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우 경북혁신교육연구소공감 이사

수업하는 교장: 교육자의 존재론·인식론·가치론적 필연성

(EBS 뉴스 캡처)
(EBS 뉴스 캡처)

[에듀인뉴스] 수업하는 교장!

이재정 경기도교육감의 이슈 제기로 유명해진 화두다. 2014년에 이어 최근 이 교육감이 다시 이 화두를 던짐으로써 교육현장에 적잖은 파문이 예상된다.

사실, ‘수업하는 교장’이란 말은 ‘정치하는 국회의원’이란 말처럼 동어반복이나 다름없는 표현이다. 교육법상으로도 수업이 교장의 마땅한 소임임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장은 교무를 통할하고, 소속 교직원을 지도·감독하며, 학생을 교육한다(초중등교육법 제20조). 따라서 이 표현이 특별한 화두로 부상하는 자체가 우리 교육현장의 불합리를 방증한다.

이 교육감은 “교장이 교육의 책임자라면 교육의 핵심인 수업을 통해 교사들의 어려움, 학부모의 요구, 학생의 문제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교장이 수업해야 하는 명분의 정곡을 찌르는 발언이라 하겠는데, 이 이치를 존재론-인식론-가치론의 차원에서 간략히 풀어보고자 한다.

존재론·인식론·가치론적으로 본 교장 수업의 필연성

존재론적으로 교장은 교육자이다. 처음부터 교장으로 출발하여 행정가의 역할만 맡는 미국의 교장과 달리 우리 교장은 교사에서 관리자로 승진한다. 교장의 자격 기준에 일정 기간의 교사 경력을 요구하는 것이나 초중등교육법에서 학생교육을 교장의 주된 임무로 명시하는 것은 교장의 정체성이 교육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교육의 핵심은 수업이다.

인간 활동에서 이론과 실천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법이다. 따라서 수업이라는 실천과 유리된 사람이 학교교육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은 당연하다. 교육과정에 대한 감각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학생에 대한 이해, 일선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의 고충과 애환에 대한 공감능력이 부실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이것은 수업하지 않음에 따른 필연적인 인식론적 한계라 하겠다. 교육활동의 고갱이(핵심)라 할 수업과 동떨어져 있는 사람은 학교교육의 전반을 이해할 수 없는바, 이런 사람이 교무를 통할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인식론적으로 수업은 교육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기에 학교교육 전체를 굽어 살피는 학교장은 최소한의 수업 실천을 해야 한다.

계속해서, 가치론적(윤리적)으로도 한국의 교장은 수업해야만 한다. 혹 교장들은 교육법에서 교장의 본분으로 명시한 학생교육이 꼭 수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지 모른다. 동의한다. 학생교육의 외연은 수업보다 넓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되묻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네 교육현장에서 수업 외의 어떤 사소한 학생교육 활동에라도 마음을 쓰시는 교장선생님이 잘 있는가? 개별 교사의 경험에 따라 편차는 있겠지만 아마 절대다수의 교사들은 ‘아니오’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교장선생님들이 외국의 교장들처럼 행정 일에 전념하는 것도 아니다. 수업도 학생생활지도도 행정업무도 비껴가면서 외유성 출장을 즐기며 수시로 학교를 비우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이 우리네 교장들의 보편적인 자화상이 아닌가?

그 결과 초등학교 교장이 대한민국 직업만족도에서 부동의 1위를 점하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 교장선생님들, 지금부터 덜 부끄럽기 위해서라도 이재정 교육감의 제안을 수용해야 한다. 교사들처럼 1주일에 20여 시간을 하라는 것도 아닌데, 고작 3~6시간의 수업조차 못 하겠다며 결사항전의 태세를 보이는 것은 윤리적이지 않다.

예전과 달리 요즘 교장선생님들은 품성적으로나 교육적으로도 훌륭한 분들이 적지 않다. 그 때문에 대한민국 교장 전체를 무위도식하며 녹봉을 축내는 집단으로 매도할 뜻은 없다. 확신컨대, 훌륭한 교장선생님들이라면 이 교육감의 제안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온당한 교육적 관점을 지닌 선량한 교육자라면 1주일에 3~6시간 수업하라는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존재론적으로 수업은 교육자의 본분에 해당하며, 인식론적으로도 학교교육의 전반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교장은 '수업'에서 자질, 윤리성, 권위를 찾아야 한다"

학교의 오물을 치우라는 것도 운동장 땅을 파라는 것도 아닌 1주일에 3~6시간의 수업을 하라는 요청이 학교장의 고귀한 위신을 손상하는 부당한 처분일 수 없다. 그럼에도 ‘수업하는 교장’이라는 교육감의 지극히 상식적인 제안을 ‘절대 불가’로 화답하는 것은 ‘감히 교장에게 수업을 시켜?’라는 제왕적 자기의식의 발로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아직도 학교현장에는 낡은 권위주의에 침잠하여 힘든 일은 아랫사람들에게 전가하고 개인적 영리와 무사안일을 좇는 자질 없는 교장들이 허다한 실정이다. 이런 분들이 휘하의 후배교육자들로부터 권위를 얻을 리가 만무하다.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권력자는 권위주의자가 되기에 십상이다. 이런 분들에겐 ‘수업하는 교장’이라는 혁신 교육감의 요청이 교장 권위를 파괴하는 볼세비키적 조치로 여겨질 것이다.

따라서 나는 ‘수업하는 교장’이라는 화두가 교장의 자질과 윤리성을 가늠하는 바로미터로 작용할 것이라 본다. 이 요청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교장은 권위 있는 교장일 것이며, 그 역의 경우는 권위주의적이거나 자유방임형 리더십의 소유자일 가능성이 크다.

새는 날기 위해 존재하고 교육자는 학생교육을 위해 존재한다. 날지 않으면 새가 아니듯이 학생 교육을 기피하는 사람은 교육자가 아니다. 1주일에 최소 시수의 수업하기! 교육자로 존재하고, 교육을 올바로 인식하고, 교육자다운 교육자가 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수업해야 교장이다.

이성우 경북혁신교육연구소공감 이사
이성우 경북혁신교육연구소공감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