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치즈효과=드문 경우지만 열 장이나 되는 치즈를 겹쳐놓은 상황에서 구멍들이 모두 일치하여 관통하는 하나의 구멍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대형 사고도 이처럼 수많은 작은 우연들이 겹쳐 치즈 열장을 관통하는 하나의 구멍이 생기듯이 만들어진다.

지난 연말 서둘러 서울로 가야해서 여러 가지를 챙기면서 평소와 달리 연말에 쓰려고 찾아놓은 오만원권 지폐를 지갑에 두툼히 담았다. 원래 나는 현금을 조금밖에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그런데 며칠 전 학교 앞 허름한 식당에서 6천원짜리 김치찌개를 먹고 돈을 내려고 보니 카드는 받지 않는다고 하고, 지갑에는 5천원밖에 없어서 연구실까지 가서 돈을 가져다가 주어야 했던 일이 있었다. 남자가 지갑에 오만원짜리 몇 장은 담고 다녀야지 그렇게 궁상을 떠느냐며 핀잔을 주던 동료의 말이 떠올라 약간 망설이다가 모두 담았다.

입은 양복이 몸에 딱 맞는 것이어서 평소와 달리 돈지갑을 꺼내어 가방에 넣고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잘 기억에 나지는 않지만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어 표를 넣은 후 다시 가방에 두었던 것 같다. 평소에는 휴게소에서 밖으로 나갈 때 반드시 지갑은 챙겨서 나가는데 그날은 지갑을 가방에 두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않고 그냥 나갔다.

화장실을 다녀서 돌아 나오는데 버스휴게소의 쌓인 눈과 낮은 키의 가로등, 그리고 가로등보다 더 크고 예쁜 동짓달의 만월이 나를 보며 손짓을 했다. 사이렌에 홀려 나아가는 뱃사람처럼 환한 미소에 이끌려 정신없이 눈밭으로 가서 달님 미소까지 넣은 사진 몇 장을 찍었다.

그런데 기쁨에 차서 돌아 나오던 중 그만 아스팔트위로 엉덩방아 찧듯 뒤로 넘어졌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짚어 일단 엉덩이를 구했다. 혹시 손목을 다치지 않았나하고 움직여보니 말짱하였다. 다시 화장실로 돌아가 긴 코트에 묻은 흙과 더러운 물을 씻어 내고,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휴게소 안으로 들어가 따스한 물도 한잔 하였다. 바다요정의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도 위기에서 벗어난 오디세우스라도 된 양 내 순발력에 감탄하며 나도 보름달보다 환한 미소를 머금고 버스가 떠나기 직전 차에 올랐다.

차가 출발하려는데 옆자리 청년이 보이지 않아 기사에게 이야기하니 차 뒤편에서 자리를 바꾸어 앉았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덕분에 두 자리를 차지한 후 ‘눈과 보름달의 유혹’이라는 제목의 글과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며 늦은 밤 서울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해 별 생각 없이 가방을 열어보니 내 지갑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지갑이 텅 비어 있었다. 내릴 때 보니 가방 지퍼가 열려있어서 내가 실수로 열어놓은 모양이라 생각하고 별 생각 없이 그냥 닫았던 일이 떠올랐다.

아! 이것이 ‘스위스치즈 효과’구나. 스위스 치즈에는 무작위로 구멍이 뚫려 있는데 두어 장만 겹쳐도 그 구멍의 위치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관통하는 구멍이 생기지는 않는다. 그런데 참으로 드문 경우이지만 열 장이나 되는 치즈를 겹쳐놓은 상황에서 구멍들이 모두 일치하여 관통하는 하나의 구멍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대형 사고라는 것은 이처럼 수많은 작은 우연들이 겹쳐 치즈 열장을 관통하는 하나의 구멍이 생기듯이 만들어진다는 것이 소위 스위스치즈 효과이다.

평소처럼 지갑에 현금을 가득 넣지 않았더라면, 차표를 넣으려고 지갑을 꺼냈다가 가방이 아니라 내 코트에 넣었더라면, 늘 그랬듯이 휴게소에서 쉴 때 지갑을 가지고 나갔더라면, 눈밭에서 사진 찍는다며 놀다가 넘어져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바로 들어왔더라면 지갑을 털리는 일은 없었을 텐데 이 모든 우연히 겹쳐 2십여 년 이상 거의 매주 타고 다니던 버스 안에서 처음으로 지갑을 털리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가 신용카드로 표를 끊었다면 신원 추적이 가능하고, 더구나 오래 되어 윤기가 나는 내 지갑에 지문도 남겨져 있을 것이기에 추적이 가능할 것 같아 112에 전화를 했다. 내 돈만 찾고 그 사람이 전과자가 되지 않도록 훈방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친고죄가 아니라 절도죄이기 때문에 범인을 잡으면 내가 원치 않아도 그 사람은 처벌을 받고 전과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청년이 순간 실수로 평생 전과자로 살아가면 안 될 것 같아 신고를 취소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나에게 겹친 여러 우연이 그 젊은이에게는 커다란 유혹의 손길이 되었던 것 같다. 아름다운 겨울밤을 즐긴 값, 다치지 않아 아껴진 병원비, 연말 다른 큰일을 막는 액땜이리라 스스로 위안하기로 했다.

마음을 이리 먹어서인지 2015년 연 초에 재소자를 위한 강연 기부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강연료를 받는 강연 요청이었다면 여러 이유를 대며 거절할 수 있었을텐데 이러한 봉사활동을 계속하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계시다는 어떤 목사님의 요청이다 보니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달라고 부탁하고, 그동안 강연하며 느꼈던 점이나 내가 그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면 도움이 될지 자료도 제공해달라고 부탁했다. 흔쾌히 그러자고 답하시던 분이 갑작스럽게 설 직전에 강연 일정이 잡혔으니 준비하라고 연락을 해왔다.

자료는 특별한 것이 없으니 평소 생각하던 것을 이야기하란다. 그동안 교사, 교수, 학부모, 학생, 행정가, 일반사회인 등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자주 했기에 강연 요청이 들어오면 큰 부담을 느끼지 않고 응했다. 그런데 재소자들을 위한 강연은 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그들의 심리 상태가 어떠한지 등등 전혀 사전 지식이 없는 상황이어서 여간 부담이 크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을 심판한 고등법원 형사부 부장판사, 재소자 강연을 종종한 스님 친구, 재소자 친구를 가지고 있는 지인 등등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언을 구했다.

그들이 해준 이야기 중에서 의미 있게 다가온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절대 감동을 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 그 중 하나이다. 최유라 조영남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는 ‘감동은 없고 재미만 있는’ 프로그램임을 스스로 내세우고 있어서 오히려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고 더 큰 감동도 줄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이 아주 힘든 환경에서 자랐으며, 그 과정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이겨내고 성공적인 오늘의 모습이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면 그들은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래 너 잘났다며 돌아앉게 될 것이라고 했다.

강연 요청을 받았을 때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 중의 하나가 유사한 것이었기에 뜨끔했다. 커다란 고통을 겪은 사람은 세 가지 중의 하나가 된다고 한다. 하나는 마약이나 알콜 중독자, 다른 하나는 정신병자,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철학자이다. 김대중 대통령이나 만델라대통령처럼 감옥에서의 시련을 성공적으로 이겨내어 사회의 큰 기둥이 되자고 이야기하려 했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타지에서 중학교 1학년짜리 형님과 함께 자취를 하며 그 힘든 시간을 잘 견뎌내어 약물중독자나 정신병자가 되는 대신 철학자에 가까운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보일러 대신 연탄을 때던 시절,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을 뻔했던 이야기, 전기밥솥이 아니라 연탄불 위에서 냄비 솥에 밥을 짓고, 반찬이 없어서 맹물에 밥을 말아 먹어야 했던 이야기, 한 해가 들어 쌀과 보리 대신 조를 보내와 도시락도 싸지 못한 채 연명해야 했던 이야기, 세탁기나 냉장고 같은 것도 없던 시절 자취생의 험난한 이야기를 비롯해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의 이러한 이야기가 그들에게는 우습게 다가왔을 것 같다. 따라서 잠시나마 마음을 열고 즐겁게 웃을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해보라고 했다. 이는 감동을 주는 것보다 더 어려운 주문 같았다.

또 하나는 그들은 스스로가 모두 뛰어난 사람들이므로 그들에게 잘난 척 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나오고, 유학 다녀와서 최연소 국립대총장을 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며 현재의 상황에 좌절하지 말고 미래를 꿈꾸며 미래를 만들어가라고 이야기하면 이는 그저 자기 자랑으로 들리기에 재소자들은 마음의 문을 닫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식의 강연은 재소자들만이 아니라 사회 일반인들에게도 동일하게 다가갈 것 같다.

그렇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도움이 될까? 여러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얻은 것 중의 하나는 그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존재 이유를 찾도록 해주라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를 버티게 하는 것은 꿈이고, 그래서 꿈은 나의 존재 이유가 되기도 한다. 재소자 대부분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이 그냥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들을 기다려주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빨리 돌아가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을 때 그들은 의미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기술도 배우고, 모범수가 되어 빨리 출소하고자 한다고 한다.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에게 사죄하며 더 나은 손자가 되기 위해, 그동안 잘 해주지 못했던 자녀에게 더 나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릴 때 그들은 오늘을 의미 있게 살아갈 것이다. 출소 날을 기다리며 준비한다는 것은 자신이 꿈꾸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기술을 배우거나 공부를 하여 스스로를 변화시켜가는 것이고, 기다리고 있는 그들과 편지 등을 통해 만남의 끈과 그리움의 끈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준비하지 않은 채 출소 날만을 기다린다면 생각과 달리 자신을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짐만 될 수도 있다. 어디 재소자만 그러하랴. 여러 이유로 인해 오래 헤어져 있어야 했던 사람들의 만남에도 이러한 원칙은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들의 삶에서 이들을 믿어주고 삶에 의미를 찾도록 도와준 한 사람만 있었어도 스위스 치즈효과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형사재판을 담당한 부장판사의 이야기였다. 그들을 믿고 도와준 단 한 사람, 신앙, 그들을 흔들리지 않게 하는 하나의 꿈은 10장 치즈 사이에 놓인 별도의 치즈 한 장의 역할을 하여 스위스치즈 효과가 나타나지 않도록 막아줄 것이다. 출소했다가 죄를 짓고 다시 영어의 몸이 되는 사람들은 그 한 장의 치즈를 찾지 못했거나 주위에서 아무도 그 한 장의 치즈 역할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나를 스쳐간 청년이 만들어낸 사건, 그리고 그 사건 처리에 대한 내 결정이 그 청년의 미래를 어둡게 한 것이 아니라, 그가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것을 막아서 스위스치즈 효과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그 한장의 치즈가 되었기를 한 해 끄트머리에 서서 소망해본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교육나눔운동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