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삼 경기 광성초등학교 교사

(2)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 통해 본 교권과 학생 인권

[에듀인뉴스-명교학숙 공동기획] 학생들의 인성교육 방향 정립을 위해 고전(古典)을 활용한 교육이 떠오르고 있다. ‘명교학숙’은 이러한 교육계의 움직임을 리드하는 초·중등교사 연구모임으로 동·서양 인문고전을 탐구하고 현장에 적용하는 교육방법론을 연구하고 있다. <에듀인뉴스>는 명교학숙과 함께 고전을 통해 우리 교육 현실을 조명하고 드러난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미지=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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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국민청원 및 제안에 게시된 ‘교사가 학생을 지도할 수 있게 대책을 세워주세요!!!’라는 청원이 요즘 교사들 사이에서 뜨겁다. 그 내용을 본 초등과 중등교사들 대부분은 고개를 끄떡일 것이다. 그만큼 지금의 교육현장 현실이 암울하다는 증거이다. 일부 학생들은 교사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통제 불능 상태의 교실에서 가장 피해를 보는 학생은 대다수 선량한 학생과 교사이다. 교사의 지도에 불응하는 이들 학생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는 ‘신고와 학생 인권’이다.

교사 권위주의가 팽배해 학생 인권이 무시되던 시절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때 학생 신분으로 교육을 받았던 대부분 국민은 학생인권조례 제정에 환호했으며 그 환호에 표를 던졌고, 권위주의 교육이 민주화로 가는 과정에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초등학교 과학실험실에 가면 양팔저울이 있다. 양팔저울은 항상 평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쪽에 가장 가벼운 추를 추가만 해도 평형이 무너진다.

교권과 학생 인권은 서로 간의 평형을 유지하고 조화를 이루고 있어야 하는 것이 상식인데 교육현장에서 우리는 교권의 추락이라는 무거운 추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절망감을 지울 수가 없다. 반대로 학생 인권을 부르짖는 이들의 권위는 하늘로 올라간 느낌이다.

해방 시절에 ‘자유’를 외치자 책임지지 않는 ‘방종’이 나타났다. 교권을 추락시켜 학생 인권을 드높이고 책임지지 않는 방종을 선사하는 현실에서 교사들은 몸을 움츠리게 되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 소수 문제 학생들에 의해 교실 상황은 무질서와 혼란 상태에 도달하는 경우가 증가하고 이는 고스란히 다수 선한 학생의 피해로 이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공공의 이익을 보호하고 개인의 학습권을 확보해야 할 공간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소수자에 의한, 다수자에 대한 역차별이 발생하는 것이다.

문제를 일으키는 소수자를 처벌하여 다수자의 권익을 보호하고 교사의 권리와 권위를 회복하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고 진단하여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교육자의 소명이다. 교육 현장의 경험상 문제 행동을 보이는 학생들 모두 정서적, 정신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다. 그 문제를 우리는 애써 외면했고, 감추었으며, 또다시 다른 학교나 상급 학교로 떠넘기는 행위를 반복했다. 그러한 반복된 행위의 부메랑을 교육을 담당하는 우리가 시대와 공간을 관통하여 맞고 있다.

문제를 일으키는 소수 학생에 대한 책임을 담당 교사에게만 전가하는 행동은 비열하고 무책임하다. 모든 문제 행동은 학생 개인을 포함한 가정, 학교, 지역 사회 나아가 국가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다.

그들의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치료하고 관리하는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토털서비스가 필요하다. 문제 학생들의 처벌이 아닌 근본적인 회복과 복귀를 원한다.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요, 일터의 동료요, 국민의 한 사람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선한 이웃과 함께할 권리가 있다.

‘맹자’ 양혜왕 하편에 맹자가 제나라 선왕에게 한 말이 나온다.

“만약 여기에 옥돌 원석이 있다면, 비록 비용이 20만냥이 들더라도 반드시 옥을 다루는 기술자에게 다듬도록 할 것입니다.”

이는 전문적인 일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그 나라가 잘 운영된다는 이야기이다.

정치는 정치가에게 맡기고, 교육은 교육자에게 맡겨야 한다.

교육을 정치가가 하면 교육이 정치가 된다. 교육이 정치가 되면 유권자를 유혹하여 표를 얻는 정치의 수단이자 하수인이 될 가능성이 커진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유권자는 빵과 서커스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바로 그 빵과 서커스가 로마인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결국 멸망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

교육은 교육자에게 맡겨야 한다. 교육 현장에서 온전한 정신이 외면되고 혼란에 빠지기 전에 교육을 정치가의 손에서 교육자의 손으로 가져와야 한다.

애담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행위에서 정의의 기초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공공의 이익에 따르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공익에 기여하지 않는다면 완전히 정의롭다고 말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지만 피해를 본 다수 학생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지 고민할 때이다. 고민은 고민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고민이 공공의 이익을 도모하는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이어져야 소수의 문제 학생과 다수의 선량한 학생 모두를 도울 수 있다. 인내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시대를 살았던 우리에게 말하고 싶다.

용기 없는 인내는 포기를 의미합니다.

먼저 용기 있는 행동이 어떤 것인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행동이 무엇인지 교육 현장에 있는 우리 교사들 자신들이 머리와 입을 모을 때이다.

유영삼 경기 광성초 교사
유영삼 경기 광성초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