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적 경험의 상황적 조건①

교육계와 교육학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학계에서도 존 듀이(John Dewey)는 누구에게나 이미 잘 알려진 이름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알려진 만큼 그의 이론이 잘 이해되고 소개되어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의 사상은 ‘실용주의’, ‘실험주의’, ‘진보주의 교육’, ‘새교육’이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어 왔고, 우리의 교육계와 교육학계는 그를 현대적 교육사상의 근원인양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교육계에서 심도 있게 평가된 수준은 아니었다. 에듀인뉴스는 정치와 교육의 이념적 갈등이 극심하고 특히 자유주의적 전통과 강령적 기조에 대한 이해의 혼란이 심각한 수준에 있는 이 때, 존듀이의 실험주의적 자유주의와 이에 관련한 교육사상을 검토해 보는 ‘왜, 지금 존 듀이를 읽어야 하나’를 연재한다.

학교 상황으로 보는 '교육적 경험'

지금까지 우리가 고찰한 바는, 하나의 (완성된)경험이라는 것과 심미적 경험이라는 것이 지니는 공통성 그리고 무엇인가를 강조함으로써 드러나는 특이성에 관한 것이었다. 즉 하나의 경험은 심미적 특징(질성)을 지닌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없으면 그 경험의 내용을 이루는 소재들은 하나의 잘 정합된 경험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통일성이 없고 산만한 것이어서 ‘하나의 경험’으로 식별할 수 없는 어지러운 상태에 있는 경험들은 예술적으로나 교육적으로 별로 의미가 없다. 심미적 경험은 일상적 경험에 속하는 것이지만, 예술과 교육의 중요한 공통성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의도적 노력에 속한다는 것이다.

교육은 산만하고 어지러운 활동과 경험을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차원 혹은 어느 수준의 것이든지 간에 교육적 경험은 잘 통합되고 하나의 통일성을 지닌 것이기를 요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심미적 경험의 특징 그대로를 지닌 것이다.

다시 되풀이해서 우리는 경험의 개념을 인간 생명체가 물리적-사회적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과정 혹은 결과로 요약해 왔다. 그러나 특히 교육적 의미를 지닌 심미적 경험의 경우에, 환경의 의미는 인간 생명체가 처한 실질적 ‘상황’에 상응하는 것이고, 상황은 그것을 특징적으로 지배하는 편재적 질성으로 인하여 경험의 주체에게 다가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교육적 경험의 장을 제공한다는 것은 학습자가 상호작용하는 관계에 있을 상황을 마련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 특히 학교를 비롯한 제도적 교육은 학습의 경험이 가능하도록 하는 데

어떤 상황을 제공하는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교육적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상황은 적어도 성장의 삶을 사는 창조적 지력이 발휘되는 생활의 장이다. 그러한 생활의 장이 반드시 학교라는 제도적 조직이 제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여기서 학습과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잡다한 기회를 언급하거나 관심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 다만 사회적 과업으로 실천되는 제도적 교육인 학교의 상황을 중심으로 검토할 수밖에 없다.

교실의 다양한 문화와 학습자의 경험

학습자의 교육적 경험을 위한 상황으로서 가장 전형적인 것은 교실의 상황(혹은 수업의 상황)이다. 교실이라는 물리적 공간은 교사가 지식을 전달한다든가 학습자들 사이에 관찰이나 토론을 시도해 보게 한다든가 어떤 주제로 개인별 프로젝트를 수행하도록 하는 등의 활동이 가능한 상황을 만들고 그것을 운영한다. 그 상황에는 교사도 있고 또래들이 함께 하고 학습을 위한 시설이 주어진다. 뿐만 아니라 교사가 인간관계를 맺는 특징적 스타일도 있고, 독특하게 발휘하는 지도력도 있으며, 동료 학생들이 함께 형성하는 분위기도 있다.

그리고 제도적 조건이 함께 한다. 즉 신입반이거나 졸업반이거나 남녀 공학이거나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의 자녀이거나 도시의 학교이거나 공립학교이거나 전통이 오랜 학교이거나 특정한 시기에 반영되어야 하는 교육정책이 영향을 주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교실의 상황에는 교육과 학습의 문화가 있다. 이러한 문화는 학습자가 직접 경험하는 독특한 질성적 풍토를 형성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교사가 어떤 주제나 소재를 중심으로 하여 수업을 진행하면 학습을 위한 기본적인 상황이 조성될 수 있다. 그러나 집단적으로나 개별적으로 학습자가 실질적으로 주어진 상황과 상호작용하는 경험적 양상은 수없이 다양하게 발생한다.

교실의 학습활동이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학습자의 동기나 관심의 여하에 따라서 학급의 구성원들은 어느 수준까지 거의 비슷한 공통적 내용을 담은 학습경험을 할 수 있다. 학습자들은 일단 주어진 상황으로부터 공통된 영향(자극)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습자 개개인의 구체적 경험은 환경(상황)과의 상호작용(혹은 교변작용)을 통하여 형성되고 발전하고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개별적으로는 천차만별의 다양한 심리적-사회적 특징을 별도로 경험했을 수도 있다. 그것은 학습자에 따라서 각기 실질적인 상황이 다르다는 의미이다.

학습자의 완성적 경험을 위한 교실 상황의 4가지 필수 조건

그러면 이러한 교실상황이 학습자의 교육적 경험의 장으로서 제공할 수 있는 상황적 기여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달리 표현해서 교실의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학습자의 완성적 경험은 어떤 특징을 가질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가?

나는 적어도 다음의 네 가지 상황적 조건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1) 질성적 즉시성 (2) 성장의 계속성 (3) 경험의 사회성 (4) 전인적 지향성 등이다.

(1) 질성적 즉시성 : 교실은 학습자의 물리적 공간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문화적 공간이다. 학습의 분위기를 포함한 물리적-문화적 공간의 특성과 의미는 학습자의 각각에 교실이라는 상황의 독특한 편재적 질성을 제공한다.

교실에는 반드시 교사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사가 있는 교실과 없는 교실은 그 상황의 의미에 있어서 다를 수 있다. 단순한 물리적 차이만은 아니다. 교사는 적어도 학습자와 인격적 가치로서 상호작용하는 관계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서, 컴퓨터, 시청각 기기, 시뮬레이션 장치 등의 물리적 장비와 프로그램만 설치되어 있는 경우와는 크게 다르다. 교사와 더불어 만든 상황의 편재적 질성은 그 교실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하고 유일한 학습의 장을 만들고, 또한 거기서 학습자는 어떤 이론적 분석이나 전달되는 정보의 도움이 있기 전에 이미 그 교실과 상호작용하는 관계가 시작되어 있다.

교사의 역할과 학습자의 동기 여하에 따라서 크고 작은 경험들이 형성되고, 성공적인 학습이 되자면 교사와 함께 하는 시간마다 적어도 완성적인 학습의 경험이 이루어져야 한다. 순간 마다 혹은 어느 특정한 시점에서는 어지럽고 흐트러진 경험이 아니라 통일되고 응집된 완전한 경험이 만들어진다. 모든 학습자가 동시에 학습하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각자는 동일한 학습의 경험을 완성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는 자신의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완성적인 (하나의) 경험'을 이루었을 때에야 비로소 교육적인 학습이 성공한 것이다.

성공적인 학습의 경험은 학습자의 동기와 교사의 지도력에 달려 있지만, 아마도 일차적인 책무는 교사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실이라는 학습경험의 상황을 조성하고 운영하는 책무에는 학습자에게서 동기를 유발하는 것까지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실안 교사의 중요성

교사가 학습의 상황을 제공하는 책무는 도덕적으로 준엄한 것이다.

후크(Sidney Hook)가 '한 학생의 생애를 파멸시키는 데는 오직 한 사람의 교사이면 족하다'고

한 말이 결코 과장된 표현은 아닌 것 같다.

반드시 교육자답지 않게 사악한 인성을 가진 교사도 있다는 말이 아니다. 흔히 말하듯 실력 있고 말로써나 행동으로써 뛰어나서 설득력이 매우 대단한 교사도 가끔 이 범주에 속할 수가 있다. 실력이나 인기로써 뛰어난 교사는 자신의 특유한 스타일로써 학습의 상황을 주도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뛰어난 언어적 구사력을 지닌 교사는 학생이 경험할 학습의 상황을 매우 단조롭게 만들 수도 있다. 지식이나 정보를 주입하는 것으로써 학습의 상황을 제공하는 임무를 끝내버릴 수가 있다. 또한 어떤 교사는 학습자들이 지닌 잠재력과 경험구조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흥미위주의 혹은 교사위주의 일방적 학습장을 구축하고 그것으로써 학습의 성공을 장담하고자 할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학습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데 뛰어난 경영적 자질을 가진 교사도 유사한 위험요소를 가지고 있다. 학습자가 잘 짜인 수업계획과 흥미 있는 운영에 일시적으로 매몰되면 당시로는 한편의 재미있는 영화를 관람하거나 게임을 즐기는 것처럼, 학습자 개개인의 성장에 별로 기여하지 못하는 흥미위주의 경험에 빠질 수도 있다. 이러한 흥미위주의 학습활동은 불온한 사상이나 허위의 선전을 하는데 있어서 직설적으로 시도하는 주입식의 경우보다 훨씬 더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

흔히 교실 수업의 방법으로 권장하는 토론중심의 수업도 마찬가지이다. 단순한 전달식 수업은 잘 조직된 지식을 전달할 수 있지만 토론의 경우만큼 강력한 자발적 관심을 유도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옛 소련의 청년공산당(Comsomol)의 구성원들은 토론과 반성과 선서 등의 집단적 과정을 통하여 매우 경직된 사상으로 무장케 하였듯이, 강력한 동지적 결속의 의지는 토론의 과정을 통하여 내면화된 신념과 사상으로 더욱 철저하게 학습자의 인격 속에 침투할 수 있다.

아동의 흥미를 존중하는 '새교육 운동'

민주주의 교육은 교사의 기술적 효율성보다 학습자의 성장에 얼마나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 오느냐에 달려 있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루소(Jean J. Rousseau) 이후의 자연주의적 교육론에서 아동중심교육을 주장해 왔고, 그것이 민주적 교육의 전형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교사중심에서 아동중심으로 전환한다면 당시로서는 흔히 그렇게 했듯이 교육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동중심교육은 19세기 유럽의 자연주의적 낭만주의자들과 20세기 초기의 미국 진보주의자들이 새로운 개념으로 중요하게 사용하던 개념이다.

해방 후에 미국 교육사절단의 활동으로 우리나라에 새교육 운동이 전개될 당시에 가장 중요한 개념은 '아동의 흥미'를 존중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흥미'라는 말이 영어의 'Interest'의 번역어로 사용된 것이라면 약간의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번역은 아동중심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과 혼란을 야기한 것이 사실이다. 새교육의 주요개념은 학습의 장에 아이들이 흥미 있게 참여하도록 만들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로는, 교육관련 외서에서 'Iinterest'라는 말은 자주 볼 수 있지만, 교육적 맥락에서는 '흥미'라기 보다는 문맥에 따라서는 '관심'의 의미로 보면 오히려 적절한 번역이 된다.

'Interesting'이라는 말도 '흥미 있는' 혹은 '재미 있는'이라는 번역보다는

'관심을 끄는'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듀이는 '흥미'를 어떻게 설명하나

물론 우리말의 '무엇에 흥미가 있다'고 하면 '무엇에 관심이 있다'는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흥미 있는'이라고 하면 그냥 '재미 있는', '즐기는', '신나는' 등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고 학습자의 진지한 호기심을 집중하는 가치 집중적 성향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말하자면, 아동중심교육은 흥미중심의 교육이라기보다는 '아동의 관심거리를 중심으로 하는', 혹은 '아동의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교육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듀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어원상으로 볼 때 'Interest'(관심)라는 말은 서로 거리를 두고 있는 두 가지를 중간에서 연결하는 위치에 있음을 뜻한다. 교육의 경우에는 그 거리를 시간적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성숙한 단계에 이르려면 그 과정에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은 매우 분명하다... 우리는 흔히 성장하는 과정에는 출발하는 시점과 완성하는 시기의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 보통이다. 실제로 그 사이에는 장애 요인이 존재한다. 학습의 경우를 두고 보면, 학생이 현재 지니고 있는 성장력은 출발단계의 것이라면 교사의 목표는 멀리 끝 지점에 놓여있다. 그 둘 사이의 중간에 있다면, 그 위치에 도달하여 유지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여러 가지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을 수도 있으며, 필요한 장비나 교구들을 조달하고 활용해야 한다. 출발점에서 시작한 활동들은 시간이 흘러서야 만족스러운 완성의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관심'으로 말하면 바로 이러한 중간적 위치에 해당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라는 바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나아가는 활동은 바로 그 중간적 상태가 좌우하기 때문이다. 중간에 위치해 있으려면, 현재의 추세에 이르기까지 여러 수단의 작용이 있었고, 행위의 당사자와 목적의 중간에 위치해 있으며, 그리고 관심 그 자체를 유지하는 상태에 있다. 이 세 가지는 같은 현상의 다른 이름일 따름이다. 실질적으로 관심거리가 된다는 것은, 성장하려는 힘이 현재로서는 아직 목적하는 바에 도달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미 연결된 상태라면 아직 그런 줄을 모르고 있는 셈이다.

듀이와 유사하게 혹킹(William E. Hocking)도 “어려움이 없는 상태에서는 어떤 관심(혹은 흥미)도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고 지적하였다. 역경이 있고 좌절이 있으며 난관이 닥친 상태에 임하는 경험을 하지 않고는 주어진 과업을 감당하고 목적하는 바를 실현하고자 하는 지속가능한 의지력을 활성화하는 데 결정적 계기를 만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듀이와 혹킹은 모두 학습자의 흥미진진한 상태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과제를 수행하고 목적을 실현하는 일에 대한 진지한 집념과 의지를 언급하고 있다. 교사가 학습을 위한 상황을 마련하는 일에서 덧없이 흘러가는 '흥미로움'과 '즐거움'을 충족시키기만 하는 것은 학습자의 계속적 성장을 위한 정책으로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