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옥 경기 안양 동안고 진로진학상담교사

'아담 스미스'와 '헤르바르트'를 통해 본 우리 교육

[에듀인뉴스-명교학숙 공동기획] 학생들의 인성교육 방향 정립을 위해 고전(古典)을 활용한 교육이 떠오르고 있다. ‘명교학숙’은 이러한 교육계의 움직임을 리드하는 초·중등교사 연구모임으로 동·서양 인문고전을 탐구하고 현장에 적용하는 교육방법론을 연구하고 있다. <에듀인뉴스>는 명교학숙과 함께 고전을 통해 우리 교육 현실을 조명하고 드러난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미지=픽사베이)
(이미지=픽사베이)

불신의 늪에 빠지다

TV를 보면 잡생각이 난다. 말을 하는데 말 같지 않다. 말을 하는데 말이 안 된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억지로 말이 되어 돌아다니고 있다. 보는 사람은 피곤하다. 지루하다. 도움이 안 된다. 떠나고 싶다. 피하고 싶다. 답답하다. 풀고 싶다. 나간다. 갈 곳이 없다. 피할 곳이 없다.

신문을 보아도 잡생각이 떠돈다. 말이 되지 않는 일들이 활자 위를 떠다닌다. 유튜브에서 돌던 뉴스들이 활자로 바뀌어 새로운 기사인 양 신문을 장식한다. 새로운 것들도 없다. 그저 색깔만 바뀌어 같은 패턴의 말들이 뉴스라고 날아다닌다. 이쪽이 원하는 대로 쓰여 졌거나 저쪽이 원하는 대로 해석된 정보들이 대부분이다.

본질은 보도하지 않는다.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다.” 심심하면 한번 툴툴 내어 뱉어 본다. 그래도 쓸쓸한 마음은 가눌 길 없다. 허공에 대고 외친 메아리일 뿐이다. 혹시 ‘누’가 될까 봐 마음속에만 간직한다. 상대에 따라 실컷 털어내어 스트레스를 풀어낸다. 누구나 아는 내용이지만 그 누구도 나서서 해결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부 쪽 사람들도 그다지 관심 없는 듯하다. 적당히 편한 길로 세금을 왕창 걷어 나누어주면 무식한 국민은 혹하고 표를 줄 것이다. 굳이 싸워가며 잘 해보겠다고 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끼리만 잘 버티면 될 터인데. 반대쪽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적당히 정부의 정책에 반기를 드는 척하면 싫증난 표들이 덤으로 들어올 터이다. 적당히 열심히 하는 모습 보여주면 되는 것 아닐까?

언젠가부터 TV와 멀어졌다. 뉴스에서 멀어지더니 이젠 무슨 드라마가 방영되는지도 모른다.

불신의 늪에 빠졌다. 단순하게 믿고 싶은데 믿으면 안 될 것 같다.

그 이면의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을 것이기 때문에 정신을 차려 분별력을 가지고 들어야 할 것 같다. 나와 무관한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덧 상황은 바로 앞 자신의 발 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벗어날 수 없다. 남의 일이 아닌 자신과 관계된 일로 다가와 있기 때문이다.

문득 열심히 무언가를 외우던 학생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무엇이 되려고 저렇듯 열심히 하는가? 표정에서 희망적인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보인다.

'고등학교에서 상위권 성적 유지하면 중상위권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겠지. 그러면 원하는 기업에서 나를 고생했다고 불러주겠지. 원하는 이성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어.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하겠지? 돈도 잘 벌고 학벌도 좋고 하니 나는 성공한 사람이 될 거야. 나의 길은 탄탄대로지. 그때까지만 참자!'

이렇게 해서 성공하면 또한 세류에 편승하겠지? 내 편 네 편 프레임에 갇히게 되고 이쪽 이익을 챙겨주던지 저쪽 이익을 챙겨주다 보면 언젠가 운이 없으면 감방에도 갈 수 있겠지? 누군가의 혜택은 시간이 지나면 또 누군가에게는 해당 행위가 되고 이렇게 불행의 씨앗이 뿌려지는 풍토로 우리 희망의 군대들은 진군하겠지?

아담 스미스(1723~1790). 글래스고에서 행한 강의를 일부 반영한 '도덕감정론'을 1759년에 출간했다. 그는 이 책을 평생에 걸쳐 개정했고 1790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최종판(6판)이 나왔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을 사실상 처음 거론한 것도, 사람들이 각자의 이익에 따라 행동할 때 사회를 분명히 이롭게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도덕감정론'에서였다.(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아담 스미스(1723~1790). 글래스고에서 행한 강의를 일부 반영한 '도덕감정론'을 1759년에 출간했다. 그는 이 책을 평생에 걸쳐 개정했고 1790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최종판(6판)이 나왔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을 사실상 처음 거론한 것도, 사람들이 각자의 이익에 따라 행동할 때 사회를 분명히 이롭게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도덕감정론'에서였다.(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아담 스미스를 만나다

최근 아담 스미스(1723~1790)의 ‘국부론’과 ‘도덕 감정론’을 접하게 되었다. 아담 스미스의 교육 과정을 보면 도덕적 감정을 어찌 그리 세세하게 분석하여 잘 펼쳐놓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도 있을 듯싶다.

그는 18세기 영국 글래스고우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옥스퍼드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그 과정에서 도덕 철학자 허치슨의 영향을 받았고 고대철학, 과학사, 사회 진화, 문학, 역사, 인접 사회과학 관련 광범위한 독서를 했다.

또한 이 두 대학에서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교육을 받았다. 신망과 존경을 받으며 글래스고우 대학에서 논리학을 나중에는 도덕철학을 가르쳤다. 그의 나이 36세에 그동안의 강의내용을 바탕으로 ‘도덕 감정론’이 출간되었다.

‘도덕 감정론’ 제3편 제3장에는 부자와 권세가들,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차별적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사람들은 부자와 권세가에 대해서는 감탄하고 숭배하기까지 하지만 가난하고 비천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경멸하거나 무시한다고 한다. 무시하는 성향은 계급차별과 사회질서의 확립 및 유지에 필요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든 도덕 감정을 타락시키는 가장 크고 보편적 원인을 제공한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우리는 지혜와 미덕(美德)에만 존경과 감탄을 보내야 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기본 양심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스미스는 지혜와 미덕에 바쳐져야 할 존경과 감탄이 부(富)와 권세를 가진 자에게 가고 오히려 부도덕한 행위와 우둔함에 가해져야 할 멸시(蔑視)가 극히 부당하게도 흔히 빈궁과 연약한 자들에게 가해지고 있다고 했다.

인간의 속성은 우리가 그럴 것이라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움직인다. 그것은 감정에 의하여 기울어지는데 이를테면 우리가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경멸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지혜와 미덕만이 존경의 유일한 대상이 결코 아니며, 부도덕한 행위와 우둔함만이 경멸의 유일한 대상이 결코 아님을 스미스는 지적했다.

세상 사람들의 존경과 관심은 지혜로운 사람과 유덕한 사람에게 향하기보다는 부자와 권세가들에게 더욱 강하게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고, 존경을 획득하고, 사람들의 존경과 감탄을 즐기려는 것은 야심(野心)과 경쟁심(競爭心)의 위대한 목적이라고 분명히 했다.

성격적인 측면에서 부와 권세는 교만한 야심과 적나라한 탐욕이며, 색채가 천박하게 화려하면서 번쩍번쩍 빛나는 것이고 두리번거리면서 헤매고 다니는 눈들의 관심을 끄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절대다수의 대중들은 부와 권세에 대한 찬미자이고 숭배자들이라고 표현했다.

이에 반해, 빈궁과 연약함은 소박한 겸허와 공정한 정의이며 외형이 더욱 적정하고 더욱 우아하게 아름다운 것이고, 가장 진지하게 배우려고 세심하게 관찰하는 사람들의 관심만을 끄는 것일 뿐만 아니라 소수의 진실하고 꾸준한 지혜와 미덕의 찬미자, 즉 선택된 자들로 대조시키고 있다.

학생들에게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물으면 이구동성으로 '돈 많은 사람'이라 한다. “어떻게 돈을 벌 건데?”라고 물으면 “장사를 할 거예요”, “국회의원 할 거예요”, “CEO 할 거예요”라고 망설임 없이 말한다.

이 세상이 돈만 있으면 잘 살 수 있다는 그들의 방식에 반기를 들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뿐이랴? 인생이, 삶이 돈만 있으면 잘 산다면 로또 맞은 사람이 왜 거지가 되어 떠도는가? 왜 돈이 많은 사람들도 자살을 시도하겠는가?

교육 문제, 결국 '동전의 양면'

헤르바르트(1776~1841). 스승인 페스탈로치(Johann H. Pestalozzi)의 민주주의적 원리를 이어받은 그의 교육학에 있어서, 실험 심리학적 요소는 긍정적인 의미가 있지만, 사회 정치적 견해는 반동적이어서 입헌군주제를 거부하고, 민중의 최대의 미덕은 지배계급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교육학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쳐 헤르바르트 학파가 형성되었다.(출처=네이버 지식백과)
헤르바르트(1776~1841). 스승인 페스탈로치(Johann H. Pestalozzi)의 민주주의적 원리를 이어받은 그의 교육학에 있어서, 실험 심리학적 요소는 긍정적인 의미가 있지만, 사회 정치적 견해는 반동적이어서 입헌군주제를 거부하고, 민중의 최대의 미덕은 지배계급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교육학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쳐 헤르바르트 학파가 형성되었다.(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최근 교육관련 뉴스가 논란의 중심에 있다. 국정교과서 조작과 상산고의 자사고 재지정 실패가 그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자식 교육을 고민한 학부모들에겐 한번쯤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던 상산고의 자사고 재지정이 사실상 취소되자 찬성과 반대의견이 강하게 대립하고 있다.

재지정을 취소한 해당 지역 교육감은 불필요하게 사교육을 조장한다는 입장인 반면 그 학교 졸업생이나 재학생들은 교사의 교육 능력과 노력으로 학습력이 강화되어 오히려 사교육이 필요없다고 항변한다.

이 문제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우리는 본질을 꿰뚫기 위하여 고전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교육 고전가로서 교육이론을 최초로 체계화시킨 헤르바르트(J.F.Herbart 1776~1841)에 의하면 교육의 최고 목적은 도덕성 실현에 있다. 도덕성은 인간 삶의 궁극적 최고의 목적으로 통찰과 의지 그리고 의지에 대한 순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떻게 통찰과 자율적 의지를 형성할 수 있는가?

헤르바르트는 교육을 통하여 학습자가 올바른 판단 능력을 형성하고 선한 의지를 획득할 수 있으며, 그 통로가 바로 ‘다면적 관심’의 형성이라고 했다. 다면적 관심을 소유한 자만이 적극적 사고와 행위를 바탕으로 올바른 판단과 의지를 형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헤르바르트, 김창환, 2002)

헤르바르트는 또한 교육이 국가 기능화하는 것에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한다.

첫째, 교육의 대상인 성장세대들의 개인성과 독특성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문제이다.

둘째, 다양성을 촉진하기보다는 획일화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셋째, 국가가 운영하는 학교는 조직적이고 제도적인 강요 때문에 수업의 과제를 단지 지식전달로 축소하는 문제가 있다.

게다가 교육 외적인 동기에 의해서 교육개혁이 논의되고 실천될 때, 교육이 본래의 과제를 수행할 수 없으며 사회·정치적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전락 될 수 있음을 제기한다. 결국, 모든 사회 영역이 그 고유한 법칙에 따라 움직이듯이 교육도 고유한 법칙에 따라 운영될 때 제 구실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교육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교육기관으로서의 학교 개혁의 방향은 학교와 교육을 다양화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교육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다면적이고 다양한 수업만이 다양한 재능과 소질을 가진 성장세대에게 옳은 것이라고 보고, 다면적으로 교육하는 학교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학교에 대한 국가의 행정과 감독은 자유롭고 독자적이고, 다면적인 교육실천을 방해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보장하고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교가 국가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면 국가는 학교 내의 교육활동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또 교육적인 수업을 실현하기 위하여 교사의 역할을 강조한다. 교사는 구체적 교육현장에서 활동하며 교육의 변화에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자기 비판적이고 책임 있는 교육자이길 강조한다.

18세기 독일의 교육자로서 교육이 국가 기능화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헤르바르트의 주장은 그 배경이나 성격 면에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을지라도 이 시대에도 여전히 많은 시사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미지=픽사베이)
(이미지=픽사베이)

동류의식(同類意識: fellow-feeling), 동감(同感: sympathy)

우리가 어떤 문제를 다루며 내 편, 네 편을 가르게 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동류의식 혹은 동감이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같은 기준 혹은 가치관으로 접근할 수 있으며 같은 감정을 공유할 수 있음으로 인하여 ‘우리’ 안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반면에 다른 기준과 가치관으로 접근 될 소지가 있는 사람들과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경계를 하게 된다.

아담 스미스는 ‘인간의 심리는 각종 강렬한 감정의 영향을 쉽게 받으므로, 옆에서 바라보는 사람의 정서(情緖)는 언제나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통해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감정이 그러할 것이라고 그가 상상하는 감정과 일치한다’고 했다.

특히 ‘인류가 이승에서 직면하는 모든 파멸적인 재난(災難)들 중에서, 최소한 한 조각의 인간성이라도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사고능력(思考能力)의 상실, 즉 광인(狂人)이 되는 것이 가장 두려운 재난인 것으로 보인다’는 글이 이 시대에 특별히 생동감 있게 와 닿는다.

하나의 사물 혹은 사실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다. 변하지 않는 본질을 보지 못하고 표상만을 추구할 때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만 사물을 보게 된다.

오늘날의 사회가 그렇다. 본질을 외면하고 표상만 가지고 노랗다, 빨갛다, 파랗다 주장한다. 사회 지도층에서 더욱 심하게 부각하는 모양새이다.

국민을 어떻게 이끌어가고 있는가? 교육을 어떻게 시키고 있는가?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본질을 파악하고 인간 본연의 삶의 목적을 안정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문화 풍토 조성이 시급해 보인다.

이순옥 경기 안양 동안고 진로진학상담교사
이순옥 경기 안양 동안고 진로진학상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