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우 경북혁신교육연구소공감 이사

아버지의 학교 참여가 늘면서 '좋은 아버지회'라는 단체가 설립돼 진로교육 등의 학교 행사를 함께 펼치고 있다.(이미지=교육부 블로그)
아버지의 학교 참여가 늘면서 '좋은 아버지회'라는 단체가 설립돼 진로교육 등의 학교 행사를 함께 펼치고 있다.(이미지=교육부 블로그)

[에듀인뉴스] 얼마 전에 타 지역에 계시는 페이스북 벗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교육문제에 관심이 많은 중학생 자녀를 둔 아버지였다. 우리는 가끔씩 전화로 교육 관련 대화를 나누며 신뢰와 우정을 쌓아가고 있는데, 이 날은 내게 교육상담을 요청하셨다. 학교에서 아버지들을 위한 모임을 주선하는데 참여할지 망설여진다고 하셨다. 나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부추겼다.

지난 글에서 교사와 학부모 사이의 불신으로 인해 학교교육이 무너져가고 있다고 했다. 이 글에서는 그 불신의 벽을 허물기 위한 한 방편으로 아버지가 학교교육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제안하고자 한다.

왜 하필 아버지인가? 어머니는 안 된다는 말인가?

그런 뜻은 아니다. 학교교육을 살리기 위한 학부모 역할에 남녀 성별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그간 우리 학교현장에서 학부모의 활동이 부정적으로 인식된 것은 ‘치맛바람’으로 표상되듯이 여성의 탓으로 돌리기 쉽다. 하지만 아버지들의 학교교육에 대한 무관심과 무책임한 태도가 치맛바람을 낳았기 때문에 남성 또한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교사-학부모의 역학관계에서 교사가 갑이고 학부모는 을이었다. 그때도 아주 특이한 학부모가 소란을 일으키면 교사나 학교가 애를 먹긴 했지만, 갑질은 주로 교사의 몫이었다. 초등 현장에서 가장 흔한 갑질은 학모들을 불러 교실 청소를 시키는 것이었다. 이 시절 아이들 세계에선 엄마가 바빠서 학교에 드나들지 못하는 아이는 반장-부반장 선거에 나올 생각을 못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사실 이런 갑질 문화를 교사들이 보편적으로 즐긴 것은 아니다. 젊은 교사들을 비롯하여 이런 문화를 불편해 하는 교사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이 낡은 습속이 오래도록 이어져온 까닭은 학교 관리자들이 어머니회 조직을 이용하기 위해 치맛바람을 부추긴 측면이 크다.

형식적으로 어머니회는 학모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조직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관리자가 담임교사를 압박하고 교사들은 학급 어머니들에게 요청하여 반장-부반장 어머니들을 중심으로 조직되는 것이다. 이렇게 조직된 어머니회가 하는 일이라곤, 학교의 각종 행사에 동원되어 도우미 노릇을 하거나 찬조금을 갹출하여 학교에 바치는 것이 전부였다. 시범학교 운영보고회 때, 교직원 친목여행 때, 교무실 냉장고 따위를 구입할 때 어머니회 기금이 지출되곤 했다.

간단히, 이것은 학교에 의한 학부모 착취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금 같으면 관련자들이 모두 옷을 벗을 일이지만 그 시절엔 대부분 학교가 이렇게 흘러갔다.

‘치맛바람’이란 이 부조리한 메커니즘 속에서 자기 자녀의 이익을 위해 담임교사나 관리자들과 부적절한 외교관계를 펼치는 학모들의 행각을 말한다. 하지만, 치맛바람을 주도하는 학모들은 극소수일 뿐 많은 어머니는 자녀를 학교에 맡긴 죄로 그저 들러리를 설 뿐이었다. 이런 구조 하에서 학부모가 학교교육의 한 주체로서 바람직한 교육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이게 그렇게 돌아갔던 이유는 당시 학교(교사)-학부모의 역학관계가 일방적이었던 탓도 있지만, 학부모를 대표하는 집단의 구성원들이 연약한 여성, 즉 어머니들이 전부였던 탓이 크다. 도시의 학교에서는 아버지(父)와 어머니(母)가 섞인 학부모회는 좀처럼 없었고 어머니회가 전부였다. 여성들로만 구성된 어머니회는 노회한 관리자와 교사들에게 휘둘려 학교 측의 이해관계에 충실할 뿐, 전체 학부모들의 입장을 대변할 수는 없었다.

반면, 같은 시기 시골의 작은 학교에서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참여하는 학부모회가 활성화되어 있었다. 여기서는 치맛바람이 있을 수 없다. 촌락 공동체가 형성된 곳에서 개인적 이익을 위해 학교교육풍토를 해치는 행위를 하면 집단 내에서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씩씩한 아버지들이 참여하는 학부모회가 관리자들의 불선한 이해관계에 휘둘릴 일은 없고, 치맛바람이 없으니 학교 전체의 학부모들이 전체의 학생들을 위해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헌신했다.

학부모 공동체, 교사-학부모-학교 신뢰의 시작점

필자는 최근에도 학부모 공동체가 세워진 소규모 학교에 근무한 적이 있다. 이런 학교에서 접하는 가장 놀라운 현상은 학생 간의 다툼으로 인한 학부모 갈등을 잘 볼 수 없는 점이다. 이런 곳에선 ‘이것들이 감히 내 애를!’이라는 감정에 휩싸인 ‘앵그리 부모’가 잘 없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학부모 공동체 내에서 원만히 해결되어 학교로 불똥이 튈 염려가 없다.

그러니 교사들은 몰상식한 학부모로부터 고초를 겪을 위험 없이 학생 교육에 전념하게 되고, 이것은 다시 학부모들의 학교교육 만족으로 이어져 교사-학부모-학교 간에 신뢰 관계에 기초한 교육공동체가 경작되어 간다.

이처럼, 학부모 공동체가 형성되면 학교교육의 3주체인 교사-학생-학부모 모두에게 행복과 만족감을 주는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도시의 학교에서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기저에는 기존의 학부모 문화가 어머니들만의 참여로 이루어져서 아버지들이 학교교육에 참여하는 것이 너무 낯설게 느껴지는 심리적인 요인이 작용할 것 같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아버지들은 자녀교육에 무관심한 자세를 취하는 게 미덕으로까지 여겨지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학부모 교육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첫걸음은 우선 아버지들이 학교로 발걸음을 향하려는 마음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에 교사들은 학부모들로부터 섬김을 받았다. 하지만, 어머니들이 교실을 청소해준다고 해서 교사의 권위가 서는 것은 아니다. 그 시절 교사들이 누린 것은 권위가 아닌 권위주의였다. 교사의 갑질과 학모의 치맛바람이 착종되어 학교 물을 흐리던 시대는 가고 없다. 지금 교사들이 학부모들로부터 고초를 겪는 것은 과거 부적절한 교사-학부모 관계 문화에 대한 학부모 대중의 반발과 불신에 기초하는 점에서 자업자득이라 볼 수도 있다.

그 인과관계가 어떠하든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 불신과 경계의 벽이 세워진 것은 우리 학교교육의 크나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이 벽을 허물지 않으면 학교교육의 성공은 요원할 따름이다. 지금 교사의 권위가 바닥에 내려앉은 현실에서 교사의 노력으로 이 벽을 허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바람직한 학교교육을 생각하는 학부모 집단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 첫걸음은 학부모 공동체를 세우는 것인데, 이를 위해 아버지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아버지의 참여가 교사-학부모의 신뢰관계를 회복시키고 위기의 학교를 구할 수 있다.

이성우 경북혁신교육연구소공감 이사
이성우 경북혁신교육연구소공감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