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다문화 음식 열전(3) 100년만에 우리 식탁 점령한 빵

[에듀인뉴스] 우리가 빵이라는 음식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임진왜란 후 일본과 중국에 들어온 포르투칼 선교사를 통해서였다. 지금은 프랑스가 빵의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지만, 실제 '빵'이라는 단어도 포르투칼어인 '팡대로(pao-de-lo)'에서 유래한 말이다.

숙종 때 청나라 사절단으로 간 사람들 통해 '서양떡'이라고 지칭되는 빵이 알려졌는데, 19세기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국내에 들어오고, 일제시대에 들어와 함흥 근처에 제분회사가 만들어지면서 본격적인 빵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국내 사료 중, 빵이라는 음식에 대해서 처음 기록한 것은 아버지 이이명을 따라 북경에 다녀온 그의 아들 일암 이기지의 "일암연기"이다. 그 일암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하고 있다. 

카스텔라. (사진=나무위키)

​"서양인들이 나를 다른 방으로 맞아들여 앉도록 했다. 식사를 대접하기에, 이미 먹었다고 사양하니 서양떡 서른개를 내왔다. 그 모양이 우리나라의 박계(밀가루에 참기름과 꿀을 넣고 반죽해 직사각형으로 큼직하게 썰어 기름에 지진 조선과자)와 비슷했는데(요즈음의 카스텔라), 부드럽고 달았으며 입에 들어가자마자 녹았으니 참으로 기이한 맛이었다. 만드는 방법을 묻자 사탕과 계란, 밀가루로 만든다고 했다."

"선왕(숙종)께서 말년에 음식에 물려 색다른 맛을 찾자, 어의 이시필이 말하길 연경에 갔을 때 심양장군 송주의 병을 치료해주고 계란떡을 받아먹었는데, 그 맞이 매우 부드럽고 뛰어났다. 저들 또한 매우 진귀한 음식으로 여겼다고 했다. 이시필이 그 제조법에 따라 만들기를 청하여 내국에서 만들었지만 끝내 좋은 맛을 낼 수가 없었는데, 바로 그 음식이었던 것이다. 내가 한 조각을 먹자 그들이 곧 차를 내왔는데, 대개 이것을 먹은 후에 차를 마시면 소화가 잘 되어 체하지 않기 때문이다. 뱃속이 매우 편안했으며 배가 부르지 않았지만 시장기를 잊을 수 있었다."

이렇게 우리나라에 소개된 빵은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특히 포르투칼 선박이 대만을 근거지로 중국 남부와 일본에 진출하면서 앞서 이야기한 카스텔라 빵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동양 처음으로 일본식 카스텔라가 만들어졌다.

임오군란 후 쫒겨갔던 일본인이 다시 한양에 몰려 살면서 카스텔라가 일반인들에게 퍼져 나갔고, 이름도 '서양 떡'에서 포르투칼 외래어인 '빵'으로 불리워졌다. 그리고 1920년대에 들어선 함흥 진남포에 제분공장이 들어섰고, 21년엔 이태원에 풍국제분주식회사가 들어서며 우리나라에서도 본격적인 빵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사실, 빵의 역사는 앞서 음식열전에서 거론된 국수의 역사보다 더 깊다. 실제 빵의 기원은 바빌로니아 왕국 때 우연히 술을 빗다가 효모(이스트)가 없는 밀가루 반죽을 구워먹은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유적에서는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라는 것이 발견되고 있다.

즉, 최근 발견된 고고학 발굴에 의하면 요르단 지역에서 1만4000여년전에 집터의 화로 유적에서 숯으로 변한 빵 조각들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 빵의 조각들을 탄소측정연대로 계산해보니 1만4400년 전으로 밝혀졌다. 

​이때의 빵 조각들이 야생종 밀을 갈아서 만든 밀가루로 만든 것인지, 농경 재배에 의해 만들어진 밀로 만든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가장 오래된 빵조각임엔 틀림없는 것 같다.

따라서 인류가 처음으로 농경사회를 영위한 것이 신석기 말기인 1만년전 부터 1만5000년 사이로 알려져있으니, 빵의 역사도 그와 비슷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밀가루 반죽을 해서 익혀먹던 빵이 바빌로니아 왕국 때에 들어와서는 술을 빗다가 우연히 빵이 개발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때부터 술의 효모(누룩)가 가미된 것으로 보인다. ​

고대 이집트 제20왕조 파라오인 람세스 3세의 묘에서 나온 벽화. 당시 빵을 만들던 과정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위아래 그림은 각각 이승과 저승을 뜻한다. 사후세계에 갈 때도 빵을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위키미디어·과학동아)
고대 이집트 제20왕조 파라오인 람세스 3세의 묘에서 나온 벽화. 당시 빵을 만들던 과정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위아래 그림은 각각 이승과 저승을 뜻한다. 사후세계에 갈 때도 빵을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위키미디어·과학동아)

이것이 이집트로 들어가 기원전 2000년부터 본격적인 효모(이스트)를 이용한 빵 제조가 성행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에는 이와 관련된 유적과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이와 함께 빵 제조법이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고대 이집트의 곡물 창고가 있었던 룩소르엔 그 당시 빵을 만들던 토기를 볼 수 있다.

당시 이집트에서 제조된 빵은 40여가지가 있었고, 그 주인은 파라오였다. 파라오는 하루 1000개의 빵을 진상받았고, 계급에 따라 빵을 받는 갯수가 달라졌다. 또한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토목 노동자들도 빵으로 급여를 받았다.

이렇게 이집트에서 발전된 빵의 제조법은 기원전 800년 경에 그리스와 로마로 건너가게 된다. 그리스 신화를 기록한 호메로스(일리아드 오딧세이의 작가)는 인류에 대해 "빵을 먹는 자"라는 호칭을 붙였을 정도로 그리스에서 빵은 주식으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로마에서는 벽돌 화덕에 의해 빵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시설이 만들어졌으며, 그 때부터 빵은 중동과 서양의 주식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계급에 따라 빵의 종류가 구별되었는데, 귀족은 주로 효모(이스트)를 포함해서 만든 밀가루 발효빵을 먹었고, 일반 서민들은 호밀이나 잡곡으로 만든 무발효빵을 먹었다. 

​이렇듯 서양에서 빵은 계급의 상징이었고, 그에 따라 빵의 종류와 유래도 다양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 몇가지만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

바게트, 카스텔라, 크로와상, 비스킷 

바게트 빵=평등의 빵 바게트는 프랑스말로 막대기라는 말이다. 바게트 빵의 유래는 몇가지 설이 있는데, 대체로 프랑스 혁명기에 "평등의 빵"이라는 형태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때 프랑스에서는 빵의 규격을 300g에 길이 80cm라고 아예 규정을 해놓았다. 당시 귀족과 서민의 빵이 다르고, 특히 서민들이 귀족의 빵인 하얀 빵을 먹다 들키면 옥살이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불평등에 대해 혁명기에 "평등한 빵"을 먹자는 취지로 똑같은 규격에 똑같은 값에 똑같은 질의 빵을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바게트 빵이다. 

​▲크로아상=이슬람 전쟁 상징 바게트가 혁명기를 상징하는 "평등의 빵"이라면, 크로아상은 이슬람과의 전쟁을 상징하는 빵이었다. 이슬람의 오스만제국은 유럽을 점령하기 위해 합스부르크 왕가가 있는 빈을 2차례에 걸쳐 침공하였다. 하지만, 유럽 연합군에 번번히 패배하였는데, 이때 이슬람세력을 저주하는 의미에서 그들의 상징인 초승달 모양의 빵을 만들어 먹었다. 이렇게 비엔나에서 유행했던 크로아상은 오스트리아 공주였던 마리앙트와네트가 프랑스로 시집을 가면서 프랑스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

비스킷과 건빵=군용식량 비스킷은 처음부터 군용식량 대용으로 생산되었다. 영국은 스페인 무적함대와 전쟁을 할 때, 한정된 선박 안에서 많은 부피를 차지하지 않고, 수분을 빼어 상하는 것이 더딘 비스킷을 대량 준비하여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처음 비스킷이 만들어졌들 때는 지금과는 달리 수분을 없애 오래 보관하고 먹을 수 있는 딱딱한 빵으로, 지금 군대의 건빵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이것이 일본에 건너와 호료빵으로 만들어졌으며, 오늘날 군대에서 먹고 있는 건빵인 것이다. 

​▲카스텔라=스페인, 포루투칼 과자 카스텔라는 일본의 빵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는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과자이다. 이름인 카스텔라도 스페인 중부지방인 "카스티야"에서 유래된 것이고, 이 카스티야가 포르투칼어로 "카스텔라"인 것이다. 이렇게 카스티야 지방에서 만들어져 먹었던 과자가 포르투칼 선교사에 의해 일본에 전해졌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이의 제조법에 성공하여 빵으로 된 것이다. 따라서 카스텔라라는 포르투칼 빵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포르투칼 상인과 선교사가 비상식량으로 가지고 다니던 과자가 일본에 전해져서 빵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빵은 수십가지 형태로 변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 식빵 형태를 가지고 다시 가공하여 햄버거나 토스토, 샌드위치 등이 탄생하였고, 이와는 다르게 기름에 튀키는 형태의 도너츠 등이 만들어졌다.

밀가루에 물을 넣어 만든 반죽을 형태인 "넌(페르시아의 넌, 스페인은 또르티야, 인도 네팔은 난)"이 술을 빗는 과정에서 빵으로 변화되고, 다시 이집트로 건너가 발효빵으로 발전한 뒤, 유럽에 전해져 다양하고 색다른 빵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이 신대륙으로 건너가 햄버거, 도너츠, 샌드위치 등 부족한 야채 등을 함께 먹는 간편식(패스트푸드)으로 변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난번 국수에서도 보았듯이 인류의 식생활은 보다 보관하기 쉽고, 보다 편리하며, 보다 간편하면서도 다양한 영양소를 한꺼번에 섭취할 수 있는 식생활로 변형되어 왔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런 식생활의 변화에서 "빵"은 최전선에 서 있는 인류의 주식인 셈이다.

초코파이 (사진=나무위키)
초코파이 (사진=나무위키)

한국에서도 일제시대 처음 제분공장이 설립되고, 빵이 제조되면서 점차 확산되어 오다가 해방후 구호식량으로서의 밀가루 제공에 따라 다양한 과자와 빵이 제공되었다.

또 부족한 쌀을 메우기 위해 정부에서 적극적인 혼분식 장려정책으로 각종 빵이 만들어졌고, 제공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도 밀가루뿐 아니라 호밀, 보리, 옥수수 등 다양한 재료를 가진 빵들이 만들어졌고, 한국의 독특한 옥수수 술빵이라든지, 안흥찐빵, 일본의 도미빵을 본딴 붕어빵, 단팥방, 등도 개발되어 판매되고 있으며, 초코렛과 빵을 가미한 초코파이류는 전 세계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는 상황이다.

또 발효되지 않은 밀가루 반죽에 설탕을 넣어 만든 호떡은 길거리 입맛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서양인들이 즐겨찾는 식품이 되고 있다.

그리고 동네 빵집은 주부들이 즐겨찾는 소통의 공간이 되었고, 아이들과 청소년들의 추억의 공간 구실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이런 동네 빵집의 원조가 군산에 가면 "이성당"이라는 빵집이다. 이성당은 처음엔 일본인에 의해 개소가 되었으나, 해방후 한국인이 넘겨받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는 민족화해범국민협의회 홍보국장, 민관협력포럼 창립 및 운영위원을 거쳐 한국다문화청소년센터 이사장, 한중경제문화교류센터 이사장을 지냈으며 총리실 산하 재한외국인정책위원회 실무위원, 교육과학기술부 다문화 교육정책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김&nbsp;대표는 다문화 자녀의 자존감을 세워주고자 2008년 한국다문화센터와 국내 최초 다문화 어린이 레인보우 합창단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레인보우 합창단은 G20정상회담 특별만찬장,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초청 공연 등 대한민국 대표 어린이 합창단으로 활동 중이다.&nbsp;<br>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는 민족화해범국민협의회 홍보국장, 민관협력포럼 창립 및 운영위원을 거쳐 한국다문화청소년센터 이사장, 한중경제문화교류센터 이사장을 지냈으며 총리실 산하 재한외국인정책위원회 실무위원, 교육과학기술부 다문화 교육정책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김 대표는 다문화 자녀의 자존감을 세워주고자 2008년 한국다문화센터와 국내 최초 다문화 어린이 레인보우 합창단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레인보우 합창단은 G20정상회담 특별만찬장,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초청 공연 등 대한민국 대표 어린이 합창단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