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중 중앙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교육비 부담' 내리고 '교육의 질'도 함께 떨어진 '교육 국가책임' 기조의 민낯
'숙려' '공론' 민주주의 증진 환영하지만 "대중의 눈 항상 옳지 않음 명심하길"

교육부 네이버 블로그 메인화면 캡처
(교육부 네이버 블로그 메인화면 캡처)

교육의 국가책임 강조한 문재인 교육

[에듀인뉴스] 문재인 정부는 출범 2년을 막 넘겼다. 으레 그렇듯, 여기저기서 지난 2년 정책의 공과를 평가했다. 교육 부문에 대한 평가들은 대체로 박하게 나왔다. 유치원 회계 부정이나 대입 개편 문제 등으로 큰 혼선을 빚었다거나, ‘고교 학점제 도입’과 같이 애초 내걸었던 공약 가운데도 이행되기 어려워 보이는 것들이 적지 않다고들 비판한다.

반면 정부 스스로는 각 부문에서 정책성과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고 홍보한다. ‘문재인 정부 600일’을 기준하여 내놓은 자료를 보면, “유아에서 대학까지 교육의 국가책임을 확대했다”고 자평하고 있다.

한 대통령의 임기를 세분해 교육정책의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사실 무리한 가 있다. 교육정책의 효력이 1~2년 사이에 확연히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한 시기에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교육적인 변화가 당시 정부 정책의 성과인 것만도 아니다.

특히 근본적이고도 전면적인 개혁을 시도하는 경우에는, 임기 5년 모두를 가지고도 착근시키기도 어려울 것이다. 흔히 보듯이, 야당의 몽니만으로도 정부의 정책 시도들은 종종 좌초된다.

한 정부의 공과를 평가할 때, 절대적 준거를 두기보다, 공약을 기준으로 삼기도 한다. 정권을 얻기 위해 국민과 했던 약속을 제대로 지켰는지 따지는 것이다. 이런 평가는 공약에 대한 책임을 묻는 데 쓸모가 있긴 하겠지만, 애초 공약 자체에 결함이 있는 경우는 평가의 의미 자체를 증발시킨다.

평가는 정책을 바르게 이끄는 데 기여해야 할 터인데, 잘못된 공약(정책)마저도 무조건 이행하라고 강요하게 된다면, 그런 ‘평가’는 평가일 수 없다.

이런저런 점을 고려하면, 어느 한 정부의 교육정책을 평가하는 작업은 거시적이어야 마땅할 듯하다. 선거 공약들을 그대로 지켰는지 또는 양적인 미세 지표들이 개선됐는지 평가하는 식의 미시적 접근으로는 정책 효과의 궤적을 길고 포괄적으로 보기 어렵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공약을 관철하는 것이 곧 발전을 가져오는 것은 아닐 뿐만 아니라, 몇 년 사이의 지표 등락(騰落)이 ‘백년대계’의 교육 흐름을 제대로 표시해주지도 못할 것이다. 정부의 미시적 움직임에 주목하기보다, 정부가 채택한 정책 노선을 굵게 검토하는 것이 정책 평가에 더 적절할 것이다.

이런 평가에서는 물론 정부 정책 하나하나를 촘촘히 따질 수는 없겠지만,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우리 교육의 흐름을 정부가 어디로 이끄는지 조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교육정책 기조를 ‘교육의 국가책임 강화’에 두고 있다. 대선 공약집의 교육 부문 표제를 그렇게 붙였고, 정부 출범 600일을 맞아 정책성과를 홍보하는 책자에서도 ‘유아에서 대학까지 교육의 국가책임을 확대했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실제 이런 방향에서 추진되는 정책들이 적지 않다. 국공립 유치원을 늘리고 유아보육과 교육을 위한 지원도 늘려가고 있으며, 고등학교 무상교육도 추진하고 있다. ‘사립대학의 공공성’을 강화하려는 움직임도 꾸준히 보인다.

교육의 책임을 국가에 지우는 정책 노선은 기본적으로 지당하다. 개인이 사람답게 성장하는 데나 사회가 어울려 살만하게 되는 데나, 교육은 필수불가결한 인자다. 교육의 기반 없이 개인이나 사회 복리(Well-being)를 기대할 수 없다. 체제나 이념과 관계없이 어느 나라에서나 의무교육 제도를 볼 수 있는 것처럼, 새삼스럽게 교육의 보편적 가치와 효용을 논란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교육의 국가책임을 강조해야 할 이유가 특별히 있다. 우리 학교교육은 ‘민간’에 의존하는 바가 지대하다. 비교할 만한 가운데서 찾아볼 때, 교육을 위한 ‘사부담’이 우리나라만큼 큰 나라는 없다. 그만큼 우리나라 정책은 교육을 사적인 것으로 방임해왔다. 이런 여건에서는 교육기회의 불평등이 심화하기 마련이다.

특히 ‘양극화’라고 일컬을 정도로 경제적 불평등이 악화한다면, 교육을 제대로 받고 못 받는 격차는 무참하게 벌어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교육에서 소외되는 개인들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수많은 부조리와 병폐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규범적으로나 실리적으로나, 문재인 정부의 ‘국가책임’ 기조는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침은 부족함과 같다

지나침은 어느 경우에나 피해야 할 마련으로, 교육의 국가책임 기조도 지나치게 경직시키고 확장하면, 교육의 활기를 죽일 수 있다. 복지국가들이 종종 당면하는 딜레마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의 지원이나 개입이 커진다고 모두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과도한 ‘공부담’이나 ‘국가주의’는 개인의 나태나 무기력을 초래할 수도 있고, 관료주의적 퇴행이나 국가재정의 낭비를 낳을 수도 있다.

특히 선구적이거나 창발적인 활동이 요구되는 부문에서 국가의 과도한 개입은 혁신이나 발전보다 안주나 퇴보를 가져올 수 있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도 이런 문제 소지를 안고 있다.

이전 정부들에서도 그랬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여전히, 교육정책의 근간을 개인이나 가정의 교육비 부담을 줄이는 데 두고 있다. ‘국가책임’을 강화하는 것은 곧 국민들의 교육비 부담을 줄이는 것이라고 인식하는 듯,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비용 부담을 국가가 덜어주는 데 주력하고 있고, 대학 수준에서도 등록금을 동결하다 못해 내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책 노력은 교육의 질을 보장하려는 노력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가정에서 등록금을 덜(안) 내게 됐지만, 동시에 학교나 대학에서 받게 되는 교육의 질도 떨어지게 됐다면, 그 ‘부담 덜기’ 정책이 바람직하다고만 볼 수 없다.

수월한 교육의 단계에서는, 일반 ‘상식’을 벗어나고 ‘관례’에서 자유로운 시도들이 고무되어야 한다. 이런 수준에서마저 국가 개입이 과도하면, 교육이나 연구는 피어나기보다 시들게 될 것이다. 국가 개입에 따라붙는 관료주의적 관성과 조직이기적 보수(保守) 경향이 교육과 연구의 발전에 족쇄가 될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대학들은 매우 궁핍해 정부의 재정 지원을 갈급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 있다. 국가책임을 앞세우는 현재의 교육정책은 재원을 줄임으로써 대학들의 이런 형편을 더욱 궁색하게 만들고 있다. 결국 대학은 ‘재정지원’을 통제도구로 삼는 정부의 ‘지침’에 순응할 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대학의 움직임은 ‘상식’과 ‘관례’를 앞세우는 정부의 ‘가이드라인’에 갇힐 수밖에 없고, 교육과 연구는 어느 영역에서도 수월성을 발휘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정부는 지난해 국민 의견을 반영해 대입제도를 개편하겠다며 공론화 과정을 도입해 진행했다. 그러나 대입제도개편 공론화는 주로 수시와 정시 비율을 정하는 데 빠져버렸고, 최종 투표를 통한 정책 결정 이후에도 공론화에 참여한 사람들 특히 정시 비중 확대를 외친 측은 정부가 공론화 결과대로 정책을 추진하지 않는다며 문제를 제기하는 상황이다.(이미지=교육부 블로그)
정부는 지난해 국민 의견을 반영해 대입제도를 개편하겠다며 공론화 과정을 도입해 진행했다. 그러나 대입제도개편 공론화는 주로 수시와 정시 비율을 정하는 데 빠져버렸고, 최종 투표를 통한 정책 결정 이후에도 공론화에 참여한 사람들 특히 정시 비중 확대를 외친 측은 정부가 공론화 결과대로 정책을 추진하지 않는다며 문제를 제기하는 상황이다.(이미지=교육부 네이버 블로그)

숙려와 공론으로 대표된 민주적 결정..."국민 식견(識見)과 주견(主見) 충분히 확보했나"

국가책임 또는 공공성 증진에 교육정책의 지향을 두면서, 문재인 정부는 상응하게 ‘공론화’를 중요한 정책 절차로 채택하고 있다. 특정 집단의 이해나 ‘밀실’의 야합을 모사하지 않고, 투명하고 공정하게 정책 결정을 내리겠다는 취지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서, 교육정책의 맥락에서 유독 ‘공론화’니 ‘국민참여 정책숙려제’니 하는 말을 자주 듣게 된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다.

정책 결정에 사회적 숙려와 공론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사실 사회에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그만큼 문재인 정부의 ‘공론화’ 강조는 새삼스러울 것 없이 당연히 그래야 할 일이다. 그런데도 굳이 ‘숙려’니 ‘공론’이니 하는 용어를 부각하며 문재인 정부가 새로운 정책 경향임을 내세우게 됐던 데는, 아마도 이전 정부들의 정책 행태가 민주적이거나 공익적이지 못했다고 여겼기 때문일 터이다.

어쨌거나 정책 결정이 국민 모두의 숙려를 기반으로 공론을 거쳐 이루어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하다. 실지로 문재인 정부 들어서서, ‘중앙’과 ‘지방’의 다양한 의사결정이 ‘국민(주민) 참여’와 ‘공론화’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져 왔고, 그런 결정이 민주적이고 지혜로워진 점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책결정에서 대중의 참여와 동의를 얻어내는 절차를 밟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국민 참여’와 ‘공론화’도 국민들의 식견과 주견 그리고 민주적인 소통체제를 전제할 수 있을 때 제 기능을 해낼 수 있다. 무턱대고 의견조사를 하고 집합 토론과 투표의 일정을 거친다고 해서 정책 결정이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국민 참여와 공론의 과정을 밟는 절차는, 사안에 따라서는, 정치적 인기 영합이나 우중정치(愚衆政治)의 행태를 빚을 위험이 크다. 특히 교육 부문에서 그런 위험이 크다.

교육은 밖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안에 숨겨진 것에 그 본질이 있다.

교육의 실상은 선생과 학생이 주고받는 대화의 형식이나 텍스트로 규정하지 못하며, 교육의 결과 역시 시험 점수나 드러나는 선행만으로 가늠할 수 없다. 문재인 정부가 교육정책으로 수용했듯이, 교육의 효능을 ‘계층사다리’ 오르는 데서만 찾으려는 ‘상식’도 교육의 본질을 가리기는 마찬가지다. 진실이 이러한데, 문재인 정부에서 공론화 절차는 ‘대중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한에서 교육정책을 의논하려고 한다. 그런 절차로는 합당한 정책 결정을 기대하기 어렵다.

작년의 ‘대입개편 공론화’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그런 과정은 이전투구나 다름없는 대안별 파벌싸움이기 십상이고, 그 결과로 얻는 것은 ‘오차범위’의 의견 차이도 해소하지 못하는 봉합의 정책 결정이기 십상이다. 이런 맥락에서는 교육의 본연을 살리는 정책 모색을 결코 기대할 수 없다.

"지난 2년 거울 삼아 교육의 실질 추구하는 정부 되길"

요컨대 문재인 정부의 교육정책은 교육에 대한 국가책임을 명시하고 민주적 절차를 강조하는 데서 충분한 정당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그러나 정책 지향의 정당성이 정책 과정의 위험이나 부작용을 막아주지는 않는다. 국가 개입이 지나칠 경우 교육과 연구의 진취성이나 창발성이 사그라들 수 있고, 민주적 절차가 왜곡될 경우 교육정책은 교육의 본연을 훼손하고 대중영합적인 파행을 거듭할 수 있다.

이런 우려가 현실이 된 사례가 지난 2년 사이 없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교육정책에서 앞으로 이런 횡보를 경계하며 교육의 실질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강태중 중앙대 교육학과 교수
강태중 중앙대 교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