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 민족주의, 그리고 바람직한 민족주의의 길

(사진=광주시교육청)

[에듀인뉴스] 한일 경제분쟁으로 인한 일본제품 불매운동과 반일민족주의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지금은 조국 법무부장관의 사태로 인해 소강상태에 들어갔지만, 언제든 반일 민족주의는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켜버릴 수 있는 휴화산이다.

그만큼 식민지 지배라는 민족적 수난에 대한 원망이 한으로 맺혀 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예전에 횡행했던 지역주의 선동처럼 '반일 민족주의'는 정치인들과 선동자들이 이용해 먹기 좋은 소재인 셈이다.   

​사실 민족주의는 서구 근대화 과정에서 시민혁명에 의해 국민국가가 대두되면서 시작된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국왕들이 중세 교회의 지배를 벗어나 절대왕정을 수립했었다. 즉, 국왕과 귀족들은 중세 교회의 지배를 벗어나 정치적 자유와 지배권을 수립했지만, 시민들은 여전히 중세의 노예상태나 다름없었다. 이에 시민들이 정치적 자유와 권리를 외치면서 시민혁명이 촉발되었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권리장전), 7년 전쟁과 프랑스의 시민혁명, 그리고 미국의 독립전쟁이 그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로 민족주의는 훌륭한 자양분이 되었다. 우리는 국가와 민족을 다른 말로 쓰고 있지만, 서구에서는 nation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쓰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민족주의는 종족적 개념이 아니라, 국가(국민)적 개념이 혼합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 이 nationalism(민족주의)는 근대 시민혁명 이후 서구를 휩쓴 이데올로기였고, 그 과정에서 제국주의와 나찌즘(파시즘)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1900년대 초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이후 피압박 식민지 국가의 민족주의 운동을 촉발하게 되었다. 아시아를 비롯해 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에 이르기까지 민족주의 열풍은 맑스의 사회주의 운동과 함께 커다란 폭풍우가 되어 인류사를 뒤덮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 일본에서 2.8독립선언을 시작하면서 '일본민족'이라는 단어를 이광수가 차용하면서 부르짖은 '조선민족'이라는 용어는 100년간 한반도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 구실을 하고 있다. 

​국가 건설도 '민족의 독립'이요, 경제건설도 '민족 중흥의 사명'이며, 분단 통일도 '민족의 소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다. 해방이후 수많은 이데올로기가 서구로부터 들어왔지만,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북한에서 사회주의가 도입되었지만, 사실상 '유교적 공산주의' 아니, '민족적 공산주의'가 북한의 이데올로기인 셈이고, 남한에서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도입되었지만, 사실상 '한국적 민주주의'니 하는 말처럼 '민족적 자유민주주의'였던 것이다.  

이처럼 민족적 용암이 들끓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반일'은 잠자는 용암에 충격을 가하는 것이다. 그 충격이 가해지는 순간 국민들의 이성은 마비되고, 적개심이 들끓는 활화산이 된다. '한일 위안부 합의 파기', '징용자 배상 판결에 대한 정부의 무책임성'이라는 한일 갈등의 원인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직 '아베의 경제보복'만이 화두가 된다. 이성적인 해결방식보다는 '죽창'과 '궐기'만이 분위기를 압도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죽창과 궐기, 반일 불매운동으로 해결이 가능할까? 일본을 누르고, 한국은 일취월장 발전할까? 일본 제품이니 일본이 원산지인 것들을 쓰지 않고 우리의 생활이 가능할까? 소니 카메라는 안쓰고 사진을 잘 찍을 수 있을까? 라면을 먹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노래방에 가지 않고 놀 수 있을까? 지금도 건축 현장에서 쓰는 수많은 일본 용어를 쓰지 않고 일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일본산 부품 없는 기계를 쓰지 않고 생산 가능한 것이 있을까?      

​이렇듯 '반일'은 일본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일본을 우위로 만드는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즉, 누구를 반대한다는 것은 곧 그 누구가 우위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반일로는 결코 일본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남을 도와주었던 사람은 성장한 후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살고 행복해진다는 것이 증명되었듯이, 그 역으로 도움만 바라고 원망으로 사는 사람들은 결코 다른 사람보다 잘 살고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아일랜드이다.

아일랜드...중동의 팔레스타인처럼 30년 전 세계 주요 뉴스를 장식하던 나라다. "벨파스트에서 폭탄테러.. 사상자 00명"이라는 뉴스 말이다. 그 뉴스를 장식하던 테러리스트들은 '에이레 공화군'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1인당 GDP 8만4000달러, 영국의 일인당 GDP 4만6000달러에 두배나 되는 나라가 되었다. 문화는 어떤가? 10월 31일이 되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할로윈데이의 원조국가이며, 전세계 영화와 음악을 휩쓸고 있는 사람들이 아일랜드 출신의 켈트족이다. ​

(사진=픽사베이)

영국으로부터 침탈당한 아일랜드의 역사를 보면, 대한민국의 민족수난은 그야말로 조족지혈이다. 아일랜드는 BC8000년 중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나, 이는 우리나라의 남방계 선주민처럼 현재 아일랜드의 주류가 아니다. 지금의 주류인 켈트족은 단군조선이 있었던 즈음인 BC 900~150년 경에 아일랜드에 들어왔다. 고이델족과 브리튼족, 벨가에족이 차례로 들어와 지금의 켈트족을 형성했다. 

​5세기경 카톨릭이 전파된 후,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고 영국과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즉, 12세기에 영국의 침입이 시작되고 예속되어가기 시작했는데, 영국에서 성공회와 신교인 장로교가 성행하면서 개종을 강요하게 되자 이에 반발하면서 분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여왕, 제임스 1세 등은 구교도 중심의 아일랜드인의 반발을 철저히 탄압했다. 심지어 아일랜드 북부 지방의 토지를 몰수해 이주한 영국인들에게 나눠주었다. 더욱이 청교도(장로교 계열의 신교)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크롬웰은 아일랜드인의 토지를 몰수해 영국인들에게 나눠주었고, 이때부터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인 지주 아래에서 일하는 소작농이 되었다. 

​이러한 영국의 식민지배와 탄압에 아일랜드인들은 반란과 독립투쟁으로 맞섰다. 17세기 두차례의 반란과 내전을 벌였으나 로마 카톨릭 계열의 구교 지주들의 많은 수가 생명을 잃었다. 또 크롬웰과의 전쟁에서도 패배하여 아일랜드인 1/3이 죽거나 추방당해야 했다. 명예혁명 때는 왕당파의 편에 섰다가 패배하였고, 이로인해 17세기 이후에는 카톨릭을 믿는 아일랜드인은 의회와 같은 요직 진출이 금지되었다.

​이렇게 아일랜드 농장을 소유한 영국인들은 아일랜드에서 생산된 농작물들을 영국으로 반입하였다. 그렇게 매년 기근에 시달리던 아일랜드인들에게 감자는 신의 은총과 같았다. 신대륙에서 들어온 감자 농사로 배를 불릴 수 있었고, 그래서 식민지배상태에서도 인구가 늘어나게 되었다. ​

아일랜드 대기근.(사진=나무위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1740년과 41년 두해에 걸쳐 혹한이 찾아와 엄청난 기근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조에 불과했다. 겨우 기근의 피해를 회복할 즈음인 1845~49년엔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감자역병(입마름병)으로 대기근이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800만에 달하던 아일랜드인 중에서 200만명 이상이 굶어죽고, 200만명이 아일랜드를 떠나 미국으로 이주해야만했다. 

그럼에도 지주계급들은 소작료를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불매운동이라는 '보이콧'의 어원이다. 즉, 영국인 지주는 '찰스 보이콧'이라는 지배인에게 '소작료를 받아내라'고 강요했는데, 소작료를 받아내려는 '찰스 보이콧'에게 아일랜드인들이 먹을 것을 가져다 주지 않아 굶주려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겨우 영국에서 이를 구해냈는데, 이후 영국 법령이 제정되면서 '보이콧'이라는 단어가 생겨난 것이다. 

​이후 영국 연합법이 만들어지고,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합병이 가시화되자, 이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1차 대전을 틈타 영국의회에 진출한 아일랜드 의회는 아일랜드 자치법을 제기하였고, 여기에 북부 얼스터 지역을 포함하는 것을 두고 대립하다가 독립전쟁으로 전개되었다. 1916년 부활절에 시작된 부활절 봉기의 선언문을 보면, 우리의 3.1독립선언문과 아주 비슷하다. 

"....아일랜드의 주인은 아일랜드인임을 선언한다. 또한, 아일랜드의 양보할 수 없는 주권과 아일랜드의 통치권 역시 아일랜드인의 것이다. 외국인과 그들 정부가 벌인 오랜 세월의 착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권리는 소멸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압제는 결국 아일랜드인에 의해 종결될 것이다. 모든 아일랜드인은 주권과 자유로운 조국을 소유할 권리가있다. 이러한 권리의 쟁취를 위해 지난 삼백년간 여섯 차례에 걸친 항쟁이 있었다. 우리는 이를 계승하여 세계와 당당히 대면할 것이다. 여기 우리는 독립 주권국가인 아일랜드 공화국의 국민들이다. 우리는 아일랜드 공화국의 자유와 복지, 국가 번영을 위해 우리 자신과 전우들의 생명을 걸 것을 맹세한다...(부활절 독립선언서 중에서)"

​그러나 시민들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한 부활절 봉기는 실패하였다. 하지만, 영국이 봉기에 가담한 15인에 대해 처형을 하자, 아일랜드인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부활절 봉기를 신페인당이 사주했다는 소문으로 아일랜드인들은 신페인당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이에 총선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신페인당은 아일랜드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이로 인해 영국과 독립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결국 아일랜드인들은 1921년 영국과 조약을 맺어 '아일랜드 자유국' 지위를 획득한다.  하지만, 북부 얼스터지역과 갈등이 내전으로 촉발되어 분쟁을 한 끝에 1922년 얼스터 지역을 제외한 남부 26개 주가 별도의 아일랜드 공화국을 선포하게 되었다. 그리고 2차대전 중에는 의용군 형태로 연합군에 참전하였으나,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선언하였다. 1949년에는 영연방으로부터도 탈퇴하게 되었다. 

이처럼 끊임없는 반란과 독립투쟁, 그리고 진압과 탄압이 반복되었던 것이 아일랜드의 역사였다. 또한 7년 전쟁, 1차, 2차 대전 등 영국이 국제전쟁에 나설 때면 아일랜드인들은 강제로 징집되어 참전해야만 했다. 지금도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아일랜드의 민요에는 이같은 탄압과 강제징집에 대한 슬픈 이야기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슐라룬'은 남편에게 강제징집을 피해 어서 도망치고, 언젠가는 만나자는 부인의 애절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외에도 전쟁에 반대하는 민요나 독립군가 같은 노래는 수없이 많다.

독립 후 정치적 변화를 겪은 아일랜드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세금 및 이자율 인하, 규제완화,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진하는 등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농업 국가였던 아일랜드는 첨단산업 중심의 경제로 전환되면서 급격한 경제 성장을 달성하였다. 1965년에는 영국·아일랜드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였으며, 1973년에는 유럽공동체에 가입하였다.

하지만 외국기업의 투자에 의존하던 아일랜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한 방에 모래성처럼 무너졌고, 2010년 11월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아일랜드는 국제통화기금(IMF), 유럽연합(EU), 유럽중앙은행(ECB) 등으로 부터 670억유로의 구제금융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국민들의 노력으로 3년 만에 국가부도에서 벗어나, 그 후 5년 후 유럽에서 가장 높은 경제 성장률을 보여줘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렇듯 아일랜드는 수백년에 걸친 영국의 식민지 지배와 가혹한 탄압 속에서 독립을 쟁취한 뒤, 오히려 영국을 앞지르고 있다. 1인당 GDP는 영국의 두배 가까이나 된다. 그러면서 문화적으로는 노래면 노래, 영화면 영화, 춤이면 춤, 축제면 축제 등에서 전세계를 압도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영국의 문화라는 것이 실상은 거의 다 아일랜드의 문화인 셈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미국 남북전쟁의 군가이자 우리의 동요인 '빙빙 돌아라' '훌라송'도 아일랜드 독립운동가이고, 미국의 전사자 장례곡으로 알려진 '아 목동아(Oh denny boy)'도 아일랜드 민요에 가사를 붙인 것이다. 리버댄스로 알려진 유명한 탭댄스도 아일랜드의 전통춤이다. 또한 각 종 영화음악을 휩쓸다시피 하는 뉴에이지 음악의 엔야나 유명한 오페라 걸그룹인 캘틱우먼도 아일랜드 출신이다. 그리고 전세계적인 축제가 되어 있는 할로윈 축제는 아일랜드의 전통축제에서 기원한 것이다.

(사진=픽사베이)

​할로윈 축제는  켈트족의 삼하인축제에서 기원하고 있는데, 이들의 새해 첫날은 겨울이 시작되는 11월 1일이다. 즉 10월 31일은 켈트족의 설날 전야제인 셈이다. 그들은 사람이 죽어도 그 영혼은 1년 동안 다른 사람의 몸 속에 있다가 내세로 간다고 믿었다. 그래서 묵은 해의 마지막 날인 10월 31일에 죽은 자들이 앞으로 1년 동안 자신이 기거할 상대를 선택한다고 여겼고, 이에 귀신 복장을 해서 죽은 자의 영혼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우리 설날 전야에 "자면 눈썹 흰다"며 자지 않는 풍습을 닮은 것이다.  

어찌되었든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영국에 대한 적개심을 극복하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와 첨단 산업 유치로 경제성장을 이뤄내며 영국을 압도하고 있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영국을 압도했을 뿐 아니라, 음악이면 음악, 영화면 영화, 춤이면 춤, 축제면 축제에서 서구 문화의 소프트 컨텐츠를 장악한 셈이다. 

그렇다고 아일랜드인들이 영국에 대한 원한을 잊은 것이 아니다. 지금도 아일랜드인은 결코 영국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도 영국과의 무역관계가 80%에 점할 정도로 예속되어있기 때문에 영국과의 관계단절과 불매운동에 대한 이야기는 끊임없이 있어왔고, 또 영국에서 이주해 정착한 사람들로 인해 내부 분열(우리의 친일파와 같은 친영파...아일랜드야말로 토착 영국인이 있다)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감정식 해결과 대결보다 이성적인 해결에 지식인들의 지속적인 설득과정이 있었다. 사회적 대타협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해 2001년에는 영국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의 금융위기는 외국 기업 중심의 아일랜드에 직격탄을 퍼부었다. 그로 인해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해야만 했다. 그 후 노동사회개혁에 박차를 가한 후 OECD국가 중 최상위를 차지하는 성장을 구가하고 있다. 앞서 말한 GDP(국내총생산)뿐 아니라, GNI(국민총소득)에서도 영국을 압도하고 있다. 

지금 영국은 유럽연합탈퇴(브렉시트)로 몸살을 앓고 있다. 영국에 진출한 기업이 영국을 떠나고 있다. 반대로 아일랜드는 2008년 디폴트 이후 사회적 대타협을 깨고, 과감한 노동 사회개혁을 단행했다. 외국인 기업을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해 국민적 합의를 통해 공무원을 비롯한 노동자 임금 삭감 조치 등을 단행했다. 그 결과 엄청난 경제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상태다. 런던은 브렉시트로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반면,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의 더블린은 경제성장의 가속도를 붙이고 있는 상태다. 

​이것은 아일랜드가 1980년대까지 지속해왔던 민족감정에 입각한 민족주의적 자립경제를 버리고 외국기업에 활짝 문을 연 데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의 힘을 믿는다는 점에서 오늘날 아일랜드는 영국보다 훨씬 앞서 있다. 티쇽(Taoiseach)이라고 발음하는 총리 리오 버라드커가 인도 이민자 출신이라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동아일보 김순덕 칼럼 중에서).

즉, '켈트 호랑이'라고 지칭되는 아일랜드의 민족주의는 개방성과 함께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을 존중하고, 식민지의 원한과 울분을 문화 강국이라는 소프트 파워를 통해 극복해 나감으로서 진정한 승자의 길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는 민족화해범국민협의회 홍보국장, 민관협력포럼 창립 및 운영위원을 거쳐 한국다문화청소년센터 이사장, 한중경제문화교류센터 이사장을 지냈으며 총리실 산하 재한외국인정책위원회 실무위원, 교육과학기술부 다문화 교육정책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김&nbsp;대표는 다문화 자녀의 자존감을 세워주고자 2008년 한국다문화센터와 국내 최초 다문화 어린이 레인보우 합창단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레인보우 합창단은 G20정상회담 특별만찬장,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초청 공연 등 대한민국 대표 어린이 합창단으로 활동 중이다.&nbsp;<br>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는 민족화해범국민협의회 홍보국장, 민관협력포럼 창립 및 운영위원을 거쳐 한국다문화청소년센터 이사장, 한중경제문화교류센터 이사장을 지냈으며 총리실 산하 재한외국인정책위원회 실무위원, 교육과학기술부 다문화 교육정책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김 대표는 다문화 자녀의 자존감을 세워주고자 2008년 한국다문화센터와 국내 최초 다문화 어린이 레인보우 합창단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레인보우 합창단은 G20정상회담 특별만찬장,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초청 공연 등 대한민국 대표 어린이 합창단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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