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초등교육박물관 전시 사진.(사진=한치원 기자)
영월초등교육박물관 전시 사진.(사진=한치원 기자)

[에듀인뉴스] 지금의 나의 모습, 결코 길지 않은 삶이지만 내가 오늘날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도와주신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선생님들이 계시다.

오늘은 들길을 밟듯이 꽃잎같이 진한 그리움으로 은사님들을 회상해 본다.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7남매가 시골에서 살아가기란 매우 힘이 들던 때였다. 지금과는 달리 유난히 말이 없고 내성적이어서 주위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지 않았던 학생이었지만 청소시간만큼은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선생님께서는 그런 모습이 기특했던지 나를 무척 사랑해 주셨고 선생님의 사랑과 정성에 감동해 ‘나도 커서 훌륭한 선생님이 되어야지’하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기도 했었다.

6학년 때 선생님은 점심시간에도 우리들과 함께 공을 차시며 늘 우리들과 함께 하셨다. 그러나 일단 그렇게 다정다감하셨던 선생님이 숙제나 일기장 검사를 할 때면 갑자기 호랑이 선생님이 되어서 우리들을 잔뜩 긴장시켰다. 국어 시간에는 무서운 귀신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슬리퍼로 교실 바닥을 '쾅'하고 굴러서 초긴장 상태로 만들었다.

지금 나도 교사가 되어서 그때 담임 선생님께 배운 귀신 이야기를 가끔 써먹어 보지만 우리들만큼 놀라지 않는 것 같아 담임선생님의 이야기 솜씨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나 보다. 운동장이나 교실에 쓰레기가 떨어져 있으면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주우셨고 청소시간이 되면 빗자루나 대걸레를 손수 들고 교실도 청소하셨다.

특히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면서 매일 친구들에게 바르고 고운 말을 쓰고 친구의 좋은 점을 발견해 칭찬해주라고 말씀하시면서 착한 일이나 올바른 행동을 하면 일기장에 칭찬편지도 써주셨다.

꿈만 같았던 6학년 생활이 지나고 중학교 입학 원서를 쓰는 날이 다가왔다. 당시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 나는 중학교에 갈 수 없었다. 졸업식 날, 우등상으로 사전이나 공책 같은 상품 대신 흰 봉투 한 장을 받았다. 봉투 속에는 빳빳한 천원 권 지폐 3장이 들어 있었다(당시에는 큰돈으로 기억됨).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나를 위한 특별한 배려였다. 그러나 나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무료로 운영되는 새마을 청소년 중학교를 다녔다.

학교는 집에서 한 시간 정도를 걸어서 산을 몇 개 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도 정식 중학교에 다니는 친구들 못지않게 교복을 입고 수업을 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었다. 담임선생님은 등산을 좋아하셔서 토요일만 되면 계룡산 자락에 있는 폭포며 암자로 우리들을 데리고 다니셨기에 유격훈련이라도 받는 느낌이었다.

“얘들아, 내일은 간편복 입고 오거라.”

선생님은 얼마나 체력이 좋은지 우리들이 들고 있는 가방 몇 개를 들어주셨고 뒤처지는 아이들은 등에 업고 한참을 가시기도 했다. 산 중턱에 오를 때쯤 보름달 빵에 환타로 한바탕 잔치판을 벌였다. 그것은 꿀맛 그 자체였다.

선생님의 배낭은 보물 보따리였다. 맛난 간식을 먹는 즐거움에 “선생님, 다음 주에도 산에 와 유?”라고 여쭤보면 “그래”하시며 빙긋이 웃으셨다. 산 중턱에서의 간식은 1절에 불과했다. 산 정상쯤에 오르면 손수 라면도 끓여주셨다.(당시에는 산에서 취사도 했었다.)

“우와, 너무 맛있어요.”

“후루룩 쩝쩝” 소리를 내며 국물까지 시원하게 먹어치웠다. 배고픈 시절, 빵과 라면은 가뭄에 단비와 같은 귀한 존재였다.

꿈만 같았던 새마을 청소년 중학교의 시간이 흘러 갈 무렵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께서 우리 집을 찾아오셨다. 공부를 잘했던 제자가 정식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이듬해 정식 중학교에 입학해 지금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힘이 들면 가끔씩 두 분의 선생님이 불쑥 생각날 때가 있다. 당시에는 모든 형편이 지금보다 훨씬 힘들었을 텐데 물심양면으로 제자를 위해 헌신하셨던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시 잡곤 한다. 6학년 때의 담임선생님과 새마을청소년 중학교 담임 선생님이 그러하셨듯이 아빠 같고 삼촌 같은 부드럽고 편한 모습으로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교사가 될 것을 조용히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