵하는 것이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도 75세 나이였고, 모 교육감은 74세에도 노추(老醜)를 숨기고 권력에 짙게 물들어 있지 않은가?

하지만 마틴 루서 킹 목사는 “어둠으로 어둠을 몰아낼 순 없다, 증오로 증오를 몰아낼 순 없다. 오직 사랑만이 증오를 몰아낼 수 있다”고 하였다. 삶의 스승격인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가 내놓는 메시지는 자유와 사랑 그리고 자기 인식과 타인에 대한 존중이 지혜롭게 어우러져 있다. 어지러운 교육계에 등대가 되고 방향타가 되어야 할 교육계 원로들의 침묵은 교육자의 자세도 아니고 방관과 방임은 더더욱 안 된다. 용기와 만용이 종이 한 장 차이인 것처럼 현명과 비겁 역시 종이 한 장 차이다.

교육 본질성 회복 위해 고르디우스의 매듭 끊어야

프리기아의 수도 고르디움을 세운 고르디우스의 전차(戰車)에는 끝을 찾을 수 없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매듭으로 끌채에 멍에를 묶어놓았다고 한다. 이 매듭을 푸는 사람이 아시아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는 신탁(信託: 인간이 판단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인간의 물음에 대한 신(神)의 응답)이 전해져 많은 사람이 풀려고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알렉산더 대왕이 원정길에 아나톨리아 지방을 지나가던 중 고르디움에서 이 전차를 보았고, 매듭을 풀려다가 실패하자 성미가 급했던 그는 칼을 뽑아 매듭을 내리쳤다. 매듭이 끊어져 풀어졌다. 신탁대로 알렉산더 대왕은 아시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처럼 난마처럼 얽힌 어려운 문제를 대담한 행동으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교육계의 본질성 회복을 위한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어야 한다.

자고로 초·중등교육 행정은 초·중등 교원 경험이 있는 사람이 하여야 함은 시대의 당위이자 절대적 요구 사항이다. 단, 교원 중에도 특정이념과 정치적으로 짙게 물든 사람은 배제해야 함은 우리나라 17개 시도교육감들의 행태가 반증하고 있지 않은가?

교수나 정치인 출신 교육감은 초·중등 학생을 가르쳐 본 경험이 없다. 그러다 보니 교육의 본질보다는 인권, 무상복지, 뜬구름 잡는 현학적 정책 같은 곁가지에 더 치중하는 정책을 펼친다. 애초에 이들은 일선 교원의 어려움과 애환을 체험해 본 경험이 없어 전시행정에 치우치는 경향이 다분하다. 이렇게 현장 경험이 없다 보니 현장하고 겉도는 교육의 ‘키치(Kitsch)’ 상품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본청(시·교육청)에서 메뉴를 정하더라도 요리는 현장 자율에 맡겨야 함은 지극히 보편적 상식이다. 본청이 현장의 요리사(교원)를 제치고 화덕의 종류도 지정하고 양념까지 직접 치려는 데서 문제가 시작된다. 사회학에서 말하는 ‘구성의 오류’다.

“절대반지는 빛나는 만큼 위험하고, 강한 만큼 나를 왜소하게 한다.” 반지의 제왕이 주는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