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에듀인뉴스] 교육계와 교육학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학계에서도 존 듀이(John Dewey)는 누구에게나 이미 잘 알려진 이름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알려진 만큼 그의 이론이 잘 이해되고 소개되어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의 사상은 ‘실용주의’, ‘실험주의’, ‘진보주의 교육’, ‘새교육’이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어 왔고, 우리의 교육계와 교육학계는 그를 현대적 교육사상의 근원인양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교육계에서 심도 있게 평가된 수준은 아니었다. 에듀인뉴스는 정치와 교육의 이념적 갈등이 극심하고 특히 자유주의적 전통과 강령적 기조에 대한 이해의 혼란이 심각한 수준에 있는 이 때, 존듀이의 실험주의적 자유주의와 이에 관련한 교육사상을 검토해 보는 ‘왜, 지금 존 듀이를 읽어야 하나’를 연재한다.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자연주의란 무엇인가

철학에서 자연주의는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존재와 거기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은 그 본질적인 특징이 어떻든 간에 오로지 자연적인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철학에 과학적 방법을 밀접히 관련시켜 논의하는 사고의 경향이다. 결과적으로 우주에 관한 모든 지식은 과학적 탐색의 범위 안에서 생산된다.

‘자연주의’라는 말은 현대철학에서 하나의 명확한 의미를 가진 용어로 사용되어 온 것은 아니다. 대체적으로 20세기의 초반기부터 미국의 프래그마티즘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사용된 말이다. 듀이를 비롯해 네이글(Earnest Nagel), 후크(Sidney Hook), 셀라스(Roy W. Sellars) 등이 스스로 자신들을 일컬어 자연주의자라고 하였다.

그들의 공통된 특징은 철학을 과학과 밀접히 관련시키고자 하고, 특히 존재론적 개념인 실재(實在)를 철저하게 자연의 개념으로 일치시킨다.

즉, 초자연적 실체들은 철학적 사고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인간의 정신’을 포함해 실재에 관한 모든 영역은 오로지 과학적 방법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자연’이라는 말은 의미의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의 맥락에 따라서 그 분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자연’(Nature)이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의 Natura이며, ‘본질적 특성’ 혹은 ‘본연의 성향’을 뜻하며, 고대에는 ‘생성’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라틴어 번역 이전의 그리스어의 어원은 Physis이고 물질적 세계를 뜻한다. 가장 넓은 의미로는 물질적(혹은 물리적) 세계의 전반을 의미하기도 하고, 물질적 세계의 현상을 언급하기도 하며, 또한 생명체의 전반을 포함하기도 한다.

과학의 대부분은 자연의 연구이다.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이지만, 인간의 활동은 흔히 다른 자연적 현상과는 분리된 범주에 다루어지기도 한다. 또한 ‘자연적’이라는 말은 ‘초자연적’, ‘인간적’, 때로는 ‘인위적’이라는 말의 반대말로써 대조를 이루기도 한다.

듀이(왼쪽)의 후기 사상은 헤겔의 사상에 대한 부분적인 수정이나 부정이라기보다는 실질적인 탈바꿈에 해당한다는 평가가 있다.

듀이의 자연주의와 헤겔의 사상

듀이가 스스로 자신의 이론을 일컬어 ‘자연주의’라고 밝힐 때, 질성 혹은 질성적 사고의 개념은 기본적 설명원리로서 사용한 ‘상황’의 개념과 더불어 이해될 수 있다. 하나의 상황은 다양한 요소로써 구성되는 것이지만, 그러한 요소들을 하나의 전체로서 감식할 수 있는 상황으로 되게 하는 것은 그것에 ‘편재하는 질성’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 질성으로써 우리는 어떤 상황에 관하여 생각하거나 다루거나 사용한다. 이러한 상황의 개념은 주로 탐구의 원리를 체계화한 듀이의 논리학에서 핵심적인 요소에 속한다.

럿설은 듀이가 사용한 상황의 개념을 원천적으로 헤겔사상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여러 비판적인 글에서도 자주 언급하였다.(B. Russell, ‘Dewey’s New Logic’, in The Philosophy of John Dewey. ed. by Paul A. Schilpp. New York: Tudor, 1939).

이러한 럿설의 언급에 대하여, 듀이는 1890년대의 말기에 이르러 헤겔의 사상, 특히 도식적(圖式的) 절대주의의 형식을 거부하였지만, 자신의 사고의 구조 속에 헤겔의 영향이 영원히 남아 있다고 하였다.

듀이의 후기 사상은 헤겔의 사상에 대한 부분적인 수정이나 부정이라기보다는 실질적인 탈바꿈에 해당한다는 평가가 있다. 다윈(C. Darwin), 제임스(W. James),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관한 여러 과학적 접근들의 영향이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헤겔의 사상에 담긴 유의미한 부분을 모두 ‘자연주의적 이론의 틀’로 전환시켜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도 듀이는 헤겔 사상이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한 독특한 요소가 있다고 하였다.(J. M. Dewey, ‘Biography of John Dewey’, 위의 책). 가장 중요한 특징은 강한 정서적 열망과 만족스런 지성적 내용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통일성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뉴잉글랜드 지방의 문화적 유산을 받아 성장하였기 때문에 분석하고 구분하는 생활과 행동에 익숙해 있어서, 자아를 세계로부터, 영혼을 육체로부터, 자연을 신으로부터 분리시켜, 고통스러운 억압을 가져다주고 내심으로 비통함을 경험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비해 헤겔은 주체와 객체, 물질과 정신,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통합함으로써 놀라운 해방을 경험하게 하고 자유를 누리게 하며, 인간의 문화와 제도, 그리고 예술을 대하는 방식에서 그 장벽을 헐어버리는 특별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듀이와 프래그마티즘 철학

프래그마티즘, 특히 듀이의 이론은 ‘이원론과 투쟁’으로 특징짓기도 한다. 자연주의, 그가 독특하게 사용하는 ‘문화적 자연주의’를 검토함으로써 자연의 개념과 이원론을 극복하는 방법을 분석해 볼 수 있다.

듀이가 말하는 자연의 개념은 매우 독특하다. 자연은 창조하고 생성하는 과정으로 그 특징을 지닌다. 다양한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가치론적 이론들은 흔히 여러 철학적 이론에서 볼 수 있는 이원론들과 같이 이분법적 구분으로 대립시키는 것보다는 기능적으로 서로 관련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서양철학에서 이원론은 존재론적, 인식론적, 가치론적 이론에서 수없이 많은 형태로 생산되어 왔다. 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프래그마티즘의 철학자들은 이분법적 사고의 특징을 지닌 문화적 습관이 이어져서 일방의 주장을 견지하면서 끝장을 보고자하는 풍토에서 온 것이라고 본다.

듀이는 정신과 물질의 존재론적 이원론, 실재와 표상의 인식론적 이원론, 가치와 사실의 가치론적 이원론 등도 서로 상반되는 이분법적 대립으로 보지를 않고 오히려 기능적 관계로 이해하고자 하였다.

자연이란 그냥 정태적(靜態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창조하면서 생성하는 동태적(動態的) 과정이라고 보고, 이원론적으로 대립된 것들을 연속성의 개념으로 해소하고자 한 것이다.

헤겔의 형식적 변증법과 경험론의 기계적 연상 이론 거부

‘절대주의에서 실험주의로’라는 자서전적 스타일의 논문에서, 듀이는 당시 뉴잉글랜드의 지역문화로 깊이 뿌리박혀 있는 이원론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철학적 탐색의 노력을 기술하였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그는 1884년에서 1903년에 이르는 약 20여 년 동안 헤겔의 관념주의에 심취해 있었지만, 당시에 스탠리 홀(G. Stanley Hall)을 비롯한 생리학적 심리학의 연구가 새로운 영역으로 떠오르는 것에도 관심을 두었다.

듀이의 초기 작품은 경험의 개념을 더욱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종합하려는 시도를 하였지만, 전통적인 경험론에는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하였다.

듀이는 1887년의 ‘심리학’에서 ‘심리학적 관념론’이라는 개념을 밝히고자 한 글에서 헤겔의 형식적 변증법과 경험론의 기계적 연상(Association)의 이론을 모두 거부해 버린다.

그는 거기서 우리의 여러 가지 사고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지적 능력만 아니라, 의지적인 것과 감정적인 것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의식이 함께 스며있다고 하였다. 1890년에는 제임스의 ‘심리학의 원리’를 읽고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더하였다. 제임스에 의하면, 경험은 본래 전체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몇 가지의 개념들로써 종합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