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은 끝이 나고 고3들은 방황 중이다.

현행 우리의 학사일정으로는 고3들도 겨울방학을 하기 전까지 학교에 출석을 해야 한다. 그 외 각종 외부 행사나 체육대회, 혹은 입시설명회, 공연 등으로 어찌 보면 더 바쁜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교사들은 교사들대로 어른과 아이의 어정쩡한 경계에서 시간 죽이기(?)에 여념이 없는 고3들의 생활지도나 학교 수업 진행과 관련하여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러다보니 지금 이 시기의 많은 고3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시청각 교육(?)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학년말 업무 처리나 입시 상담으로 바쁜 교사들의 대안이 될 때도 있음은 물론이다. 모든 교사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영화 <카트> 2년만 아르바이트를 계속하면 정규직으로 채용해야 하는 부담 때문에 그 비정규직 직원들을 잘라야 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문제는 그 시청각 자료들이 엄선되지 않은 채, 쉽게 구해지는 영화라는 이유만으로 학생들에게 주어질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이다. 최근 p2p 서비스로 겁 없이(?) 영화를 구해서 보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에 좋은 영화를 '구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구해지는’ 영화를 보는 것이다. 예전처럼 '비디오’를 구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파일로 주어지는 영화이어야만 하다 보니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간혹은 의도적인 계산에 의해 제공되는 영화도 있기는 있을 테다.

그저 평범한 대형마트 직원 가정의 이야기. 아이들을 키우며 할인마트에 가서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번 돈으로 어렵지만 화목하게 하하 호호 살아가는 우리 동네 아줌마 이야기. 서서히 영화는 2년만 아르바이트를 계속하면 정규직으로 채용해야 하는 부담 때문에 그 비정규직 직원들을 잘라야 하는 이야기로 급선회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과 투쟁. 그 와중에 아주 야비하게 생겨서는 어려운 '우리들의’ 비정규직 동네 아줌마를 무자비하게 자르고 심지어 구타까지 서슴지 않는 무지막지한 사측과 그 행동대원들이 이내 등장하고. 잘 알려진 영화 카트의 한 대목이다. 아이들은 눈망울을 고정시키고 영화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 영화뿐이겠는가. 그런 류의 영화는 속속 이어지고 있고, 회사와 노동자의 대결구도로 점철된 이야기들이 고3의 '시청각 교실’에 밀려들어오는 시즌인 것이다. 온갖 영화들 중 '거대기업 대 노동자’라는 대결구도 만큼 영화를 감동적이고 선동적으로 만들 수 있는 소재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자극적이고 감성적이다.

'또 하나의 약속’을 보고 있노라면 거대한 공룡같은 기업 앞에 힘도 없이 나약한 한 개인의 처절함 탓에 절망을 넘어 분노에 이르게 되어 있다. 이와 유사한 다큐멘터리 영화인 '탐욕의 제국’도 있다. 영화 탐욕의 제국은 붙여놓은 영문제목이 'The Empire of Shame’이다. 수치스러운 제국이다. 인간의 가치를 값없이 알며 온갖 산업재해로 내몬 기업은 덩치만 컸지 아주 수치스러운, 우리나라 기업들의 민낯이라고 공언이라도 하는 듯하다.

또 요즘 들어 티비 종편에도 이런 드라마가 재미(?)를 몰아가며 방영 중인데, 웹툰이 먼저 인기를 끌었었고 그 원작을 토대로 만든 '송곳’이라나 뭐라나. 이러한 드라마에는 하나같이 '평범’하거나 턱없이 미미한 '약자’들이 등장하고 지극히 인간적이고 당연한 권리를 주장했다는 것만으로 밟히고 무너져야 하는 상황이 묘사되어, 한 걸음 물러서서 보는 보통 사람의 가슴에 울분을 불러일으키고 공감대를 형성하며 심지어 전의를 느끼게 하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카트와 송곳, 또 하나의 약속’이 모인 세상에서 말해주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이 영화에 묘사된 것들이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 나타난 사실들 역시 우리 사회의 전부가 아닌 한 '단면’임을 말해주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면면을 알아감과 동시에 우리의 노동문제가 과거 전태일을 분신으로 몰고 갔던 참혹한 현장과는 정말 다르게 변모하고 진화하고 있음도 이야기해 주어야 함에도 그 사실에 침묵한다. 과거 '공순이와 공돌이’들이 모여 있던 그 구로공단보다 지금의 노동 현장은 나아지고 있음을, 그리고 앞으로는 더 나아질 것임을 말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저렇게 치열한 노동투쟁의 이면에는 사실 노사 갈등보다 더 심각한 또 다른 공룡인 노조와 노동자, 즉 노노갈등이 똬리를 틀고 있음을 그래서 이것이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심각한 노동문제의 축임을 결코 보여주지 않고 있음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다. 산업재해로 고통당하는 우리 이웃을 외면하는 기업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맞고, 민사상 배상 혹은 형사상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저러한 산업재해가 마치 기업의 원죄라도 되는 듯 표현하여, 공룡이 괴멸되듯 대기업이 사라지고 노동자 천국이 되어야 할 것처럼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것이 답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되묻고 싶다.

노동현장의 여건은 꾸준히 개선되었으며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고 앞으로도 더욱 진화를 거듭할 것이다. 나아가 더 많은 기업들이 생기고 커짐으로써 더 좋은 일자리는 만들어질 것 이다. 그래야 노동자들의 삶의 질도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줄 수 있다.

이 땅의 대기업은 산업재해만 유발하는 악당이며 무책임하다는 고정관념만을 되뇌어서 이 세상이 온통 흑 빛 어둠으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자조하지 않도록 우리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기업들은 사회적 기여도 하고 있고 기업의 이미지 마케팅을 위한 다양한 사회활동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늘 그런 미담(?) 보다는 부정적인 이야기가 훨씬 강력하게 기업의 옆구리를 강타한다. 좋다. 그러면 우리의 노트북과 스마트 폰은 누가 만들어야 옳은가. 우리의 반도체는 누가 만들어야 하며 어디서 사와야 하는가. 우리나라 노동자 말고 제3국 노동자 이어야 한다면, 그들은 재해에 내몰려도 되고 우리만 아니면 된다는 것인가.

또 국제무역으로 충당해야 한다면 그 때는 무슨 돈으로 사올 것인가! 공동체 혹은 노동조합 수준의 기업이 과연 국제 수준의 첨단 기업과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어야 하는 기업을 일으켜 국제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말할 자신이 있는가? 마이크로 소프트 같은, 애플 같은, 보잉사 같은 기업이 그렇게나 '아름다운’ 기업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면 왜 그들 기업은 협동조합이나 공동체의 외면이 아닌 거대 기업을 이루고 있으며, 어마어마한 규모와 위용을 가진 기업이 되어 활동하고 있는지 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기업이 인류 최대의 발명품 중 하나며, 이 기업에게는 모든 세상 이치가 그렇듯 빛과 그림자가 있고 우리는 다 함께 노력하여 그 어둠의 영역을 좁히고 그 음영의 차이를 좁혀 나가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러기위해 교사의 임장지도는 필수이며 영화를 고르는 기준도 '균형’을 지향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보고 생각하고 말하게 해야 한다! 그 생각과 말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다. 학생들끼리 모여 감성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에만 길들여지게 방치한 채, 한 단 면만을 보도록 외눈박이로 기른다면 다면적으로 깊이 사고를 하는 인격체는 길러지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은 아직은 교실에서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단계에 따라 자율성을 배워야 하며 근면성과 열등감과 정체성을 배워야한다. 사회를 제대로 배우고 익히기도 전에 가슴만 달구어진다면 '프롤레타리아 레볼루션’을 가슴에 달고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는 철부지만 양산할 뿐인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을 거리로 내몬 것은 다 우리 교사 탓이다. 우리 아이들이 '카트와 송곳, 또 하나의 약속’을 보고 가슴이 뜨거워 질 때 우리 교사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교사라면 너나없이 뼈저리게 반성하고 반성문을 써야한다.

 

조윤희 | 부산 금성고 교사

 

*이 글은 필자와 자유경제원의 동의 아래 게재하는 것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