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행범 부산대학교 교수·행정학

김행범 부산대 교수·행정학

복지(welfare)에 대한 가장 직접적 뿌리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네 가지 자유 중 세 번째 자유, 곧 “궁핍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want)이다.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 사태는 총리·청와대·부처·경찰·검찰·국세청의 공권력 총출동으로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 강포함보다 더 절망스러운 장면은 유치원 학부모들이었다. 그들을 일부 언론은 ‘원장들에게 왜 내 아이 돌보지 않으냐고 항의하고 고소까지 준비했던 용기 있는 민중’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누리’든 뭐든 유아복지의 모든 프로그램은 본질상 남이 낸 돈으로 내 아이 키우겠다는 것이다.

남의 돈 45만원을 빼앗아 가면 분명한 강도짓이나, 정부가 법을 만든 후 그렇게 해 주면

국민은 하등의 범죄 의식 없이 그것을 ‘권리’(복지권)로 이해하고 당당히 요구한다. 

여기서 모든 게 출발한다. 지대추구(rent-seeking)는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이 도둑질(theft)을 가장 우아한 말로 분식한 것이다. 공동체가 서로 도덕적 수치감을 느끼지 않도록, 도둑질을 ‘자유’ 혹은 ‘권리’라고 불러주자는 합의가 복지다.

모두가 원하는 복지를 누릴 수 있는 자유. “궁핍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want)가 놀랍게도 ‘경제적 자유’를 표방했다는 점에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은 더 곤혹스러워한다. “경제적 자유 없이는 진정한 자유도 없다”는 자유주의의 본래 키워드가 경제적 자유란 “개인이 원하는 경제 조건을 국가를 통해 얻을 자유”라고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그게 자유인가?

아메리카식 키치(kitsch) 아니면 위대한 생활 미술의 대가로 알려진 노먼 락웰(Norman Lockwell)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를 화려하게 왜곡한 선봉이었다. 

노먼 락웰(Norman Lockwell)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1942

첨부한 그림은 그가 그린 "궁핍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누구나 꿈꾸는 기름지고 풍성한 음식을 먹을 자유. 그게 남에게 돈을, 국가의 공권력을 통해 강제로 받아 내어 만들어지면 자유가 아니라 강탈에 불과한 것. 그것은 희망이지 권리가 아니다.

당신 아이 보육의 일차적 책임은 국가도 자치단체도 아닌 그의 어미 아비인 당신에게 있는 것이다. 맞벌이를 위해 혹은 더 특별한 보호를 위해 제 돈을 더 들여 타인의 돌봄을 받고자 하면, 빈곤층이 아닌 한, 제 돈으로 함이 원칙이다. 

당신 대신 당신의 아이를 돌보라고 내게 고함치지 말라. 그 비용을 내게 내 놓으라 요구하지도 말라. 당신의 아이는 당신이 직접 혹은 당신의 비용으로 키워라.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남에게 그 비용을 요구하는 짓을 “보육을 받을 권리”라 강변하는 뻔뻔스러움을 가르쳐 주었다. 

이쯤 오면 어설픈 질문이 꼭 나온다. “국가가 최소한의 복지는 해 주어야지요”라는. 

그런데 어떤 복지 프로그램이든 그게 최소한의 조치를 넘은 시혜라고 표방해 출발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게 함정의 출발이다. 몇몇 한정된 치과치료에서 출발해 결국은 임플란트, 나아가 미학적 의료처치로까지 의료복지가 확대 됨은 역사가 증명한다.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국가에게 더 많은 복지, 즉 “남의 돈을 더 많이 요구할 권리”로 바뀌었다.

군중민주주의는 민중이 가진 타인 재산 탈취의 욕망을 교묘히 간지럼 태워주고 그들의 표를 얻은 포퓰리즘이란 점에서 루스벨트, 스탈린, 모택동, 아테네 말기의 중우정치 및 문재인정부의 복지정책은 동일하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이렇게 말했다. “당당히 주장하세요, 그건 여러분의 권리입니다.” 

군중을 현혹해 표(vote)를 먹는 자들은 대체로 일신의 정치 경쟁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그 책임이 문제되기 전에 얼른 저승으로 도주했다. 그 대가는 개인의 경제적 성취의욕의 하락 및, 더 중요한 결과인 윤리적 타락으로 인해 사회는 개인의 노력을 기울여 부(富)와 자기성취를 이룩하기보다 국가권력을 통해 남의 자원을 내게로 이전(transfer)하는 짓에 몰입하는 방향으로 모든 행동 패턴이 바뀌는 것이다. 

나중엔 소수만이 부의 창출에 종사하고 대부분은 그의 이전(transfer)에만 몰입한다.

정치의 주 기능은 이를 중개해 주는 것으로 변질된다.

패전, 역병, 기근으로 인한 망국은 돌이킬 수 있지만 지대추구

특히 복지 수혜 경쟁으로 인한 망국은 돌이키지 못한다. 

유아복지 다음은 노인복지, 청년복지, 장년복지, 여성복지, 장애인복지, 복지공무원을 위한 복지... 남의 돈으로 내 아이 키우고 내 이익 얻겠다는 야릇한 욕망을 언뜻 품었을 우리 모두가 실은 그 공범이었다.

당신 아이의 보육을 남의 돈으로 치르겠다는 당신의 근본 마음 때문에, 그걸 간파한 정치인들 때문에, 또 그 보육을 집행해주고 지원금을 이전 받겠다는 사람들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게 겸허히 감사할 일이 아니라 악을 쓰며 요구할 당당한 권리라 가르쳐준 루스벨트 때문에.

그리고 이 모든 악이 기막히게 착근할 수 있는 ‘나랏님이 나를 잘 살게 해주기 갈구하는’ 조선 민국의 정신 토양 때문에 서서히 죽어가는 나라. 우리는 최악의 대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것 때문에 먼저 질식사하는 중이다.

김행범 부산대 교수·행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