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적 경험의 상황적 조건②

교육계와 교육학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학계에서도 존 듀이(John Dewey)는 누구에게나 이미 잘 알려진 이름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알려진 만큼 그의 이론이 잘 이해되고 소개되어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의 사상은 ‘실용주의’, ‘실험주의’, ‘진보주의 교육’, ‘새교육’이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어 왔고, 우리의 교육계와 교육학계는 그를 현대적 교육사상의 근원인양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교육계에서 심도 있게 평가된 수준은 아니었다. 에듀인뉴스는 정치와 교육의 이념적 갈등이 극심하고 특히 자유주의적 전통과 강령적 기조에 대한 이해의 혼란이 심각한 수준에 있는 이 때, 존듀이의 실험주의적 자유주의와 이에 관련한 교육사상을 검토해 보는 ‘왜, 지금 존 듀이를 읽어야 하나’를 연재한다.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경험'과 인격체로의 '성장' 그리고 '교사'

적어도 제도적 교육은 학습자로 하여금 자신의 경험구조를 계속 재구성하면서 성장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의미의 성장은 경험적 요소들이 서로 어울려 통일성을 지니되 새로운 가치를 지향하면서 더욱더 풍요롭고 균형 잡힌 역동성을 유지해 가는 삶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경험구조의 통일성은 적어도 한 인격체를 특징짓는 일관된 특징을 의미하고, 역동성은 환경적 요소들의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을 뜻한다.

물론 한 개체가 지닌 경험의 요소 중에는 통일성의 중심부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부에도 제대로 기식하지 못하는 것들이 수없이 있다. 실로 우리는 일상적으로 자신의 습관과 감정과 행동에서 부족함을 말하고 뉘우치고 후회하는 존재로 살고 있다. 있어야 할 것이 없고 없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개체들은 도덕적으로, 이지적으로, 정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완전한 인격체로 존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어떻든 한 인격체가 조화와 균형을 상대적으로 잘 유지하는 존재라면 그것은 좋은 경험적 요소들을 제대로 통합한 자신의 성취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인격체로서 성장하도록 돕는 전문적 관리자가 교사이다. 교사의 전문성은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학습의 환경, 더욱 직접적으로는 경험의 재구성을 위한 학습의 상황을 관리하는 데 전문적 능력과 도덕성을 발휘하는 데 있다.

그만큼 교사가 하는 일은 사실상 예술가가 작품을 생산하는 활동과 유사한 과업을 수행하는 셈이다.

듀이는 예술의 특징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예술은 경험을 하나의 통일된 경험으로 되게 하는 능동적 행위와 피동적 행위, 그리고 방출의 에너지와 흡수의 에너지 관계를 그 형태 속에서 통합한다.

능동적 행위와 피동적 행위의 요소들을 서로 통합하여 조직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모두 제거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요소들이 서로 침투하여 융합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질성들을 선택하기 때문에, 그 결과적 산물은 하나의 심미적인 예술의 작품이 된다.

우리는 깎아내고, 조각하며, 노래하고, 춤추며, 몸짓하고, 본뜨며, 그리고 칠하는 등의 일을 한다. 무엇을 행하거나 만드는 것이 예술적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그 결과를 보고서 그것은 제작의 과정에 있었던 질성들을 통제한 결과로 생산된 그런 것이라고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 예술가는 그가 작업하는 동안 스스로 그 작품을 감상할 사람으로서의 태도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1)

1) Dewey, Art as Experience. 이돈희, '존 듀이 교육론'. pp. 93~94.

예술에는 제작하는 편의 능동적인 기예적 활동이 있고 감상하는 편의 피동적인 심미적 활동이 있다. 교사는 기예적 활동의 편에 있고 사회는 심미적 활동의 편에 있는 셈이다. 한쪽은 생산자의 입장이고 다른 쪽은 소비자의 입장이기도 하다.

교사는 학습자를 자신의 가치관에만 충실한 경험의 소유자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한 작품이 진정으로 기예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또한 심미적이어야만 한다.

예술의 생산자는 보고서 즐겨 수용할 수 있는 것이 되도록 만들어야 하듯이, 교사의 전문성이 진정으로 교육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의 교육관과 가치관에 비추어 수용과 공유를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 말은 반드시 왜곡된 사회적 판단의 기준에도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충분히 사회적 수용 혹은 동의가 가능한 설득력을 지닌다는 말이다.

또한 예술가의 보는 눈이 본질적으로 심미적이지 못하면 그의 작품은 혼란스럽고 저질인 것으로 생산할 수 있듯이, 교사의 교육관과 판단의 기준이 일관성을 지니지 못하거나 혼란스러우면 학습자는 일관성과 통합성을 지닌 성장을 기할 수가 없다.

'후견자'에게 필요한 자질

성장의 단계에 있는 학습자들에 대하여 후견자적 위치에 있는 가정과 기성세대는 제대로 경험형성의 과정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예술의 감상자와 같이 자신의 경험을 창조하여야 한다. 여기서 후견자란 양육의 일차적 책임을 진 부모와 가정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성장하면서 사회적 구성원으로 수용하고 사회 자체의 경험적 재구성에 동참할 성장세대에 대하여 직접 혹은 간접으로 책무성을 지닌 공동체의 기성세대 모두를 말한다.

그들은 전문가와 마찬가지로 세세한 부분의 관찰은 아니더라도 교사가 의도적으로 진행하는

학습과 경험에 대하여, 그리고 성장의 과정 그 자체에 어떤 질서를 변별하는 안목을 가질 필요가 있다.

서로의 교육관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형성하지 못하면 교육은 불필요한 갈등상황에 시달리거나 교육을 방치하는 결과에 이른다.

교육의 전문가가 자신의 몫으로 할 일이 있는 것처럼 후견자도 자신의 몫으로 할 일이 있다. 이러한 일을 하는 데 나태하거나 관습에만 매인 후견 측은 교육의 과정과 결과를 관습적인 기준 그대로 받아들이고 학습자들의 성장과는 무관한 혼란스러운 상태에 방치할 수밖에 없게 된다.

'교육'과 '성장' 그리고 '인간'

교육은 인간의 성장에 관한 활동이다. 인간의 성장을 말하면 우리는 쉽게 신체적 성장만을 생각하지만, '성장'이라는 말은 인간의 여러 가지 특성에 적용된다. 지식, 기술, 판단력, 의지력 등의 능력에도 적용되고, 한 인간을 전체적으로 특징짓는 개성 혹은 인격에도 적용되며, 개체의 유지와 변화에 관계되는 신념, 욕구, 정서, 감정, 기질, 안목 등의 성품에도 적용된다.

그리고 성장은 증진 혹은 증대 등의 양적 개념으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안정, 순화, 균형, 세련, 조화, 통합 등의 질적 개념으로도 이해된다. 인간은 성장의 욕구를 지니고 있으며, 성장의 욕구가 쇠잔되지 않은 한에서는 언제나 교육이 필요하다.

교육에 의한 인간의 성장을 설명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로 있을 수 있다. 지식의 획득, 경험의 성장, 혹은 행동의 변화 등으로도 설명되지만, 적어도 인성교육과 관련하여 이해하고자 할 때는, 습관의 개념이 다른 어느 경우보다도 교육적 성장에 대하여 더욱 포괄적인 설명력을 지닌다. 왜냐하면, 한 개인의 교육적 성장은 자체가 지닌 수많은 습관이 하나로 통합되고 융합된 체제로서 독특하게 계속된 변화를 이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독특성에 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맥락에 따라서 그 개인의 '개성', '인격', '인성' 등으로 표현한다. 대체로 이러한 말들은 한 개인을 다른 개인으로부터 구별되게 하는 특징을 언급하는 것이다.

'인성'의 두 가지 의미

특히 '인성'이라는 말은 대체로 두 가지의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 가지는 '도덕적'개념으로 사용된다. 즉, '인성'은 '인격'의 경우와 같이 다소 도덕성의 개념을 내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인성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은 도덕적으로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인성의 개념은 인격의 개념보다 도덕적 의미에 있어서 다소 느슨한 편이다. '인성교육'은 한 사회의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나 인간관계의 규칙에 비추어 '호의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교육하고자 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인성'은 대체로 말해서 도덕적으로 '바람직하다' 혹은 '좋다'는 평가를 할 수 있는 인간의 특성에 관해서 언급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이때의 평가에는 타고난 성품이나 우연으로 형성된 특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격'의 개념은 다소 다르다.

인성의 개념은 천성적인 것까지를 내포하는 것이지만,

인격의 개념은 자신의 천성을 스스로 다스리면서 그 노력으로 성취한 바를 평가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훌륭한 인격자'라고 할 때, 그 표현은 타고난 좋은 성품의 소유자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사람의 노력, 예를 들어 수양이나 극기나 단련으로 성취한 바를 더욱 칭찬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물론 인성교육이 인격의 개념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선악을 분별하고 선을 실천하는 사람임을 요구하는, 즉 인격의 개념에서 철저하게 요구되는 바를 다소 느슨하게 겨냥한다.

다른 한 가지는 인성의 개념이 '도덕외적' 의미, 즉 도덕적 가치의 반영을 반드시 요구하지 않는 개념으로도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의 인성교육은 개체가 자신의 정체성(正體性)을 바로 세운 인간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으로 '인격'의 개념보다 '개성'의 개념에 더욱 충실한 편이다.

개성의 교육은 각자가 다른 개체와 구별되는 고유한 특징을 지닐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자아실현의 자질을 요구한다. 즉, 우선 지식을 획득하고, 사용하고, 가공하고, 창조하는 능력을 지니게 하고, 또한 감정과 정서의 순화, 관리, 세련을 기하는 자율적 통제력을 소유하게 하며, 나아가 당당한 사회적 관계의 세련된 기술, 태도, 의식을 구유함과 동시에 생존의 기본 조건인 건강한 심신의 유지와 증진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도덕적' 개념과 '도덕외적' 개념 포함하는 인성교육 필요

인성의 개념이 인격의 개념보다 도덕론적으로 느슨하게 여겨지는 것은 바로 천성적 요소까지를 포함하는 개성의 의미가 함께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인성교육을 말할 때, 대개는 도덕교육적 맥락에서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인성교육의 현실적 필요나 요구가 도덕적 위기감이나 불안감에서 연유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인성교육의 범주를 전인교육적 개념으로 그 외연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면, 우리는 위의 두 가지 이해방식을 외연적으로 분리하는 것보다는 두 측면을 상보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더욱 유의미한 것임이 틀림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말하는 인성교육은 아마도 젊은이들로 하여금 자아실현의 지속적 유지와 증진을 위하여

자신의 삶 자체를 스스로 관리하는 능력과 의지와 방법을 포괄하는 습관의 체제를 구축하고

그 성장을 도우는 사회적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