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원 실천교육교사모임 고문

(그림=약치기그림)
(그림=약치기그림)

[에듀인뉴스] 교육은 어떤 형태든 가르치는 쪽과 배우는 쪽이 있을 수밖에 없으며, 아무리 열린 마음을 가진다 하더라도 가르치는 쪽이 조금이라도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는 행위다. 선생과 학생의 불균등성, 비대칭성은 교육의 출발조건이다. 그리고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선생 자리에는 어른이, 학생 자리에는 어린 세대가 자리 잡게 되어 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슐라이어마허의 말대로 교육은 스스로의 조건을 부정하려는 변증법적 과정이다.

선생의 목표는 학생의 학습, 즉 자신과 학생의 차이를 줄이는 것이다. 선생과 학생의 차이가 거의 없어지거나 역전된다면 이는 선생에게 더할 나위 없는 성공이다. 교육의 완전한 성공은 교육의 완전한 부정이며, 더 이상의 교육이 필요 없어지는 것이며, 선생과 학생이 동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선생이 교육이 실패했는데도 그 자리에 버티고 예우와 존중을 요구한다면? 혹은 이미 성공하여 선생의 조건이 소멸됐는 데도 여전히 선생 노릇을 고집한다면?

하나는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후자는 이미 학생이 성장했는데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자격 없는 상태에서 선생을 고집하면 학생들은 이들을 선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저 꼰대일 뿐이다.

선생이 꼭 학교 교사만 뜻하지는 않는다. 어린 세대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자 하는 위치에 선 기성세대라면 누구나 선생이다. 가르칠 능력이 없거나 더 가르칠 것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는데도 그 자리에 버티고 있다면 누구나 꼰대다.

왜 능력도 필요도 없는 상태에서 선생질을 멈추지 않고 꼰대가 될까?

이는 젊은이가 자신과 동등해질 경우 ‘통제력’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들이 가르쳤던 이유도 어린 세대를 자신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그들 사이의 격차를 이용하여 통제하고 지배하는 권력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스스로를 부정해야 하는 교육의 길을 거부하고 그 대신 권력을 택한 것이다.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면 교사든, 부모든 누구든 그들은 선생이 아니라 꼰대다.

물론 매우 긴 시간, 심지어 학생의 거의 평생을 계속 선생의 위치에 남아 있으면서도 꼰대가 아닌 그런 선생도 있다. 교육을 부정하면 할수록 오히려 교육의 조건이 더 강화되는 그런 선생이다. 교육이 스스로를 부정했지만, 부정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교육의 조건을 계속 창조하는 선생이다. 가르치는 과정에서 본인도 계속 성장하는 선생이다.

대부분 성실한 교사는 평생 공부를 놓지 않으며, 가르치는 과정에서 계속 성장한다. 이런 선생은 학생이 다 자란 뒤 찾아 뵈어도 여전히 배울 점이 많이 남아 있다. 이쯤 되면 단지 선생이 아니라 바로 스승이다.

가르치는 과정에서 배우고 성장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가르치는 과정에서 배움의 필요성을 느꼈다는 것은, 이미 자신의 부족함을 자각했다는 뜻이다. 가르치는 과정에서 선생에게 교육의 조건이 발생했다는 것은, 자신이 학생과 비교했을 때 모자라는 부분이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기꺼이 인정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자각하지 못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매 순간 선생의 자리를 고수하려는 사람은 기왕에 배운 것 이상의 배움으로 나아갈 수 없다. 따라서 어느 순간 학생이 그의 모든 것을 다 배우고 심지어 넘어 섰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선생의 위치를 고수하려 발버둥 치는 애처로운 처지가 된다.

꼰대가 아니라 계속 선생으로 남고자 한다면 배움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경험의 폭을 넓혀가며 계속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계속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기회만 된다면 누구에게라도 배우고자 할 것이며, 그때 그 상대를 연장자, 상급자로 제한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기꺼이 어린 세대, 젊은 세대와 대등한 눈높이에서 혹은 자신을 낮추고서 배우고자 할 것이다. 여기서 선생됨의 역설이 발생한다. 선생 자리에서 내려와 어린 세대와 친교 할 수 있는 만큼 더 오랫동안 선생으로 존경받는다.

선생이고자 하는 만큼 꼰대가 될 것이며, 선생이 아니고자 하는 만큼 선생이 될 것이다.

진정한 선생됨에 실패한 사람이 계속 선생 노릇을 고집하면서 되지도 않는 가르침을 주려고 추태를 부리는 것, 이것이 바로 ‘꼰대질’이다.

꼰대질은 어린 세대에게 가르치려 드는 것을 모두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가르칠 위치도 아니고, 그럴 자격도 없는 사람이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윗자리에 있다는 이유로 가르치려 드는 것이다.

최근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꼰대력 테스트'.(자료=네이버블로그)
최근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꼰대력 테스트'.(자료=네이버 블로그)

자신이 꼰대질을 하는지 자각할 방법은 없을까? 다음 셋부터 조심하자.

첫째, 가치관을 강요한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바뀐 세상에 맞지 않는 가치관을 고집하면 고루한 사람이며, 거기 그치지 않고 나름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는 또 먼 미래의 가치관을 만들어 가야 할 학생들에게 옛 가치관을 강요하거나 가르치려 든다면 영락없는 꼰대다.

특히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여기는 교사는 더 조심해야 한다. 교사가 학생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 것은 지식과 그 지식을 얻는 방법 그리고 보편적인 삶의 지혜다. 만약 “이렇게 살아야 올바른 삶이다”, “그런 행동은 옳지 않다” 등의 말이 자꾸 떠오르면 참자. 꼰대가 되는 지름길이다. 다만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가치관 그리고 거기에 대안이 되는 가치관들을 제시하고, 학생들이 스스로 판단하게 하자.

둘째,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다.

꼰대들은 자기 말에 대해 젊은이들이, 특히 그 젊은이가 여성이라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심지어 비판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여서 화를 내거나 보복하는 경우도 있다. 의외로 많은 교사가 학생들의 비판은 물론 질문에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어쩌면 두려운 것일 수도 있으며, 자기 확신이 부족한 것일 수도 있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데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양심불량이다. 들어야 한다.

셋째, 배우려 하지 않고, 사과도 하지 않는다.

꼰대는 자신이 모르는 것 할 수 없는 것을 젊은이나 소위 아랫사람이 -특히 여성이라면 더욱- 가르칠 수도 있다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들에게는 나이가 곧 능력이다. 이는 학생들이 꼰대 선생님을 가려내는 가장 중요한 지표이기도 하다. 학생들은 사과에 민감하다. 잘못했다고 느끼면 바로 사과하자. 불만과 불평의 소리도 기꺼이 들어주자. 그것만으로도 학생들은 깊은 존경심을 보여줄 것이다. 선생이 아니고자 함의 역설이 발동하는 것이다.

결국 선생과 꼰대의 갈림길은 자리에서 내려설 수 있는가, 마음을 열 수 있는가에 있다. 기꺼이 내려서고 마음을 열면, 즉 선생됨을 고집하지 않으면 선생이다. 앙상한 자리를 고집하고 학생을 지배하고 통제하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면 꼰대다. 선생은 행복하고 꼰대는 불안하다.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가? 선생인가 꼰대인가? 각자 선택할 일이다.

권재원 실천교육교사모임 고문
권재원 실천교육교사모임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