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원 실천교육교사모임 고문

(사진=ytn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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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듀인뉴스] 언젯적인지 특정할 수 없는 과거의 일이다. 어쨌든 지금보다 훨씬 혈기왕성한 나이였는데, 당시 정권은 실용주의를 빙자하여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폄하를 일삼고 있었다. 나는 여기에 대한 반발로 일제강점기때 여러 우국지사들의 투쟁을 더 열심히 가르쳐 주었다. 임진왜란을 소재로 자료집이나 가상 다큐멘터리 등을 제작하는 수업도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했다.

그러던 중 2학기 학부모 총회가 열렸다. 보직교사를 맡고 있어서 강당 입구에서 학부모를 영접하고 방명록을 안내했다.

그 분은 그다지 눈에 띄는 편은 아니었다. 약간 마른 몸매에 중학교 학부모 치고는 조금 나이가 많아 보였으며, 수수한 차림에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냥 어디 가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아주머니였다.

그런데 방명록에 아주 반듯하고 정갈한 한글로 -나보다 훨씬 잘썼다- 이름을 쓰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의 이름은 노리코 였다. 혹시나 싶어 자녀 이름을 뭐라 쓰는지 보았더니, 내가 가르치는 아이였다.

그날 밤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수업을 복기해야 했다. 혹시 내가 그 반에서 ‘왜놈’, ‘쪽바리’ 이런 말을 뱉은 적이 있었나?  아무래도 있었던 것 같아 불편했다.

적어도 그런 말 안하려고 의식적으로 신경썼던 기억은 없었다. 설사 운이 좋아 내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발표하는 학생들은 거리낌 없이 그런 말을 썼고, 나 역시 암묵적으로 거기 동조했다.

그날 이후 일본과 관련된 역사적 쟁점을 다룰때 마다 과거의 사실이 현재의 관계를 결정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가령 그들의 침략을 다루고, 그들의 만행을 다루더라도, 이를 감정을 배제한 객관적인 사실로 다루고, 형용사나 부사는 사용하지 않았다. 또 그 책임 소재를 일본이라는 민족에게서 찾는 대신 어떻게 소수의 세력이 1억을 집단 광기로 몰고갈수 있었는지 생각하게 하였다.

민족에는 선악이 없다. 상황에 따라 어떤 민족도 악마적 광기에 빠져들수 있다는 생각에 반일 교육이 아니라 반일제 교육이 되도록 한 것이다. 제국주의를 청산하는 교육은 다른 민족과 우리 민족을 악과 선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능력과 상상력을 길러주어 적어도 우리 민족 만큼은 그런 악마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혹자는 뭘 그렇게까지 걱정하냐고 말할지 모르겠다. 일본에서 자이니치 학생들이 얼마나 따돌림 당하는지 아느냐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따돌림은 피해자 뿐 아니라 가해자의 영혼도 파괴하는 공멸의 길이다. 그러니 그들이 그랬으면, 우리도 그래야 하나 되물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똑같이 영혼이 파괴되는 가해자의 심리를 가져야 하느냐고 되물어야 한다. 나는 그럴 생각 없다.

요즘 한일관계가 어렵다. 여기서 잘잘못을 가릴 생각은 없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어떤 일방적인 입장을 설파하고, 불매운동을 독려하는 따위의 행동을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하고 싶지도 않다. 보이텔스바흐 협약은 특정 나라와 얽힌 문제에서만 예외가 되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교육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걱정 해야 한다. 

예민한 아동, 청소년이 그저 ‘혐오’ 감정에 휩쓸리지나 않을지에 대한 걱정, ‘국가’나 ‘민족’에 대한 몰입이 자칫 개인의 가치를 집단에 종속시키는 전체주의 운동의 연료가 되지나 않을지에 대한 걱정, 그리고 1만3000명이 넘는, 중국, 베트남 다음으로 많은 일본 다문화 학생들이 개학하면 학교에 어떻게 적응할지에 대한 걱정이다.

다음은 수업을 구상해야 한다. 생각하는 수업. 느끼는 수업. 상황이 요구할 경우 싸울수도 있지만, 싸우면서도 상대 나라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수업. 일단 누군가를 혐오하는 경험을 하기 시작하면 두번째 세번째는 쉽다.

만약 혐오의 대상이 되는 나라나 민족이 없으면 그 칼날은 우리 안의 약자나 소수자를 향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혐오가 자라게 해서는 안된다. 그런 수업을 고민해야 한다.

혐오는 추하다. 혐오는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실패자의 정서다. 스스로 미래를 개척해 나갈 의지도 능력도 없는 사람이 자신의 실패를 정당화할 핑곗거리를 외부의 악당으로부터 찾는 한심한 정서다.

일본에 혐한이 퍼지고 있다고? 그러라고 하자. 그건 그만큼 그들이 절박하고 여유가 없다는 뜻이니 말이다. 한때 우리를 침략하고 지배했던 나라가 우리를 보며 절박하고 여유없게 느낀다면 그거야 말로 최고의 복수이며 보상이 아니겠는가?

이미 우리나라는 여러가지 요소를 종합한 국력이 세계 10위 안에 들어가는 나라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시절의 조선이 아니다. 오히려 그 시절을 다루는 역사책에 자주 나오는 ‘세계 열강’에 가깝다.

교육 역시 바뀐 우리나라의 위상, 그리고 앞으로 학생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을 반영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당했다” 서사에서 “우리는 저러지 말자”로 진화해야 한다.

(사진=tvn 캡처)

제국주의 침략은 우리가 당했기 때문에 나쁜 것, 일본이 침략자라서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나쁜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침략하고 일본이 당하더라도 나쁜 것이다.

우리 교육의 목표는 만약 우리나라가 국력이 욱일승천하여 일본이나 중국을 정복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열광하는 대신 단호히 반대의 목소리를 낼수 있는 민주시민을 기르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일제강점기를 극복하는 교육이다.

일본은 한창 자기들의 힘이 솟구쳐 오르던 시절, 여기에 실패했다. 1942년, 일본군이 자그마치 대영 제국을 격파하여 9만명을 포로로 잡고, 말레이지아, 싱가포르를 함락했을때 “덴노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선전 영상물 앞에서 열광했던 일본인들 중 3년 뒤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되고 400만명이라는 엄청난 인명 손실과 파멸을 생각했던 사람은 소수였다. 그 마저도 두려워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일본이 우경화 된다는 것은 그 길을 다시 갈 위험에 처해 있다는 뜻이다. 그 위험을 느끼고 경고하는 일본인들도 있지만 그 수가 많지 않다.

우리 아이들이 그들을 구해줄 수 있는 어른으로 자라도록 하자.

만약 일제 강점기의 만행에 대해 보복하고자 한다면, 이 보다 더 아름다운 복수는 없다. 만약 일본의 교과서가 전체주의가, 맹목적 국수주의가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것인지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우리 아이들이 배워서 가르쳐 주게 하자. 그게 바로 일제에 대한 가장 명예로운 응징이다. 이 모든 것이 교육을 요구한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까닭은 일본과 관련된 언짢은 일이 일어날때 마다 늘 두 일본인을 떠올리기 떄문이다.

그럼 가슴이 차갑게 가라앉으며 머리가 움직인다. 한 사람은 앞 서 말한 노리코 상이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수십년 전에 세상을 떠난 어느 일본 대학생이다. 그는 재학 중 징집당해,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기고 태평양 어딘가에서 원혼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새벽이다. 밤 3시다. 오전 3시다. 아아! 죽고 싶지 않다. 외롭다. 왜 이리 외로운 걸까."

다짐한다. 나는 우리 나라를 저 보다는 훨씬 나은 나라로 만들어 보이겠다고. 그런 한국인들을 키워내겠다고.

권재원 실천교육교사모임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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