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원 전북 전주 완산고 교사

"좋다는 타국 제도 무조건적 수용 경계해야"
미래 준비 '새로운 학력' 필요하지만, 정착에 시간 더 필요
"정부는 국민과 함께 머리 맞대고 교육개혁 논의 해야"

이미지=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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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제도 도입이 항상 옳지만은 않아"

[에듀인뉴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교육을 둘러싼 담론에서 사라지지 않는 주제가 있다. 우리나라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입시 위주의 교육’이라는 지적이다. 특히 공교육을 몰락시키고 학교를 서열화하는 주범으로 자사고, 특목고를 지목한다. 그 대안도 ‘객관식 문제풀이 위주의 수능 폐지’, ‘모든 시험을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전환’, ‘자사고, 특목고 폐지’, ‘서울대학교 폐지’까지 각양각색이다.

공식적 사회화 기관인 학교교육에 특정한 제도를 도입하면 자연 상태의 개인 모두를 존엄한 사회적 인간으로 성장시키고 타자와 공존하는 삶을 추구하게 할 수 있을까? 각 국가의 교육제도는 근본적으로 독창적이거나 독립적이지 않다. 어떤 국가의 교육제도든 정치, 경제, 문화, 복지 분야를 포괄하는 전체적인 환경에서 만들어졌고 내재적인 사회적 변동과 주변국과의 상호교류를 통해 진화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교육 외부를 도외시하고 제도를 이해하거나 현실에 적용하는 행위는 사리에 맞지 않다.

즉 교육문제를 해결하려면 타국에서 아무리 좋았던 제도라도 찬미하기보다는 그 제도가 생성되고 확산된 사회적 맥락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또한 그대로 수용했어도 자국 국민의 의식에 따라 새로운 교육제도의 전개과정이나 교육적 성취의 질적 차이는 명백하다. 나아가 교육당국이 자국이나 지역의 사회적, 역사적, 자연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새롭게 이식한 제도와 정책을 강제하고 적용하면 그 장점마저 빛이 바래기도 한다. 교육은 당사자의 삶을 둘러싼 당대의 권력, 지위, 부의 분배는 물론이고 자녀들의 몫에도 크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새로운 학력에 대한 '필요성'과 그치지 않는 '논란'

2010년 교육감 직선제가 시행되고 2기, 3기에 걸쳐 다수의 진보교육감이 당선되었다. 진보교육감은 주도적으로 몇 가지 교육정책을 실행했는데 특히 ‘새로운 학력’에 역점을 두었다. 새로운 학력은 2015 개정교육과정인 ‘역량중심교육과정’의 지역교육과정인데 교육청마다 ‘참 학력’, ‘참된 학력’, ‘새로운 학력’, ‘신 학력’ 등으로 지칭되었으며 구조적으로는 비슷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내용은 이념적 스펙트럼의 차이가 컸던 이명박 및 박근혜 정부에서 추진되었던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부터 서구 선진국은 ‘일국적 자본주의의 위기’를 경험하였고 1990년대부터 세계화로 더욱 절박해진 환경문제와 같은 ‘비경제적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교육적 패러다임을 수용하였다. 자본주의가 고도화하는 한국사회도 더 이상 피하기 어려웠다.

새로운 학력은 혁신학교를 선도학교로 점차 일반학교까지 확산하였다. 핀란드 교육, 독일 교육, 덴마크 교육, 스위스 교육, 스웨덴 교육이 화두가 되었고 그 나라의 교육과정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으며 교육청은 새로운 학력이 강조하는 ‘역량(절차적 지식, 조건적 지식)과 학습자 중심의 교육과정’에 대해 혁신학교를 중심으로 재정적,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거의 10년이 지났는데도 새로운 학력의 성과에 대한 논란은 그치지 않는다. ‘역량과 학습자 중심의 교육과정’에 대한 방법론적 문제부터 ‘평가의 공정성’이나 ‘바람직한 인성을 갖춘 창의·융합형 인재를 양성했는가?’라는 결과적 효율성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기초학력 저하를 지적하는 등 실증적인 반론이 잇달아 제기되었다.

물론 새로운 학력이 한국사회의 경쟁과 서열화라는 고질적인 병폐를 해결하려는 취지였기에 더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도 상당하다. 어떤 정책이든 수행과정에 긍정과 부정의 측면이 있고 사회적으로 정착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작년 7월 대입제도 개편을 위한 시민참여단 2차 숙의 토론회 모습.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는 결국 수능 정시와 수시 비율 조정만으로 끝나면서 '반쪽짜리 공론화'라는 오명을 얻었다. 사진제공=숙의토론 참여자
작년 7월 대입제도 개편을 위한 시민참여단 2차 숙의 토론회 모습.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는 결국 수능 정시와 수시 비율 조정만으로 끝나면서 '반쪽짜리 공론화'라는 오명을 얻었다. 사진제공=숙의토론 참여자

새 제도 도입에 국민 여론 수렴없는 정부..."제도의 왜곡 불러와"

아쉬운 점이 있다. 교육부나 교육청은 지금까지 타국에서 모범이라는 새 제도를 도입할 때마다 국민 여론을 절차적으로 다양하고, 공정하게 또한 적극적으로 수렴한 적이 드물다.

즉 ‘우리나라의 사회·문화적 바탕에 조화롭게 안착할 수 있는가?’ 대해 토론다운 토론을 거의 하지 않는다. 가령 새로운 학력을 추진할 때에도 ‘학벌사회’ 및 ‘높은 대학진학률과 낮은 취업률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 전 정부처럼 ‘직업교육’을 강조하지만 사회적 반응은 그리 뜨겁지 않다.

그 이전의 이명박 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독일식의 마이스터고를 모델로 대학에 가지 않더라도 대학졸업자와 비슷한 사회적 대우를 받을 수 있고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 인재를 육성하는 특성화직업교육을 강조했지만 성공했다고 평가받지 못한다.

오히려 직업교육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노동 착취와 비인간적인 대우’ 등이 사회문제로 부각되면서 한국직업교육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줬다. 그 까닭은 독일이나 스위스처럼 학교 교육과정으로 전문적인 직업인을 양성하려 했지만 그 양상이 매우 달랐다.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특성화직업교육을 지향했지만 한국사회의 교육환경을 뚜렷하게 바꾸지 못한 까닭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한국사회의 문화적 전통을 고려하지 않고 기대를 키운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다.

한국사회는 세계적으로 ‘문(文)의 전통(배움의 욕망)’이 강한 나라이다. 조선에서 ‘文(이론적 지식)’은 그 자체가 인격이고 명분이고 정통성이었다. 또한 푸코의 지적처럼 "지식은 이론적이든 절차적이든 그 사회의 고유성을 반영해 항상 권력과 결합했으며 사회를 지탱하는 구조적 요소"이다. 

한국 국민에게 배움의 욕망은 유전자는 아니지만 역사적 무늬와 유증(遺贈)으로 작동했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친 대학진학 욕망이 교육적폐를 가져왔다는 점을 근거로 들거나 그것이 사회과학적 사실이라고 해도 유럽 각국의 대학 진학률은 25∼45%로 낮은데 한국의 대학진학률이 69%라는 점은 병폐다.

또한 그 대안으로 ‘직업전문교육을 확장하고 대학 진학률을 낮추는 방향으로 교육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만으로는 사교육비 등의 여러 교육문제를 쉽게 해결하지 못한다. 국민정서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국은 공공 철학적 기반이 매우 약한 사회이다. 우리 사회에서 공정성 가치가 크게 부각된 시점은 외환위기 이후인데 국민들의 정의에 대한 태도는 이념적, 지역적, 계층적으로 매우 다르며, 권력과 지위, 부와 같은 사회적 희소가치의 분배를 둘러싼 갈등은 첨예하지만 갈등을 해결하는 협의와 조정에는 근본적인 태도를 보인다. 문재인 정부에서조차 노사정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직업교육적인 복지모델로 삼은 독일은 매우 다르다. 독일 사회에서 중소기업 노동자의 임금은 주변국에 비해 비교적 높고 그 나라의 교육제도와 정책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만 그 바탕에는 다수 국민이 역사적 경험을 통해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사고’에 익숙한 까닭이다. 보수에서 진보로, 진보에서 보수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져도 교육제도를 비롯한 사회제도가 크게 바뀌지 않는 상황도 이러한 까닭이다.

독일식 교육제도를 도입해 한국교육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면, 독일의 교육제도를 찬미만 하지 않고 2003년 좌파 사민당 정부의 슈뢰더 총리가 제안해 우파인 기민당 정부의 현 메르켈 총리가 현실화한 ‘아젠다 2010’이 모범이 될 만한 교육제도를 지속가능하게 했다는 점을 성찰해야 한다.

독일은 노동자, 자본가, 정부가 사회적 협약으로 노동시장에서 유연성을 허용하지만 그 폭을 엄격하게 규제함으로써 세계가 부러워하는 독일경제의 핵심인 작지만 강한 ‘미텔슈탄트(Mittelstand)’를 키웠기에 ‘대학진학에서 성적지상주의와 경쟁이 거의 사라진 독일식 교육시스템’을 지금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경제적이거나 사회문화적 토양이 전혀 다른 한국사회에 독일식 직업교육방식을 교육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적용했으니 그 효과가 크지 않을 수밖에 없다.

교육 개혁..."개방적이고 객관적인 장을 열고 국민과 함께 해야"

역대정권마다 이러한 정책적 오류는 사안은 다르지만 반복적이었다. 그 점에서 한국의 교육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서울대를 없애거나, 자사고나 특목고를 없애면 가능하다’는 식으로만 접근하는 관념적인 태도는 적절하다고 볼 수 없다. 즉 교육적폐를 눈 녹듯이 사라지게 할 수 없다.

그보다는 시간이 더 걸리고 사회적 진통이 있어도 ‘개방적이고 객관적인 사회적 공론화와 과학적인 근거에 기초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교육과 철학에 대해 다수가 동의하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노력’이 절실하다.

기우일지 모르지만 지금 ‘국가교육회의에서 국가교육위원회를 만들기 위한 위원 구성’이나, ‘국가교육회의와 교육부와의 관계’, ‘시도교육감협의회나 교육부의 사안적인 갈등’, ‘학교현장과 교육부 및 교육청 간의 학력에 대한 체감지수의 차이’에서 보듯이 그 길은 멀고도 멀다.

물론 한국사회에서 교육개혁은 시급하고 지속가능한 과제이다. 하지만 개혁의 실효성을 위해서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데 급급하거나 무조건 추종하지 않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타국과 다른 우리 아이, 가정 및 사회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가운데 이상적 관념이나 정치권력에 기대기보다는 가장 실용적인 제도가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가능할까?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다. 공론의 장은 일방적으로 강의하는 곳이 아니라 다름을 토론하는 공간이며 공통의 주제에 대해 전혀 모르는 타자들이 시민 민주주의적으로 논의해야 하는데 한국교육에서는 그 같은 모습을 찾기 어렵다. 교육부나 교육청은 맥락과 지평을 강조하며 타자와의 차이를 인정한다고 말하면서 실용적 대안에는 눈을 감고 비합리적 정책을 내놓기 일쑤다.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 귤화위지(橘化爲枳)

‘귤이 탱자가 된다’는 뜻으로 기후와 풍토가 다르면 강남에 심은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로 되듯이 사람도 주위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비유한 고사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제원 전북 완산고 교사
박제원 전북 전주 완산고 교사

# 이 글은 교육을바꾸는사람들(교바사)와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