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존 듀이를 읽어야 하나] "경험의 예술성을 논하다"
[왜 지금 존 듀이를 읽어야 하나] "경험의 예술성을 논하다"
  • 지준호 기자
  • 승인 2019.01.28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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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교육계와 교육학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학계에서도 존 듀이(John Dewey)는 누구에게나 이미 잘 알려진 이름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알려진 만큼 그의 이론이 잘 이해되고 소개되어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의 사상은 ‘실용주의’, ‘실험주의’, ‘진보주의 교육’, ‘새교육’이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어 왔고, 우리의 교육계와 교육학계는 그를 현대적 교육사상의 근원인양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교육계에서 심도 있게 평가된 수준은 아니었다. 에듀인뉴스는 정치와 교육의 이념적 갈등이 극심하고 특히 자유주의적 전통과 강령적 기조에 대한 이해의 혼란이 심각한 수준에 있는 이 때, 존듀이의 실험주의적 자유주의와 이에 관련한 교육사상을 검토해 보는 ‘왜, 지금 존 듀이를 읽어야 하나’를 연재한다.

서양 전통 철학자의 ‘경험’과 듀이의 ‘경험’

‘경험’이라는 말은 일상적으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행하거나 겪는 과정 혹은 그 결과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 철학자들은 경험의 의미를 일상적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노력하는 활동이나 과정과는 거리가 먼 ‘이론적-사변적 수준’에 올려놓는다.

특히 서양의 근대철학사에서 ‘경험’이라는 말은 인식론적 용어로서 사물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이러한 경험의 개념은 대체적으로 우리의 마음 밖에 존재하는 것에 관하여 보고, 듣고, 만지면서 감각적 자료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마음의 내면에서 조직하여 지식을 형성하는 과정 혹은 그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인간이 소유한 지식, 확실한 지식의 근원을 밝히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의 경험은 사실상 우리가 평소에 무엇을 시도해 보기도 하고 겪어보기도 하는 것을 의미하는 일상적 의미의 경험과는 매우 다른 의미로 사용되거나 아니면 매우 제한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조금 더 자세히 경험론적 방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마음은 본래 ‘백지(Tabula Rasa)’와 같은 것이다. 거기에다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외관’(External Sense)의 범주에 속하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자료들을 수용한다. 그러한 감각자료를 마음속의 ‘내관’(Internal Sense)의 기능을 의미하는 반성적 작용으로 다시 서로 관련시키고 조직하고 구조화하여 지식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백지의 마음에 경험의 글씨를 써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의 의미는 서양의 17~8세기에 영국 철학계의 베이콘(Francis Bacon), 로크(John Locke), 흄(David Hume) 등이 전개한 인식론적 주류의 하나였던 경험론의 기본적 개념이었다.1)

1) 경험론(empiricism)의 반대편에 있던 당시 유럽 대륙 철학계의 Rene Descartes, Benedict Spinoza, Gottfried W. von Leibniz 등은 확실한 지식, 진리로 보장받을 수 있는 지식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온 표상(관념, idea)에서 추론된다는 합리론(rationalism)으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듀이의 경험은 서양의 전통적 철학에서 사용해 오던 경험의 개념과는 크게 다른 의미를 지닌 것이다. 말하자면 종래의 인식론적 개념이 아니라 일종의 ‘미학적’ 개념이다. 그것은 듀이가 ‘관조적 인식론’을 주지주의자의 오류로 규정하고 탐구적 논리로 대치해야 한다고 한 주장의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듀이의 경우에, 인식의 주체와 객체의 존재를 구분하는 이원론적 사고인 전통적 인식론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으로 평가하고, 경험을 우리의 일상적 삶과 무관하게 사용한 관념적-이론적 의미를 배척하였다.

듀이가 말하는 ‘교변작용’

“나는 그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라고 말하면 어떤 과정을 의미하고, “내게는 이런 경험이 있다”라고 말하면 어떤 결과를 의미한다.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은 그 과정이나 결과 모두가 마음 밖의 외계와의 관계에서 보고, 듣고, 접촉하고, 겪은 것, 즉 감각적 자료를 수용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피동적 과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과 활동이 오히려 외계에 작용하여 거기에 변화를 가져 올 수도 있는 능동적 기능이 함께 한다. 이렇듯 경험은 인간이 외계와 서로 ‘상호작용’(Interaction)하는 과정 혹은 그 결과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호작용과 원천적으로 무관한 경험을 생각할 수가 없다.

여기서 ‘외계’란 자연적-물리적 환경과 인간적-사회적 환경을 포함하는 것이다. 단순히 서로 관계하는 대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영향을 주고받고 그것으로 인하여 생명체인 인간도 변화하고 환경도 변화하는 관계, 즉 그 상대방을 서로 변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듀이는 후기에 이르러 상호작용이라는 표현 대신에 ‘교변작용’(Transaction)이라는 표현을 더욱 자주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능동적-피동적 기능은 서로 교차하는 특징은 있지만, 거의 동시적으로 일러나는 현상이다. 그는 능동적인 것과 피동적인 것의 교차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숨을 쉬는 경험은 흡입과 배출의 리듬을 가진다. 흡입과 배출의 연속은 잠시 중단되면서 한편은 멈추고 다른 한편은 새로 시작할 준비를 하는 시간의 간격을 둠으로써 리듬을 만든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의식적 경험의 과정을 새가 날았다 앉았다 하는 것을 번갈아 하는 것에 곧잘 비유하였다. 나는 것과 앉는 것은 서로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렇게 수 없이 날고 앉고 하지만 어느 것도 서로 아무런 관련 없이 번갈아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경험에서 휴식처는 있지만 어느 것이나 이전의 행위 결과를 흡수하고 안착시키는 피동적인 수용과정이 마련한 것이며, 아주 변덕스럽거나 매우 단조로운 것이 아니라면, 능동적인 움직임은 그 자체 속에 이미 잘 정제되고 잘 간수되어 온 유의미한 것들을 지니고 있다.2)

2) 이돈희, 「존 듀이 교육론」, p. 103. 

그러나 이러한 능동적-피동적 상호작용은 단순히 한 가닥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우리의 수많은 경험들 중에는 상대적으로 단순한 것들과 복잡한 것들이 있고, 순간적으로 끝나는 것들도 있지만 오랜 시간 동안 끌고 가는 것도 있으며, 오래 진행되는 중이지만 일시적으로 유보된(포기하거나 종결한 것이 아닌) 것도 있다.

토론에 종사하는 동안에 상대방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면서 논박할 준비를 해야 하고, 야구에서 투수는 포수에게 공을 던져야 하지만 주자를 견제하기도 하고, 엄마는 아기를 등에 업고 요리를 하며, 부장 간부는 부하 직원의 보고를 받기도 하지만 상사의 결재를 받기 위한 준비를 한다. 말하자면 경험을 만드는 상호작용은 단선적이라기보다는 복합적이다.

내가 어떤 사람의 소개를 받는다든가 상점에서 물건 값을 흥정하는 일은 간단한 경험이지만, 외국에 여행을 한다는 것은 다소 긴 시간을 요하고 복잡한 준비와 절차를 포함하고 있으며 일정의 도중에 크고 작은 여러 일시적 경험들이 포함될 수 있다. 대학을 졸업하거나 학위논문을 쓰거나 병역의무를 완수하는 경험은 매우 오랜 기간 진행되는 것으로서 수없이 많은 경험의 요소들을 포괄하는 것이다.

경험의 수준은 ‘상황’에 따라 설정

경험의 크고 작고, 단순하고 복잡하고는 어느 수준 혹은 차원에서 상호작용할 상황이 설정되느냐에 달려 있다.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상대의 장은 환경이지만 맥락에 따라서는 ‘상황’(Situation)의 개념으로 표현된다. 우리가 “상황 판단을 잘 한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듀이의 개념을 상당히 비슷하게 나타내는 것으로 들린다. 상황의 개념은 사람이 상호작용하는 대상인 환경의 의미를 명료하게 규정하며, 그 과정에서 질성의 개념이 지니는 의미론적 역할을 더욱 확실하게 밝힐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간혹 듀이를 검토하거나 비판하는 철학자들 중에는 바로 이 ‘상황’의 개념이 지니는 모호성에 대하여 불만스러움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의 개념은 듀이의 경험, 사고, 의미, 가치 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설명적 요소가 된다.

내가 어떤 물리적-사회적 환경 속에 있을 때, 내가 위치해 있는 주변의 모든 것이 내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세계이며 또한 환경이지만, 현재 내게 유의미한 것은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혹은 내가 하고 있는 신체적-심리적 행위 혹은 활동에 관련한 것에 한정되고 그것만이 내가 지금 의식하고 있는 대상이다. 추구하는 목적과 수단에 관련되지 않는 그 밖의 것은 내가 처한 상황의 개념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그 상황은 나의 의식적 관심의 내용을 뜻하는 것이고, 순간순간마다 무엇을 의식적 관심에 두느냐에 따라서 실제 직접적 상황의 내용은 달라진다.

‘상황’을 단편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즉, 내가 환경 혹은 상황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거의 망각 상태에 있는 나의 깊은 습관이나 의식이 구체적으로 작용하지 않지만 가끔 무의식적인 본능적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다. 나의 행위가 결과적으로 환경에 대응하는 방식에 영향을 줄 수가 있다면, 이런 요소들도 경험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냐의 질문이다.

물론 평소에 별로 의식하지 못하는 습관이 앞서 우리가 논의한 ‘하나의 완성적 경험’에서 주도적인 기능을 하거나 그 핵심을 이루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 때로는 단순하고 사소한 것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매우 심각하고 결정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상황의 개념을 매우 애매하게 만든다. 비록 나의 습관 혹은 나의 무의식적 행동이라고 하더라도 나의 의식의 내용이 아니므로, 나의 의식이 반응하게 될 상황의 요소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습관이란 엄격히 말하면 나의 심리적-신체적 전체에 어떤 모양으로 기억된

행동, 사고, 혹은 감정을 의미한다. 그것은 나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안에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유기체적 구성요소이지 객관적인 환경적 상황에 있는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상황을 정의할 때 고려해야 할 것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해야 할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비록 경험은 인간 유기체와 환경의 사이에 상호작용하는 관계의 개념으로 이해되지만, 환경을 상황의 개념으로 동일시할 경우에 경험의 주체와 객체가 물리적으로 구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황은 객관적으로 주어진 객체라기보다는 경험의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주체의 주도로 설정된 것이다. 경험 주체의 문제나 관심이나 의지가 없으면 상황은 그 자체로서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상황은 경험의 주체가 구체적으로나 추상적으로 설정한 의식의 내용이다.

둘째로, 습관은 비록 경험의 주체인 나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원천적인 속성은 아니다. 그러므로 자아의 구성적 요소에 속하기도 하다가 제외되기도 하는 애매한 속성이다. 습관은 본래의 속성이 탈바꿈한 것이고 상황의 구성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상황의 밖에 있기도 하고 안에 있기도 하지만 본래 열외의 존재가 아니다.3)

3) Dewey, Brief Studies in Realism: Epistemological Realism: the Alleged Ubiquity of the Knowledge Relation, in: Jo Ann Boydston (ed.) John Dewey, The Middle Works: 1988-1924 Vol. 6 (Carbondale, IL: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1978(1911), p. 120

내가 식후에 아이스크림을 즐기는 습관이 있다고 하자. 이 습관은 그 자체로 홀로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래 내 몸이 잘 받는 것이고, 가족과 함께 즐기게 된 것이며, 음식 자체의 달콤한 속성이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그 습관을 낳는 상황을 구성한 것이다.

셋째로, 경험 주체의 영역과 상황의 영역의 분리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서로 교차해서 작용하는 요소들이 상황을 구성하는 것이므로 습관은 빠지고, 정서는 남아 있고, 행동은 진행하고 하는 현상이 아니라. 서로 교차적 관계를 유지하는 상호작용의 장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상황은 구성요소들을 하나의 통일체로 관련시키고 지배하는 편재적 질성이 성립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냥 우리가 지각하는 대상의 요소들 그대로가 상황은 아니다. 교향악에는 많은 악기들의 소리가 연주되듯이 하나의 상황 속에 온갖 요소들이 존재하지만 이것들은 그 자체로서 상황인 것은 아니다. 상황 밖의 온갖 것들과 구별하고 상황 안에 있는 요소들을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서 지각할 수 있게 하는 질성, 즉 ‘편재적 질성’(Pervasive Quality)이 그 상황을 성립시킨다. 그 질성, 즉 편재적 질성에 이름을 붙여 ‘교향곡’, ‘협주곡’ 등으로 불리기도 하고 그냥 그 자체가 상징적 특징을 지니도록 둘 수도 있다. 이름을 붙이면 서술되는 것이므로 서술적인 경험의 단초가 된다.

완성적 경험, 이론과 정서적 내용이 함께 포함돼야 가능

이론적(혹은 서술적) 사고도 하나의 완성적 경험을 결성할 수 있고 또한 그 자체의 심미적 특징(질성)을 지닌다. 그것은 보통 우리가 심미적이라고 말하는 경험과는 다소 다르지만 단지 그 경험의 내용(재료)에 있어서 다를 뿐이다.

순수예술의 재료는 질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과학의 경우와 같이 이론적 결론으로 이루어진 경험의 내용은 기호 혹은 상징(언어)으로 표현된다. 기호 혹은 상징에도 그 자체의 본질적인 질성은 있어도 별로 의미가 없지만, 다른 경험에서 질성으로 작용하는 내용을 담는 그릇과 같은 도구적 기능을 한다.

그 차이는 대단히 크다. 컴퓨터에서 사용하는 고도의 이론적인 기호 혹은 상징의 체제는 복잡한 질성들을 담은 기술적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훨씬 덜 복잡한 질성을 담고 있는 음악이나 미술의 작품처럼 쉽게 대중화될 수가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 그 자체는 이론적(서술적)이든 예술적이든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움직임을 통하여

내적인 통합과 완성에 도달하기 때문에 만족감을 주는 정서적 특징을 지닌다.

며칠 동안 밤낮을 설치면서 고도의 추상적 문제를 해결한 수학자나 물리학자의 희열과 같이 이러한 기예적(Artistic) 과정에서 정서는 직접적으로 감지된다. 아마도 어려운 계산 혹은 증명을 요하는 수학문제를 푼 학생은 하나의 예술적 작품을 완성한 것과 같은 경험을 하였다. 그런 한에서 그것은 심미적이다.

과학자가 어떤 기발한 창조적 발상 끝에 설정한 가설이 검증되기만 하면, 세계를 지배하듯 한 환희에 빠질 기분이 들 것이다. 이러한 정서적 특징을 지닌 질성은 이론적 탐구를 수행하고 그것이 성공적인 것이 되게 하는 중요한 동기가 된다.

뿐만 아니라, 어떠한 이론적 활동도, 강하고 약하고 간에, 이러한 정서적 내용을 실은 질성과 더불어 마무리되지 않는다면 그 과학적 과제를 ‘하나의 완성된 경험’으로 종결(수행)하였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요컨대, 이지적 경험도 그 자체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심미적 특징을 지닐 수밖에 없고, 그 때문에 우리는 심미적인 것을 이지적인 경험과 분명하게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폴라니(Michael Polanyi)가 “암묵적 지식”이라고 한 부분도 이와 일관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4)

4) Michael Polanyi, The Tacit Dimension (Garden City, New York: Doubleday and Company, 1967), pp. 3 ~ 25.

나는 과학자가 확실성이 매우 높은 가설 혹은 이론을 개발하고 주장할 때 그가 소유하고 있는 성향에는 언어로서 표현할 수 있는 명제와 그 명제를 정당화하는 인지적 능력 이상의 것이 있음을 언급한 적이 있다.5)

5) 이돈희, “교육적 경험의 성격과 구조,” 「학술원논문집」 인문.사회과학편 제48집 1호, (2009) : 1-36.

(과학자의) 마음속에는 그가 발표한 이론 속에 담지 못한 수많은 종류의 사고와 감정이 남아 있으며, 그가 입증해 보이는 과정에서 나타나지 않은 방법적 요인들이 그의 인격적 구조 속에 담겨있다. 과학적 생애에 대한 가치관과 과학에 대한 개인적 신념과 문제의식도 엄격히 보면 인지적 수준 이상의 것이다.

발표된 이론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발휘된 희열과 고뇌와 열정 그리고 크고 작은 솜씨, 기지, 영감, 요령 등도 이면에서 작용해 왔다. 이러한 심층적 수준의 것은 그 과학자의 인격 속에 내축해 있는 능력, 태도, 신념, 성향의 어떤 체제이다. 이러한 특징은 기술과 요령을 사용하는 방법적 지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베토벤의 ‘월광곡’을 연주할 때, 그 연주자가 동원하는 자신의 기술적 능력은 건반 위에 움직이는 손의 습관적 동작과 그 동작을 다스리는 심리적 통제, 그것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원천적이고 인격화된 능력, 태도, 신념, 성향의 요소들이 동원되고 있다.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지준호 기자  casaji97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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