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존 듀이를 읽어야 하나] '듀이를 다시 읽자'고 한 이유는②
[왜, 지금 존 듀이를 읽어야 하나] '듀이를 다시 읽자'고 한 이유는②
  • 지준호 기자
  • 승인 2019.01.02 10: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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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주의의 전통 : 그 한계와 대안 '자유교육'

교육계와 교육학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학계에서도 존 듀이(John Dewey)는 누구에게나 이미 잘 알려진 이름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알려진 만큼 그의 이론이 잘 이해되고 소개되어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의 사상은 ‘실용주의’, ‘실험주의’, ‘진보주의 교육’, ‘새교육’이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어 왔고, 우리의 교육계와 교육학계는 그를 현대적 교육사상의 근원인양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교육계에서 심도 있게 평가된 수준은 아니었다. 에듀인뉴스는 정치와 교육의 이념적 갈등이 극심하고 특히 자유주의적 전통과 강령적 기조에 대한 이해의 혼란이 심각한 수준에 있는 이 때, 존듀이의 실험주의적 자유주의와 이에 관련한 교육사상을 검토해 보는 ‘왜, 지금 존 듀이를 읽어야 하나’를 연재한다.

플라톤(BC 427년 ~ BC 347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객관적 관념론의 창시자, 소크라테스의 제자. 귀족 출신. 40세경 아테네 교외의 아카데미아에 학교를 열어 교육에 임하였으며, 또한 많은 저작(30권이 넘는 대화편)을 썼다. 그의 철학은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당시의 유물론자 데모크리토스의 사상과 대립하였다. 출처=네이버지식백과
플라톤(BC 427년 ~ BC 347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객관적 관념론의 창시자, 소크라테스의 제자. 귀족 출신. 40세경 아테네 교외의 아카데미아에 학교를 열어 교육에 임하였으며, 또한 많은 저작(30권이 넘는 대화편)을 썼다. 그의 철학은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당시의 유물론자 데모크리토스의 사상과 대립하였다. 출처=네이버지식백과

주지적 교육의 위세와 그 함정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진지하게 검토해 볼 사항은 자유교육의 근원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사상가들이 보여준 ‘관조적 지식관’이다. 그들은 자유교육의 정신과 함께 관조적 지식의 전형적 근원이기도 하다.

그들은, 당시대에 영향을 미쳤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이래, 일반적으로 실재하는 것의 참 모습은 우리가 인식하는바 그대로라는 일종의 인식론적 실재론(Realism)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어떤 대상에 대하여 우리는 그것을 존재하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고, 그리고 인식한다는 것은 존재하는 그대로를 안다는 것이다.

존재에 관해서든, 윤리에 관해서든, 예술에 관해서든 간에, 철학이 탐구하는 주제는 어느 것이나 인식, 즉 우리가 참으로 알고 있는 바의 핵심적 본질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존재와 진리와 지식에 관한 탐구는 성격상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론적 실재론에 대하여 듀이(John Dewey)는 ‘주지주의자의 오류’라고 비판하였다.

그렇지만, 자유교육의 중핵을 이루어 온 관조적 지식과 이론은 합리적 사고의 전형으로 인식되어 왔고 인류의 지성적 역사를 주도하는 위세를 보여 왔다. 그러면 그 위세의 근원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 내가 보기로 그것은 이론의 기능적 힘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론의 기능적 힘..."자유로운 상상"

‘이론’이라는 말은 흔히 ‘사물’, ‘실천’, ‘현실’ 등의 말과 대립되는 혹은 구별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이론은 지식의 가장 대표적인 형식이다. ‘이론’은 넓은 뜻으로 이해하면 구체적 사물이나 실천적 과정이나 현실적 상황 그 자체가 아니라, 언어나 기호 등의 상징적 수단들을 사용하여 사물이나 활동이나 상황을 표현한 내용과 그 의미를 가리키는 말이다.

좁은 뜻으로 말하면, 이론은 그러한 표현들이 어떤 규칙에 의해서 조직되어 있는 체제를 가리키고, 가장 넓은 의미로서는 언어 혹은 기호로써 ‘서술적으로’ 표현된 모든 것이 이론의 범주에 속한다.

언어 혹은 기호는 특징상 그 자체가 아닌 어떤 것을 대신하여 무엇인가를 나타낸다. 그 대상은 구체적인 사물이거나, 신체적 활동이거나, 마음의 상태이거나, 어떤 허황한 공상적 내용이 되기도 한다. 상징적 수단인 언어나 기호는 사용자가 자유자제로 조작하고 통제할 수 있지만, 그것이 나타내는 대상에 대해서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구체적 조작이나 변화를 가져 오지 않는다. ‘그리운 금강산’의 노래를 수없이 불러도 그 산은 그대로 존재한다.

사물의 형태나 구조나 속성이나 상태는 이미 상징적 수단에게 필요한 내용을 남겨 두고 그 자체는 객관적으로 떠나 있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의 머리와 마음은 상징적 수단만을 조작하면서 실제적 대상을 상상적으로 묘사하거나, 변화를 가하거나, 어떤 특징으로 장식할 수도 있다.

가령 내가 백화점에서 예쁜 탁상시계 하나를 보았다고 하자. 내 앞에는 그 시계가 없지만 내가 본 시계를 마치 내 책상 위에 놓아 둔 것처럼 마음속으로 생각하여 그려 볼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전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그 시계를 상상으로 여기저기에 놓아 본다. 그 시계에 관한 이야기를 가족들과 함께 이야기하면서 언제라도 내가 백화점에 가서 그 시계를 사고야 말겠다고 결심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이론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로운 가상적 조작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가상적 조작의 가능성이 바로 이론으로 하여금 실제와 유리될 수 있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자유로운 상상적 조작은 바로 ‘이론의 힘’을 생산한다.

이론은 실제의 구체적이고 복잡한 현장을 그대로 두고 실제의 상황을 상상적으로 조작한다.

그만큼 실질적인 사고와 행위를 단순화하고 경제적이게 한다.

우리의 마음은 이론과 더불어 있을 때 실제의 복잡하고 무질서한 상태를 정연한 논리적 체제로 바꾸어 놓을 수 있고 상상적 자유를 제대로 향유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자유로운 상상적 조작에 의하여 실제를 상상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실제 그 자체를 체계적으로 처리하고 조작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이론의 힘이다.

이론 혹은 그것을 구성하는 언어적-상징적 표현은 어떤 대상물에 대한 ‘이름’이다. 구체적 물체이거나, 사물의 속성이거나, 위상적(位相的) 관계이거나, 마음이 작용하는 방식이거나, 행위 혹은 동작의 특징이거나, 의식의 과정에 떠오른 순수한 형식적 관념, 그 어느 것이거나 간에, 이론은 어떤 대상물을 나타내어 주는, 즉 그것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 사물이나 실제의 과정 그 자체의 전부일 수도 있고, 그 대상이 어떤 범주나 차원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지각한 혹은 의식한 어떤 특징을 추상화한 내용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론은 그것의 도움으로 마음이 자유를 누린 정도에 비례하여 실제와의 관계가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 ‘붉다’는 말은 특정한 색깔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그 색깔의 속성을 지닌 꽃이나 천이나 물감 등의 사물을 구체적으로 관찰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정의롭다’든가 ‘고매하다’든가 하는 말은 구체적인 실물적인 내용으로 연상하기가 매우 어렵다.

추상화의 정도가 높을수록, 그리고 조작의 자유를 누린 정도가 높을수록 이론은 실제와 거리를 두게 된다.

이론적 설명의 장단점

이론적 설명의 경우에 사물에 대하여 작용하는 설명력의 범위는 클 수 있으나 구체성은 떨어진다. ‘교육기관’이라는 이름은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 등의 이름보다는 더욱 추상적인 의미를 담고 있고 언급하는 설명의 범위는 넓지만 그것이 나타내는 구체성은 떨어진다.

또한 실행적 절차의 경우에 포괄성은 있으나 실질적 과정을 제시하기에는 모호성이 있다. ‘경제속도’로 달린다는 말은 어디에서는 시속 50킬로미터로 달린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실제로 행하는 규칙의 포괄성은 높으나 구체적으로 준수해야 하는 규칙으로는 모호하다.

그리고 의사표현의 경우에 공감대는 넓으나 절실함은 줄어든다. 오늘 발표한 노래는 ‘천재적 성악가’의 노래로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추상적 평가에 동의할 수는 있으나 2000년대에 발표한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난 노래로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하면 동의하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다.

18세기 후반, 이론의 가치가 관심 밖으로 밀려나다

전통적으로 이론은 교육내용의 대종을 이루어 왔다. 그것은 이론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힘의 교육적 가치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론의 힘에 의해서 형성된 사회적-정치적 힘의 작용 때문이기도 하다. 이론과 교육과 문사는 문명의 중추적 힘을 생산해 왔다.

그러나 이론적 방법의 힘은 전통적으로 귀족계급의 사람들이 행사해 왔던 힘이다. 그리고 학교제도가 귀족계급의 사람들에 의해서 창안되고 운영되면서 그들의 생활과 무관한 기예적(技藝的)인 혹은 생산적인 활동은 교육의 내용에서 배제되고, 이론은 이론으로서 가르쳐지고 전달되고 탐구되는 전통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론적 지식의 성격과 그것의 교육적 가치는 지식의 원천과 근거를 밝히는 철학적 사유, 즉 인식론의 발달과정에서 체계적으로 규명되고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경험의 비이론적 차원의 능력과 기술은 제도적 교육기관의 일차적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왔다.

18세기의 후반에 종합기술학교(Polytechnic School)가 출현하고 ‘백과사전학파’가 활동하면서 기술공학이 발달하기 시작한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그것의 교육적 가치는 관심의 밖에 놓여 있었다.

그리하여 지식을 다루는 교육활동에서 언급되는 경험도 인식론적 관심 영역 속에서만 이해되었고, 관조적 지식관의 영역밖에 있는 경험의 총체적 특성과 의미는 교육이론에서 체계적인 탐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결과적으로 지식은 인간이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것의 부분적인 것에 제한되고 지식 중심의 교육은 제한된 의미의 경험을 이지적 차원에만 한정시켜 버렸다.

이론, 도그마를 형성하다

이와 같이 경험의 총체성으로부터 분리시켜 인식된 이론의 힘은 때로는 의도적으로, 때로는 우연적으로 사회적 힘의 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한 도그마를 생산하거나, 그것을 정당화하는 데 봉사하기도 하였다. 이론은 본래 사물이나 인간의 행위가 지니고 있는 특징을 추상화한 결과의 것이지만, 그것이 실제의 구체적 사물과 영원히 결별한 상태에서 현실적 삶의 과정을 초월해버린 상상의 세계를 자유롭게 전개하기도 하였다. 추상적 원리의 논리적 완전성에 기초하여 그것을 순수한 질서의 세계 혹은 완전한 세계로 미화시키거나 신성화함으로써 현실세계의 지배를 위한 도그마를 생산한 것이다.

이론적 경지에서 우리는 실제적 경험의 내용을 고도로 추상화하면 순수하게 형식적인 관념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고, 그 경지에서는 모순과 결함이 없는 완벽한 체제를 형성하는 것이 언제나 가능하다. 마치 건축 설계자는 자신이 원하는 복잡하고 화려한 건축물이라도 상상의 힘으로 완벽한 것으로 설계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완벽성은 불안정하고 변화하는 조건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 세계의 ‘이상적 모습’을 제공한다. 그러한 세계에 대한 선망과 동경은 결국 도그마를 정당화하고 수용하는 의식의 바탕을 생산하였다. 이러한 도그마는 이론이 사물의 이해와 설명을 위한 방법으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감당할 필요도 그 여지도 없게 한다.

도그마가 된 이론은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실재 그 자체를 대신하는 자리에 있게 되었다.

즉, 이론 자체의 ‘실체화(Hypostatization)’가 된 것이다.

실체화된 이론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생산된 것이라고 여기게 함으로써 이성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고 이성은 오직 이 이론에만 작용하는 것으로 여기게 한다. 그리하여 실체화된 이론은 마음에서 이성이 작용하는 영역을 감성이나 의지나 행동이 작용하는 영역과 별개로 존재한다고 여기게 하고, 이성의 작용을 의미하는 사고는 오직 이론의 경지에서만 전개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그 결과, 이론과 무관하거나 그것과 거리가 먼 마음의 작용이나 삶의 과정은 그만큼 저속하거나 비천하며, 덜 자유로우며 수월성을 잃은 것으로 인식된다.

전통사회에서 볼 수 있는 사회의 계급적 분화와 유지도 이러한 이론적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실시된 교육의 제도적 운영에 의존하였다. 또한 실체화된 이론은 인간의 경험을 인위적으로 구획하고 교육에 의한 성장의 척도를 문사들이 지니는 이지적 차원으로 일원화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

체계적 사고, 지력의 활발한 활동 의미

그러나 사고는 결코 이론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악사가 악기를 연주할 때, 공예가가 작품을 만들 때, 축구선수가 공을 찰 때, 농부가 밭을 갈 때, 요리사가 조리를 할 때, 광대가 줄을 탈 때, 사업가가 기업을 출범시킬 때, 정치가가 당파적 갈등을 해결할 때, 그들은 이론적인 활동에 종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일차적으로 고도의 체계적인 사고를 한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언어나 기호의 도움을 전적으로 받지만, 그러한 상징적 수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사물 그 자체의 특징들을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조직적인 사고, 때로는 매우 정교하고 엄격한 사고에 몰입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사고에 몰입한다는 것은 지력의 활발한 활동을 의미한다. 그러한 지력은 특성상 본질적으로 이론적 사고에서 작용하는 지력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이론적 사고에서 이론적 상징들의 의미로서 함의하고 있는 내용도 원천적으로 그러한 사물의 특성들로부터 출발하여 추상화의 과정을 통해서 이론화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사실상 이론적 사고라는 것도 인간의 마음이 이론적 상징들을 다룰 때, 특히 과학적 설명의 경우에 실제적 사물에서 완전히 떠나서 전개될 수 없는 경우가 많고, 비록 실제와 떠나 있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대상이 추상화의 긴 여정을 거친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이론적 사고가 이성의 힘에 의해서 진행되고 이성은 이론적 사고에서 더욱 활발한 형식적인 활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마음의 다른 부분들이 전체적으로 휴식의 상태에 있고 오직 이성만이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이론적 사고에서도 고뇌가 있고 희열이 있으며 신체적 피로나 생동감이 함께 하고 있다.

비록 고도의 이론적 사고라고 하더라도 그 소재가 이론적인 것일 뿐이지 그것의 실제적 과정은 마음의 총체적 움직임이다.

형식논리의 사고 혹은 추리에 있어서 이론적 전제나 결론의 논리적(형식적) 연결은 마음의 움직임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활동이 진행된 과정을 이론적-상징적 수단에 의해서 전제와 결론으로 ‘보고한’ 것이거나 구별된 것일 뿐이다.

이러한 마음의 활동은 경험의 전체적인 체제와는 임시로 혹은 영구히 분리해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경험의 과정과 역사 속에 있을 때만 그 실질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만약에,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만약에, 그러한 역사와 환경을 떠나서 이론적 사고를 진행하는 마음의 활동이 있다면, 그것은 문화적 진공 속에서 혹은 무의미한 재료를 내용으로 하는 공허한 활동일 뿐이다.

이론은 본질적으로 실제와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분리된 이론은 경험의 단면만을 생각한 결과적 산물이거나 실제적 사물들의 추상화 과정에서 생긴 혼란으로 인하여 다시 구체화하는 ‘귀로(歸路)’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론이 지니는 실제적인 힘은 그 귀로를 되찾을 때 성립된다. 그 귀로가 악의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조작될 때 이론은 횡포의 수단이 되고, 그 귀로가 나태하거나 성급한 사람들에 의해서 환상적으로 제시될 때 이론은 미신이 되며, 그 귀로가 맹목적으로 규정될 때 이론은 우상이 된다.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서울대 명예교수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서울대 명예교수

대안 : 탐색적 개념의 지식

듀이는 지식에 관하여 ‘보는 사람의 이야기’로 비유할 수 있는 관조적 지식의 개념 대신에 ‘탐사자의 이야기’와 같은 탐색적 노력의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탐색적 노력의 목표는 사물의 본질에 관한 어떤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지력을 동원하여 탐색의 목적인 문제의 해결에 도달하는 것이다.

탐색적 지식은 결론적인 것이 아닌, 보다 나은 해결의 방법을 추구할 여지를 두고 있는 잠정적인 주장일 뿐이다. 오류의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단정적인 최종의 결론으로 주장하면 언제나 다른 주장과 배타적으로 대립하게 되지만 잠정적인 문제해결의 방안은 더욱 나은 방안을 언제나 대기하는 열린 마음으로 임한다. 해결의 방법을 한 가지로 고집하지도 않고 다원적으로 허용한다.

그러면, 탐색적 지식의 경우에 ‘진리’의 의미는 없는 것인가? 진리와 확실성의 조건은 다르다. 어떤 명제의 진리 여부는 결론적으로 진실과 허위의 질적인 판단을 요한다. 그러므로 어떤 명제에 대한 신념은 진실이 아니면 허위에 해당한다. 그러나 어떤 명제의 확실성의 여부는 확률적으로 상대적 판단을 허용한다.

예를 들어, 암환자의 진료를 맡아 있는 의사는 그 암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밝히는 진단이 절대적으로 확정될 때까지 기다리기보다는 가장 확실하다고 판단되는 가설적인 원인의 진단에 의해서 몇 가지의 안전한 처방을 시도해 본다. 만약에 질병이 완화되었다면, 진단한 내용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암의 원인에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할 수 있고, 완전히 치유가 가능했다면 가설적이었던 원인의 진단은 문제해결에 가장 효율적인 지식으로 확인 될 수 있다.

만약에 다른 방법이 기술적으로 단순하고 비용이나 시간을 줄일 수 있다면, 이것 역시 탁월한 문제해결의 방법이고 이러한 가설적 진단은 더욱 효율성이 높은 지식이 된다.

지식의 확실성은 도구적 효율성으로 말하게 된 것이다. 지식의 의미를 진위적(眞僞的) 확실성의 여부로 규정하기보다는 도구적(道具的) 효율성의 정도로 규정한 것이다. 도구적 효율성이 매우 낮은 가설 혹은 처방이거나, 처방의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되는 부작용과 같은 것도 특정의 문제해결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아도 그것이 지니는 효율성의 정도만큼 유용성을 말할 수도 있다. 이러한 원리가 바로 프래그마티즘의 지식론을 일컬을 때 흔히 ‘도구주의’(Instrumentalism)라고 하는 이치이다.

듀이는 자신의 탐색적 방법을 ‘명시적 경험의 방법(Denotative-Empirical Method)’이라고 하였다.

탐색적 방법으로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은, 무엇보다도 먼저, 당면한 상황에서 발생한 문제의 성격을 개념화해 의미를 규정하고, 다음에 체계적 분석과 탐색을 거쳐 밝혀진 결과를 확인한 후에, 그것을 다시 본래 맥락 속에 되돌려 검토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분석과 탐구의 결과로 확인된 그대로가 우주 혹은 자연에 있는 구성요소라고 단정해 버릴 수 있다. 그러면 거기에 우리 자신의 관심사가 얼마나 작용했는가는 무시해 버린 것이다. 바로 ‘주지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

듀이의 이러한 명시적 방법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먼저 개념 혹은 의미를 규정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당면한 문제로 의식한 독특한 상황이 있고 그 상황을 지배하는 특징을 확인하여 문제의 성격을 개념화하여 이를 밝힌다. 그 문제상황은 반성적 사고의 대상이 된다. 거기서 밝혀진 문제의 성격에 따라 해결을 위한 가설적 방법들을 생산하고, 그 방법들의 각각이 가져 올 결과를 예측하는 ‘내심의 예행적 연습(Iimaginative Rehearsal)’을 통하여 검토하고, 가장 확실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가설을 선택하여 실제로 검정의 과정을 거치면 해결의 방안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 즉 문제해결의 경험은 어디까지나 특정한 상황에 관련된 것이므로, 그것으로 일반화하는 것보다는 본래의 상황이 발생한 맥락에 되돌려서 경험들이 교류되는 더 넓은 세계, 즉 경험의 문화 속에서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지준호 기자  casaji97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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