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에듀인뉴스] 교육계와 교육학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학계에서도 존 듀이(John Dewey)는 누구에게나 이미 잘 알려진 이름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알려진 만큼 그의 이론이 잘 이해되고 소개되어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의 사상은 ‘실용주의’, ‘실험주의’, ‘진보주의 교육’, ‘새교육’이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어 왔고, 우리의 교육계와 교육학계는 그를 현대적 교육사상의 근원인양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교육계에서 심도 있게 평가된 수준은 아니었다. 에듀인뉴스는 정치와 교육의 이념적 갈등이 극심하고 특히 자유주의적 전통과 강령적 기조에 대한 이해의 혼란이 심각한 수준에 있는 이 때, 존듀이의 실험주의적 자유주의와 이에 관련한 교육사상을 검토해 보는 ‘왜, 지금 존 듀이를 읽어야 하나’를 연재한다.

모호하고 난해하기로 유명한 존 듀이의 저서 '경험과 자연'(Experience and Nature). 

듀이는 매우 간결하게 언급하였지만 그에게 도전하는 글들은 사방에서 논쟁의 폭풍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점에서 주지주의적 오류에 묶인 전통적 사고에 풍파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실재론, 유물론, 자연주의, 관념주의 등 우리는 실재하는 것 그대로를 인식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노선의 주장이 이에 해당하고, 듀이에 대한 많은 반론도 이들에게서 발생했다. 

듀이 자신은 수년 동안 더욱 정교하게 밝히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그의 생각을 효율적으로 다듬은 것은 1916년에 출간한 ‘실험적 논리학 논집’이라는 개론서가 나온 이후의 일이다. 그가 자기 생각을 완성본으로 정리한 것은 1925년에 출간한 ‘경험과 자연’이며, 그것은 ‘문화적 자연주의’라고 일컫고자 한 하나의 새로운 ‘형이상학’이었다. 

듀이의 ‘경험과 자연’은 모호하고 난해하기로 악명이 높다. 재출판한 서문에는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 개요를 쓰고 제1장을 전적으로 다시 쓰기까지 했다. 한참 후에는 책의 제목을 ‘자연과 문화’로 바꿀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이는 그의 철학에서 사용하는 핵심적 개념인 경험에 대해 끝없는 오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책의 목적은 근대 문명에 깊이 스며있는 이원론들을 해체시키려는 자연주의적 형이상학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신(마음)과 물질(자연)은 대립 개념인가 

듀이는 자연의 실재 특징을 제대로 밝히는 데는 경험의 개념이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자연은 경험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 무관한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다. 경험은 자연과 사람 사이를 베일로 가로 막지도 않으며, 오히려 자연의 핵심에 계속적으로 침투해 들어갈 수 있게 하는 수단이 된다. 이러한 생각은 데카르트에 의해 굳혀진 ‘정신(마음)’과 ‘물질(자연)’의 이원론적 대립을 겨냥한 공개적 도전이었다.

듀이가 제시한 방법은 ‘명시적 경험의 방법’(Denotative Empirical Method)이었다. 이 방법은, 무엇보다도 먼저, 개념 혹은 의미를 규정하고 다음에 반성적 분석과 탐구로 밝혀진 결과를 확인한 후에, 그것을 다시 본래의 맥락 속에 되돌려 검토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분석과 탐구의 결과로 확인된 그대로가 우주 속에 있는 구성요소라고 전적으로 단정해 버림으로써 ‘주지주의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거기에 우리 자신의 관심사가 얼마나 작용했는가는 무시해 버린 것이다. 

우리가 탐구하는 대상과 표상을 외계와의 계속적 상호작용을 하면서 진행되는 ‘조정작용의 순환과정’ 그 속에 두어서 알게 된 내용, 즉 명시적으로 한정된 경험의 내용을 실재 그 자체인양 동일시하는 어설픈 철학적 사고를 치유하는 역할을 한다.

경험의 내용은 특정한 순간에 알게 된 것-특히 관조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봄날 아침에 벚꽃이 핀 것을 볼 때 벚꽃 송이를 시각적으로 확인하는 것 이외에 많은 인지적, 정서적, 신체적 작용과 기능의 내용이 있다. 인식의 대상이 되는 세계는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관심을 두는 맥락에서 다가온다. 

우리의 주변에는 항상 수없이 많은 물리적, 심리적, 사회적 요소들이 어지럽게 있을 수 있지만, 그 자체로서 인식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세계는 아니다. 이런 저런 동기나 목적으로 추구한 행위가 문제적 상황에 놓이게 될 때 내가 관여할 질성적 사고의 대상으로 의식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 경험은 어떤 대상에 접근할 때 나와 그 대상과의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의식의 내용을 포함한다. 바로 인간이 어떤 존재로서 어떤 삶을 영위하는가를 의미한다. 

그 대상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문제적 상황으로 인해 성립하는 주제는 매우 종교적이고 예술적인 상징성을 지니는 것일 수도 있고, 그런 것들로 인한 고통과 희열도 고도의 이론적인 과학과 논리에 못지않은, 어쩌면 더욱 깊이 인간의 경험에 관해 말해 주기도 한다.

듀이가 말하는 자연주의적 형이상학에서는 단순히 철학적 반성 그 자체의 과업을 실재와 진리를 밝히려는 전통적 개념의 이성이 구상하는 바에만 한정하지 않고, 그것을 훨씬 넘어서 거대한 삶의 세계에 다시 정착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성찰을 통해 철학이 성취하고자 하는 바는 지력의 사용을 제약하거나 방해하는 경직된 이원론을 차단시킴으로써, 철학 그 자체가 세계를 새롭게 조명하고 거기에 반응할 수 있도록 하려는 방법이다. 체계적 성찰을 통해 이렇게 다듬어진 것은, 본래의 것과는 구별되는 ‘이차적’ 대상이다. 

거기에 동원된 개념, 혹은 합리적 방법 등은 결코 버릴 것이 아니라, 경험의 생동적 바탕과의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속성을 지닌 것으로 입증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문화적 자연주의의 목적은 전문적 철학자들의 사유 세계에만 머물지 않고 더욱 인간적이면서도 더욱 효율적 지력으로 작용하면서 문명 그 자체를 주도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듀이는 우리의 사고를 기능적 측면에서 강조함으로써, 즉 연속성 개념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발전시키면, 서양철학을 특징지어 온 사고의 습관인 여러 가지 이원론에 대해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