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루한 참배움연구소장/ 경기고 교사

⑩ [교사] ‘교육’이란 옛 길 버리고 ‘배움’이란 새 걸음으로

[에듀인뉴스] 오늘날 교육 기관과 단체, 교사와 학생, 학부모 등 교육에 관련한 많은 사람이 대한민국 교육 현실 속에서 좌절하고 절망하고 있다. 희망을 찾고자 노력하지만 좀처럼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왜일까? <에듀인뉴스>는 “교육의 뜻을 제대로 묻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학교 운영 틀이 지닌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김두루한 참배움연구소장(서울 경기고 교사)과 함께 문제를 검토해보고자 ‘김두루한의 배움 혁명’ 연재를 총 10회에 걸쳐 진행한다.

일제 강점기의 원산 소학교 모습. 원산 학사는 소학교와 중학교로 나누어졌는데, 원산 소학교는 다시 원산 보통학교가 되었다.(출처=네이버지식백과)
일제 강점기의 원산 소학교 모습. 원산 학사는 소학교와 중학교로 나누어졌는데, 원산 소학교는 다시 원산 보통학교가 되었다.(출처=네이버지식백과)

교사는 시무에 필요한 인재를 길렀다

1883년 1월 정현석(덕원부사 겸 원산감리)은 근대학교인 ‘원산학사’를 세웠다. 일본인들과 상업 활동하며 시무에 대처할 인재를 길러야 했기 때문이다. 이미 1880년 4월 원산 개항 후 서당을 개량해 운영하던 향촌의 유지, 덕원 주민들과 함께 힘을 모아 설립인가신청 장계를 올렸다.

“본 (덕원)부는 해안의 요충지에 위치하여 있고 아울러 개항지입니다. 지금 가장 급한 문제는 오직 인재를 선발하여 쓰는 데 달려있으니, 만일 인재를 선발하여 쓴다면 가르쳐 길러내지 않을 수 없으며, 가르쳐 기르려면 또한 상을 주어 장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외세의 침입으로 소용돌이치던 당시 서북경략사 어윤중과 원산항 통상 담당 통리기무아문 주사 정헌시 등의 조선 개화파 관리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중앙집권의 관료 체제 귀족의 나라에서 이전과 달리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며 필요한 인재를 가르쳐 기르고자 힘썼다.

교사는 외국 교류 통번역이나 ‘교관’이 될 인재를 길렀다

1885년 그리스도교인과 ‘인재 양성을 위해 크고자 하면 남을 섬겨라’라는 가르침을 내건 ‘배재학당’이 생겼고 1886년 헐버트 교사 등을 초빙한 육영공원이 세워졌다. 각각 일반 학과 외에 연설·토론회, 체육 훈련, 현직 벼슬아치, 문벌가, 양반 자제를 대상으로 통번역 인재를 길렀다.

1891년 일본어를 가르쳐 역관을 기르려 세운 한성일어학교는 1895년 5월 ‘외국어학교관제’에 따라 1895년 6월 인천, 1907년 3월 평양에 분교를 세웠다. 교과목은 일어 외에 일어로 일반 학문도 가르치며, 한문으로 독서·작문·한국사 및 지리도 가르쳤다.

1895년 4월 소학교 교사인 ‘교관’을 기르는 한성사범학교는 ‘규칙’에 따라 수신·교육학·국어·한문·역사·지리·수학·물리·화학·박물·습자·작문·체조 등의 교과과목을 가르쳤다. 하지만 초기엔 전통적 교재인 ‘동몽선습’ 및 사서류 등 한문강독과 가감승제를 배우는 주산교육이 주류였다.

교사는 ‘식민교육’과 ‘반민주독재교육’의 하수인이었다

1900년에 세운 대한제국 ‘중학교’의 교사 중에는 일본인 학정참여관 시데하라 타이라와 미국인 헐버트도 있었다. 시데하라는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의 교육개혁을 단행하여 ‘교육’의 틀을 마련한 장본인이다. ‘한국정쟁지’(1907)에서 조선정치사를 ‘당쟁’이라 규정한 뒤 ‘당파성론’을 우겼다.

“조선인 혈액에는 특이한 검푸른 피가 섞여 있어서 당파 싸움이 계속되었으며 이는 결코 고칠 수 없는 것이다”란 막말에서 보듯 “주의를 가지고 서로 존재하는 공당이 아니라 이해관계에서 서로를 배제하는 사당”이란 시데하라 주장은 식민사관의 하나로 식민교육을 상징한다.

1960년 2.28 대구 고교생 시위날 교문을 나서는 학생들을 막아선 교사들은 ‘반민주독재정권의 하수인’이었다. 3·15 부정선거 때 이승만, 이기붕의 사진을 교실에 붙였고 자유당 시책을 선전하려고 수업 참관을 내세워 학부모를 동원했다. ‘3·5인조 공개투표’ 등 부정선거도 도왔다.

(이미지=픽사베이)
(이미지=픽사베이)

제 나라 말과 글을 배우고 사랑하는가

1895년 주시경(한힌샘, 주상호)은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 ‘글은 말을 적으면 그만’이라 깨쳤다. 배재학당에 들어가 수학·지리·역사 등 신학문을 익히고 ‘국문동식회’, ‘협성회’, ‘독립협회’ 활동과 필립재손과 함께 ‘독립신문’을 펴냈다. 영어·일본어·중국어나 항해술·측량술·의학 등을 두루 섭렵한 뒤 ‘주 보퉁이’가 되어 여러 학교에서 우리 말과 글을 갈닦고 가르쳤다.

1912년 최현배는 조선어강습원에서 ‘말이 오르면 나라가 오른다’는 깨침을 펼친 주시경에게 배운 뒤 ‘동래고보’와 ‘연희전문’에서 인재를 길렀다. 조선 사람의 창조적 활동의 말미암던 길이요, 연장이요, 그 성과의 쌓임인 ‘우리말본’을 펴냈고 조선어학회 수난을 옥중에서 겪었다.

1941년 11월 국권을 잃고 일본말글 쓰기를 강요받던 때, 연희전문을 마친 윤동주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시집에 ‘서시’를 남겼다. ‘광복’을 못 본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다 숨을 거둔 그의 스승은 광복 후 첫 문교부 편수국장으로 한글 시대를 연 최현배였다.

학생의 질문에 거짓말 않고 답하는가

“선생님, 질문 있습니데이. 하필 야당의 강연회가 있는 일요일에 모든 학생을 등교시킨 이유가 뭡니꺼. 거짓말은 하지 마이소. 우리한테는 정의를 말하라고 가르치시면서,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시니 이율배반 아닙니까. 선생님, 비겁합니더.”

야당 선거유세(민주당의 장면 후보) 날, 환경미화나 잡초 뽑기를 내세워 등교한 학생들이 물었다. ‘진실이 무엇이냐’고. 선생님은 말문이 막히고 양심에 파문이 일었다.

“그래. 느그들이 내한테 그렇게 말해도 싸다.”

1960년 4·19 교원노조는 이처럼 치욕스런 경험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에서 출발했다. 4·19혁명은 교원노조 탄생의 기폭제였고, ‘4·19의거로 희생된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는 뜻을 모은 교사들의 당면과제는 ‘교원권익향상’이 아니라 ‘학원민주화’였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업 노동자로 살며 민주주의를 지키는가

뜻밖에 당시 민주당도 “교사는 노조를 결성할 수 없다”며 노동조합법을 개정하려 했다. 철회 투쟁을 위해 교사의 사명인 수업을 거르지 않은 채 72시간 단식 투쟁에 나섰다. 교원노조는 철회를 이끌어냈지만 1300명의 교사 중 74명이 의식을 잃고 이중석 교사는 숨을 거뒀다.

더욱이 1961년 박정희(1961~1979) 5·16군사쿠데타 세력은 교원노조를 탄압하고 해산시켰다. 하지만 교육의 자주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짓밟힌 교사들은 전두환(1980~1987)을 거쳐 노태우(1987~1992) 때인 1989년 “신성한 교사들이 어찌 노동자냐”에 맞서 다시 ‘전교조’를 세웠다.

교원의 권위가 떨어지고 지식판매원, 입시기술자로 내몰린 것은 독재권력이 강요한 사이비 교육임을 밝히고 민주주의를 가르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반민주적인 교육제도와 학생과 교사의 참 삶을 파괴하는 교육 현실을 보고 스스로 민주주의 실천의 본을 보이고자 나선 것이다.

전교조 창립선언문 일부 캡처.(출처=전교조홈페이지)
전교조 창립선언문 일부 캡처.(출처=전교조홈페이지)

참교육을 넘어 참배움 관점으로 다 함께 배움권을 누리자

교육의 3주체론? 학생, 교사, 부모가 주체라고? 나라(국가) 이름으로 정권마다 내놓은 정책과 제도에 얽매여 교육을 받는 대상이지 않았던가? 아하, ‘배움을 즐기는 행복교육!’은 아니군요. ‘민족, 민주, 인간화’의 참교육과 ‘교원권익’을 내세우며 놓치고 잡지 못한 게 있었군요.

1989년 ‘전교조 창립선언문’의 딱 한 구절, 가슴에 와 닿는 말, ‘진실된 교육을 받으려는 학생들의 배움권(학습권)을 침해하는 잘못을 저질러 왔다’의 ‘배움권’을 붙잡아야 할 때구나. ‘교육’을 받은 아동·청소년 처지에서 보면 배움과 돌봄 바탕엔 본디 배움권이 있었구나!

고교평준화 45년 만의 무상교육도 ‘교육을 받을’게 아니라 ‘배움권’을 누리는 관점에서 봐야 겠네요. 4차 산업혁명 시대 배움이(학생/학습자)들이 ‘누구나’ 다니는 (초중등)학교에서 ‘저마다’ 즐겨 묻고 ‘역발상’도 맘껏 하며 창의성’을 살려 모두가 행복한 배움을 누려야 하니까.

줄 세우기 교육 적폐를 없애고 맞춤배움으로 삶을 가꾸게 돕자

학생들이 ‘참배움’을 누리도록 하려면 교사들이 ‘배움혁명’으로 ‘교육적폐’를 없애야겠구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촛불 들어 외쳤듯 ‘교육적폐 없애기’의 노력이 필요하구나.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는 교사인 만큼 몸에 밴 ‘교육’을 벗어나야겠구나.

교육과정보다 배움과정을 떠올리자. 학생들이 스스로 ‘배움’을 설계하여 ‘배움계획서’를 쓴 뒤 ‘맞춤배움’의 과정을 누리게 돕자. 학교 정기고사와 수능 시험이란 줄 세우기 교육 적폐를 없애고 온 수행평가로 하자. 정답 있는 ‘앎(지식)’의 전달보다 깨치는 ‘삶(지혜)’을 즐기게 하자.

45년 동안 해 온 무늬만 고교평준화(보편화)를 고교학점제로 보완하면 ‘모두가’ 행복한 배움을 누릴까? 교과목 수만 늘리는 칸막이 교과목학점제로 ‘배움권’을 제대로 살릴 수 없지 않은가? 학생 ‘저마다’ 관심사(주제)를 살려 호기심, 질문이 꼬리 무는 주제학점제로 참배움을 펼치자.

‘배움의 당사자’이자 ‘배움의 본’이 되어 '참배움의 혁명가'로 거듭나자

배움의 당사자인 학생들이 ‘배움의 즐거움’을 누리게 도울 뿐 대학입학전형(입시) 등에서 공정함을 내세워 ‘교사, 부모, 국가(당국)’은 끼어들지 말자. 그들을 힘들게 하고 ‘배움권’을 짓밟지 말자. 고등학교를 제대로 다니면 생각하고 이해하며 표현하는 참배움의 힘이 길러지거늘.

‘교과’보다 ‘주제’를 살려 앎을 적용하거나 응용하기, 협력하며 배려하기 등으로 날마다 낱낱이 삶을 가꾸는 ‘배움’을 스스로 기록하게 하자. 교과와 창체(수상, 자율, 동아리, 봉사, 진로, 독서 등) 활동도 연계하여 배움이 넓어지고 깊어지게 하자. 학생들이 학교를 비롯해 곳곳에서 ‘저마다’와 ‘더불어’ 사람다움을 지니게 하자.

모두의 행복한 배움이 멀리 있을까? 소통(묻고 답하며 읽고 쓰기)과 어울림을 즐기고 누리면 그 뿐인 것을. 시대 흐름이 요청하는 ‘배움’의 관점으로 나부터 혁명하자. 나라보다 값진 나, 나만큼 소중한 나라·겨레 사랑의 길을 깨치자. 스스로 ‘배움의 당사자’, ‘배움의 본’이 되어 식민, 반민주독재교육의 옛 길을 ‘배움’이란 새 걸음으로 나아가는 참배움의 혁명가로 거듭나자.

#'김두루한의 배움혁명'은 10회를 끝으로 마감합니다. 그간 김두루한의 배움혁명을 찾아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김두루한 선생님은 고교학점제 관련 칼럼으로 다시 돌아올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김두루한 참배움연구소장/ 경기고 교사
김두루한 참배움연구소장/ 경기고 교사

김두루한 참배움연구소소장(경기고 교사, 문학박사)은 열린시대교육개혁론(이서원, 1996)을 펴냈으며 앎의 두루퍼짐과 겨레 하나됨이 이루어진 대한민국을 가꾸려는 뜻을 지니고 1987년 한양여고에서 교편을 시작한 뒤로 33년째 교직에 종사 중이다.

한국인격교육학회 부회장, 한글학회 평의원, 한국어정보학회 이사, 한국교육철학학회 회원 등으로 활발히 활동 중이며, 전교조 부설 참교육연구소 중등새로운학교연구실장을 지냈다. 2012년부터 참배움학교연구회를 조직해 매월 참배움이야기마당 등 활동을 해 오고 있으며, 2017년 이후 참배움연구소로 개편해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학교운영체제(교과체제), 고교학점제, 대입전형, 과정(수행)평가 등의 분야를 중심으로 연구하며 최근 고교주제학점제 실행방안(2018), 배움과 성장이 있는 교사의 삶 가꾸기(2018), 제4차 산업혁명시대 중등학교에서 사람다움(인성)기르기(2017), 정보 시대 생각하는 참배움의 뜻과 길(2017) 등을 발표했고 현재 ‘배움혁명’(2019)을 출판 준비 중이다. duruha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