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석 분당중앙고등학교 교사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에듀인뉴스] 18년째 고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나에게는 특이한 공훈이 하나 있다. 바로 ‘수준별 수업 유공교원’이다.

2008년 무렵 수준 차에서 발생하는 비효율성을 없애고 수준에 맞는 수업방법을 통해 학습자들을 더 높은 수준에 이르도록 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전문가들의 이론을 신념으로 받아들여, 나는 상 수준의 학생들을 맡아 의욕적으로 1년간 지도했다. 

"수업에 방해되는 애들이 없으니 수업진도도 빠르고, 잘하는 애들끼리 있어서 왠지 의욕도 더 생겨요!" 

그야말로 대만족을 외치는 '상' 수준 아이들 모습에 나또한 '능력 있는 교사가 아닌가'하며 가져본 효능감은 이듬해 '하' 수준의 학생들을 맡게 되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당시에는 외부 강사들에게 하 수준 그룹을 맡기는 관행도 있었지만, 나는 자원해 하 수준 그룹을 맡아 수업해보기로 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아직도 첫 시간의 그 침울하게 눌린 아이들의 눈빛을 기억한다. 직전 학기 낮은 성적으로 떠 밀려 온 아이들... 

누구도 그 아이들을 하 수준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음에도(당시엔 A반이라고 칭함) 그 아이들은 학교가 자신들에게 붙여준 정체성을 너무나 잘 인지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수면 아래 숨겨져 일부분이라고 치부해왔던 소수 아이들의 비협조적, 반사회적 정서들이 수업의 주류문화가 되어서 나의 수업진행을 50분 내내 압박했고, 나의 교권은 아이들의 이유를 모를 분노로 종종 생채기가 나곤 했다. 

그래도 젊은 교사 특유의 오기 반에 애정 반을 섞어 아이들을 열심히 지도했다. 그런데 곧 흥미로운 현상이 관찰되기 시작했다. 그들도 적응을 하고 있었다. 한 학기가 지나자 하 수준 아이들도 그들의 ‘하’ 교실 안에서 안락함을 즐겼다. 

“선생님, 공부 잘한다고 잘난척하는 애들 안보이니 여기가 더 편안해요.” “선생님이 크게 기대를 안 하시니 우리도 좋아요.”  

당시 아이들의 학력이 향상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성적을 기준으로 아이들을 분리한 일은 학습의 영역 이외에 잠재적 교육과정 영역에서 또 다른 효과들을 낳는다는 것을 목격했다. 

돌이켜 보면, 당시 우리는 학교라는 사회를 놓고 작은 실험을 벌였고, 발견한 사실은 그 안의 구성원들을 성적이라는 기준으로 계층화시키고 이를 합리화해 적응토록 한 것에 제법 성과를 얻었다는 것이었다.

전북 자율형사립고 교내 게시판에 공개된 `2019년 대학 입학 현황'. (사진=사교육걱정없는세상)<br>
전북 자율형사립고 교내 게시판에 공개된 `2019년 대학 입학 현황'. (사진=사교육걱정없는세상)

“오로지 의대 진학을 목표로 모인 획일화된 학생들의 공간 상산고에서는 다양성은커녕 학벌주의와 대입에 찌든 경쟁적 사고만이 가득했습니다. 그 공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경쟁과 대입압박에 상처받고 패배감을 느끼는 것은 대다수 학생들에게 일상이었습니다.” 

“혹자들은 이런 분리형 교육을 통해 특성화된 교육과 인재양성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실상은 극대화된 EBS 풀기 교육인 '수능교육'입니다.” 

“자사고와 특목고의 특성화 교육은 획일화되고 편협한 입시 '기계'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10년이 지난 최근 ‘상산고의 의대사관학교’ 논란과 다수 자사고의 ‘학벌주의와 경쟁만능주의에 찌든 특권층 교육’이라는 연이은 언론의 폭로는 나의 그 옛날 수준별 수업에 대한 싸늘한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사실 나는 자사고에 대해 회의론을 품은 교사는 아니었다. 이명박 정부가 2008년 당시 전국의 수십 개 학교들의 자율형 사립고 지정을 의욕적으로 추진할 무렵, 나는 다가올 새로운 변화에 가슴이 뛰었었다. 

“와! 우리나라도 드디어 미국의 필립스 엑스터 아카데미, 초우트 로즈메리 홀과 같은 명문 사립고등학교를 갖게 되는 것인가?”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협력하는 수업을 실현하기 위해 필립스 엑스터 아카데미가 도입한 하크니스 테이블(Harkness Table). ​사진=필립스 엑스터 아카데미 홈페이지 캡처
미국의 명문 사립학교 학생들은 정규수업시간에 버금가는 시간을 동아리, 스포츠, 봉사 등 다양한 정규 외 교육과정에 할애해야 한다. 사진은 서로 의견을 나누고 협력하는 수업 실현을 위해 필립스 엑스터 아카데미가 도입한 Harkness Table. (​사진=필립스 엑스터 아카데미 홈페이지 캡처)

특히 우리 교육 영역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학에 보장한 다양성과 자율성이 공립학교에도 새로운 혁신교육의 모델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들게 했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볼 시간이 되었다. 10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게다가 상산고를 비롯한 일부 자율형 사립고들이 2008년 이전부터 자립형 사립고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들에게는 상당한 변혁의 시간과 기획가 주어졌다. 

하지만 우리의 기대는 실망으로 돌아오고 있다. 위와 같은 졸업생 폭로가 사실이라면, 그들은 우리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길을 그동안 가고 있던 것이다. 그들이 택한 길은 의대나 명문대 진학에 필요한 시험에 대비해 훈련을 시켜주는 것에 그친 것이다. 거기서 수요자들은 개인적 욕망을 채우고, 학교는 명문 사학의 영예를 얻는다는 암묵적 계약서를 서로 품에 넣고 말이다. 

도입 시기 자사고들은 교육과정 운영의 자율성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이번 평가에서 드러난 대부분의 자사고의 교육과정은 미래사회를 대비한 다양성과 창의성을 함양하는 다양한 교육과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학생들의 흥미와 진로에 맞는 다양한 교과 교육과 비교과 교육활동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미국의 명문 사학들의 모델을 따르기는커녕 오히려 일반고보다도 못한 수준이었다.

대신 그들은 교육과정 운영의 재량권을 수능 대비에 유리한 일부 교과를 집중 편성하는 데 소모하였다. 이렇게 드러난 부분은 대개 학교가 표면적으로 작성한 문서들을 놓고 파악된 것이기 때문에, 실제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학교운영과 교육 활동들에 비교하면 빙산의 일각일 수도 있다.

더 이상 기억하기 싫지만, 우리는 학교가 교육의 본질적인 기능과 책무성을 잃고 명문대 진학률 높이기에 맹목적으로 질주할 때 생기는 병폐들을 학창 시절 경험했고 여전히 뉴스기사에서 목격하며 경악한다. 

오로지 암기와 문제풀이 훈련이 반복되는 주입식 수업, 학급회의와 동아리활동은 학교교육 계획서에만 존재하며 수능 대비 자습으로 메워지고, 심지어 음악, 미술, 체육 수업에도 국영수 공부가 아무렇지도 않게 침범하며, 수업이 끝난 후에는 학생의 진로에 맞춘 다양한 방과후 프로그램 대신 수능 문제풀이를 위한 보충수업이 이어지고, 늦은 밤까지 기숙사 책상 앞에 문제집을 쌓아놓고 문제풀이 훈련을 반복하는 자율학습이 이어진다. 

학교는 어차피 개인의 욕구를 채우고 학교의 명예를 높이는 것이 지상과제이기 때문에 수시로 진학할 소수를 위해 평가와 기록에 있어 차별과 편법을 꾸미고 정시로 진학할 다수를 위해 수능 문제풀이 수업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 만일 다수의 자사고가 이런 전근대적 교육으로의 회귀를 택한 것이라면, 자사고에 대한 회의론은 상당한 설득력을 얻는다. 

흥미로운 점은 자사고나 특목고 학생과 학부모들은 이런 극심한 경쟁 환경에서도 극히 높은 만족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좋은 학교를 왜 없애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물론 겉으로 보기에 좋은 학교가 맞다. 나의 수준별 수업의 ‘상’ 교실에서처럼 이런 곳에서는 생활문제가 거의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학생들은 일탈하지 않으며, 온순한 양처럼 규율에 순종한다. 

학부모들은 모두 학교를 향해 뜨거운 신뢰를 보낸다. 만일 그들이 같은 목표를 추구하며 모인 집단이며, 실제로 그곳에서 목표가 이루어짐을 그들이 목격해, 학교가 이런 개인적 욕구들을 채워줄 것이라고, 그들이 신념으로 믿는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러한 맹목적 순응과 숭배 현상은 매우 쉽게 이해가 된다. 

사회적 공공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지난 10년 간 자사고는 고등학교의 생태계를 교란하는 외래종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파급력은 중학교를 넘어 초등학교 영역까지 침범하고 있다. 

그동안 자사고는 명문대 입학의 유리한 고지라는 점을 호소, 전국의 우수한 학생들을 독점해 왔다. 여기에 우선선발이라는 블랙홀은 그러한 자사고의 파괴력을 배가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자사고 입학준비에 국영수 선행학습에 매진하고 그 수요로 인해 엄청난 사교육 시장이 형성됐다.

그 반대편 일반고에서는 의욕적 에너지를 가져다줄 우수한 학생들이 오지 않으면서 많은 교사들이 교육 활동과 생활교육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정확히 내가 수준별 수업 ‘하’ 교실에서 겪었던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그런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교육받은 아이들의 삶과 그 아이들이 바꾸게 될 사회의 모습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곳에서 아이들이 극심한 경쟁과 압박에 상처받고 열등감을 느끼며, 학벌이 가장 강력한 덕목이라고 배우고, 획일화되고 편협한 입시 기계로 양성되고 있다면, 그리고 그런 곳에서 성취한 경험을 마치 사회 정의의 메커니즘이 실현된 것이라고 착각한다면, 그리고 그런 그들이 장래 사회에서 더 큰 기회와 지위를 부여받아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가치를 강요하고 그런 문화를 자신의 조직에 이식한다면, 그로 인한 결과는 많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끼치게 되며, 사회는 그렇게 변질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사고의 모습이 우리 교육현장의 주체들이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할 모범적 학교의 모델이라고 인식하고 따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하나의 기준으로 아이들을 경쟁시키고, 평가하고, 보상하는 교육은 지양되어야 한다. 아이들을 나눈다면 그것은 성적이나 사회경제적 배경이 아닌 아이들의 개성과 적성이어야 한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 도입 초기에 우리가 기대했던 다양성은 현재 자사고의 모습이 아니었다.

눈을 돌려 세상을 보면, 우리에게 수준별 수업은 늘 존재했던 것 같다. 교실 밖에서도, 우리는 학교들을 국영수 점수로 분리하는 작업에 열중했다. 꼴통들이 가는 학교, 그저 그런 학교, 공부 잘하는 명문고,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자사고와 특목고가 서있다.

이호석 분당중앙고 교사
이호석 분당중앙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