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주의의 전통 : 그 한계와 대안 '자유교육'

교육계와 교육학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학계에서도 존 듀이(John Dewey)는 누구에게나 이미 잘 알려진 이름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알려진 만큼 그의 이론이 잘 이해되고 소개되어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의 사상은 ‘실용주의’, ‘실험주의’, ‘진보주의 교육’, ‘새교육’이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어 왔고, 우리의 교육계와 교육학계는 그를 현대적 교육사상의 근원인양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교육계에서 심도 있게 평가된 수준은 아니었다. 에듀인뉴스는 정치와 교육의 이념적 갈등이 극심하고 특히 자유주의적 전통과 강령적 기조에 대한 이해의 혼란이 심각한 수준에 있는 이 때, 존듀이의 실험주의적 자유주의와 이에 관련한 교육사상을 검토해 보는 ‘왜, 지금 존 듀이를 읽어야 하나’를 연재한다.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서울대 명예교수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서울대 명예교수

언어와 문자, 학교의 등장과 지배계급의 기초

아마도 교육의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유교육(Liberal Education)의 전통이다. 자유교육은 학교제도의 발달과 함께 자리 잡은 것이고, 학교는 본래부터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다.

기본적으로 지식은 사물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언어나 기호로써 표현된다. 문자가 사용되면서 사물에 대한 서술이 가능하게 되고 지식에 대한 설명과 토론이 더욱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서술된 것은 체계적으로 전달되고 보존되고 재생산될 수 있다.

물론 문자와 지식이 발달하기 이전에도 군사적인 목적으로나 생산적인 활동을 위하여 젊은이들을 집단으로 조직하여 가르친 기록들이 있지만, 학교는 문자 문명이 자리를 잡고 정보 혹은 지식의 보존과 전달과 생산을 필요로 하는 시기에 본격적인 발달의 단계에 이르렀다.

문자를 가장 먼저 필요로 한 사회적 기관은 통치조직인 왕실과 종교조직인 사원 등이었다. 제후, 국왕, 황제 등의 직무실에서는 통치를 위한 정책과 제도를 공식화하고, 재산과 병력을 관리하기 위하여 문자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문사들을 필요로 하였다. 그리고 종교조직의 사원에서도 교리를 체계화하고 경전을 개발하여 교세를 유지하고 전파하기 위하여 문자를 사용할 필요가 있었던 곳이다. 이러한 문자의 필요는 단순히 통치자나 성직자의 측근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주변의 통치집단과 성직단체가 문자의 사용을 통하여 정보, 규칙, 사상 등을 공유하게 된다.

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간에 지배계급은 현실적 필요에서만 아니라, 사물과 우주에 대한 이해를 비롯한 온갖 이지적 욕구의 충족으로 문자를 통한 지식의 개발과 보존과 전달과 재생산을 담당하는 전문적 요원인 문사(文士)들이 충원되어야 했다. 문사들은 하나의 사회적 계급을 형성하게 되고, 이들을 전문적으로 양성하기 위한 학교제도는 주로 문자를 사용한 지식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언어는 말할 것도 없고 문자가 없는 상태에서는, 인간이 본래 사고의 능력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물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고 이해하고 심화하고 재조직하는 일은 지극히 제한된 수준에서만 가능한 것일 뿐이다. 언어와 문자는 지식을 성립시키고 그것을 보존하고 활용하고 재창조하는 탁월한 도구이다. 그것이 바로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만이 소유한 자연적인 능력이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감정도 표현하고 생각도 정리하며 타인에게 지시도 하고 명령도 내린다.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언어가 문자와 함께 사물과 세계를 표현하고 이해한 것을 조직한 지식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관조자가 근원이 된 '자유교육'

아마도 발생론적으로 보면 문자를 사용한 이론적 지식의 일차적 특징은 ‘관조적(觀照的) 지식’일 것으로 추정된다. 지식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물에 대응하는 진실된 그림인 ‘표상(表像)’을 만들어 낸다. 이 표상은 사물과 세계를 관조한 사람이 그 대상물을 마치 진지한 구경꾼처럼 그려 보인 것이다.

그러나 관조자가 세상을 보는 것은 감각적 기관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만 의존하면 일관성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진다. 관조자에 따라서, 혹은 같은 관조자라고 하더라도 사물을 관조하는 시기에 따라서, 사적인 경험과 사정에 따라서, 같은 사물이라도 같은 것으로 이야기되지 않는다. 그러면 감각기관을 통해서 얻어진 표상의 확실성과 진실성을 신뢰하기가 어렵게 된다.

의심이 발생하면 감각적 표상에 메이지 않고 그 표상을 소재로 하되 내심의 사유작용이 시작되고, 더욱 확실하고 불변하며 영원한 것으로 말할 수 있는 내면적 표상을 찾으려는 체계적인 노력으로 진행된다. 만약에 그러한 내면적 표상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 성립하면, 그 표상은 ‘허상(虛像)’이 아니라 ‘실상(實像)’으로서 이러한 사유의 결과는 진리를 보장하는 위치에 있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허상은 일상의 범인들도 가질 수 있는 것이지만, 실상은 특별한 사유의 능력, 즉 이성적(합리적) 능력을 가진 사람인 철인(哲人)들만 접근이 가능한 것이다. 철인들은 아무런 제약 없이 자신의 이성적 능력을 발휘하고 여가를 향유하면서 인간세계와 자연세계를 탐구하는 자유를 소유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교육이 바로 ‘자유교육’이다. 이렇듯 자유교육의 사상 그 자체는 발생론적으로 볼 때 귀족주의적 근원을 가지고 있다. 자유인에게는 노예들과는 달리 ‘여가’를 즐길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여가는 모든 외부의 요구나 속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하는 삶의 여유를 의미한다. 거꾸로 말해서 여가를 소유할 수 없는 사람은 자유인일 수가 없다.

플라톤(Platon)과 더불어 자유교육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Aritoteles)는 당시에 자유인이면서도 노예들이 해야 하던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매우 안타깝게 여긴 바도 있다. 생산에만 종사하면서 여가를 소유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유인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유인은 여가의 삶에서 인간의 본연적 능력인 이성(理性)을 계발할 수 있고, 그것이 발휘하는 힘, 즉 합리적 능력의 작용을 의미하는 ‘사유(思惟)’를 즐길 수가 있다.

사진출처: 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자유인, 교육에 의해서 합리적 존재가 될 수 있다

노예제도가 없는 민주적 사회에 살고 있는 오늘의 자유인도 역시 남의 의지가 아닌 자신의 의지에 따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 자유교육의 전통을 귀하게 여긴 사상가들은 이러한 자유인은 ‘합리적(이성적) 존재’일 때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교육에 의해서 자유인 곧 합리적 존재가 될 수 있고, 교육에 의해서 그런 존재로서의 삶이 유지된다고 믿는다.

참으로 자유롭고자 하는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교육은 합리적 능력을 도야하고 지성을 계발하는 일이다. 이러한 능력의 도야는 일차적으로 의사소통을 위한 기술, 즉 주로 읽고, 말하고, 쓰고, 듣고, 셈하고, 생각하는 기술을 익히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의 마음과 지성은 그 자체를 지식과 지혜로써 채우고 진리를 획득하고 사상에 통달하는 경지에 이르도록 계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특히 철학, 과학, 역사, 문학 등에 걸친 모든 분야의 중요한 고전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고전들은 인류의 역사에서 수없이 많은 세대를 거쳐 이어져 온 지성이 계발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1)

1) M.J. Adler, “The Crisis in Contemporary Education,” The Social Frontier 5: 141-144. February, 1939.

동서양을 통하여 가장 체계적인 이론적 바탕 위에 가장 일관된 원리를 주장해 온 교육관으로는 자유교육의 전통에 비길 만한 것이 없다.

자유교육관은 제도적 교육을 시작한 사회적 동기와 목적을 가장 근원적으로, 가장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고전적 이해 방식이다.2)

2) 이돈희, 「교육과 정치」 (서울: 에듀팩토리, 2016), p. 20

물론 그 원천적 의미는 고대 그리스의 지식인 세계에서 연유한 것이고, 사회의 구조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다소 다양성을 보여 왔지만, 면면히 이어온 전통적 의미와 가치는 언제나 재음미해 볼 필요를 느끼게 한다. 어떤 의미에서 교육목적론에 관한 논의는 자유교육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위한 담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전통적 자유교육론이 ‘합리적 사고의 능력’을 교육의 핵심에 둔 전통은 인류의 교육사에 남긴 위대한 유산임에 틀림이 없다.

자유교육의 개념은 주로 서양문명의 세계에서 형성되고 발전해 온 것이지만, 동양의 전통, 특히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활동으로 다양한 사상과 이론이 생산되던 시기로부터 이어진 학문과 교육의 풍토는 그 나름으로 일종의 자유교육적 의미와 가치를 지닌 전통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자유교육의 개념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서 다양한 구체적 활동과 제도로 실천되었지만,

문명사회를 창출하고 주도해 온 교육정신의 ‘중심적 원리’이며 또한 교육실천의 ‘중핵적 규범’으로 이해된다.3)

3) 이돈희, 위의 책, pp. 4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