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한때 하늘같은 권세를 누렸던 검찰 출신 정치인이 있었다. 법망을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니던 그를 국민들은 법꾸라지라고 불렀다. 그의 악행이 하나 하나 드러날때 마다 국민들은 분노했다. 특히 그의 죄책감이라고는 전혀 느끼지 않는 오만한 모습을 보고 국민들은 그를 괴물이라 불렀다.

이쯤 되면 누군지 짐작 할 것이지만, 그래도 법적인 문제를 피하기 위해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그런데 시험괴물이 그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상 유래없는 국정 농단 행위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한 비뚤어지고 줏대없는 엘리트들이 하나하나 드러나면서 국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다들 드러난 면으로만 보면 어느 하나 모자람 없는 훌륭한 경력을 가진 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이 배운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짓에 가담하거나 묵인했을까 하는 혼란스러운 생각에 빠졌다. 결국 많이 배웠음을 시험으로 증명했던 시스템이 그런 괴물을 길러냈다는데 생각이 모였다.

다음과 같은 진술에 대해 거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단지 시험 점수 높다고 중요한 자리에 앉히는 시스템 때문에 우리가 저런 시험 괴물들의 통치를 받았다.

결국 그 정권은 국민의 심판을 받았다. 시험 점수만 높으면 인재로 평가 받고 사회적으로 중요한 자리에 갈 수 있는 그릇된 교육과 선발 체제를 뜯어 고쳐야 한다는 시대 정신도 떠올랐다. 적어도 겉 보기에는 그랬다.

학생들을 줄 세우는 학벌 사회가 잘못되었으며, 이는 단지 주어진 교재와 기출문제 달달 외어서 얻는 시험 점수에만 특화된 비뚤어진 괴물을 길러 이 사회의 지도층에 필요한 도덕성, 감수성, 창의성, 공감능력 같은 것을 지워버린다는 것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감수성, 창의성, 도덕성, 공감능력이 높은 사람을 인재로 평가받고 그런 사람들이 중요하고 책임있는 자리에 올라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에 누가 반대하겠는가? 그게 개혁이고 “사람이 먼저”인 세상 아니겠는가?

사실 이러한 목소리는 2016년의 촛불이 아니라 지난 20여년간 계속 이어져왔던 목소리였다. 사장 하나 바뀌었다고 논조가 180도로 바뀌었던 기자들과 달리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갖은 방해와 억압에도 뉴라이트 교과서 채택율 1% 미만이라는 굳센 기상을 드러낸 교사들의 끈질긴 목소리이기도 했다.

그래서 교사들은 믿었다. 저 비뚤어진 엘리트들을 응징하고 새로 수립된 정부의 시험 점수로 한 줄 세우는 교육을 뜯어 고치겠다는 칠 것이라던 약속을. 12년 공부를 단 하루 시험만으로 그것도 단 한 문제 차이로 갈라놓는 수능을 절대평가로 돌리고, 이렇게 완화된 수능 압력을 바탕으로 고등학교 학점제 등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폭넓고 다양한 학습 경험을 제공하겠다는 대통령의 약속을.

(사진=ebs 캡처)
(사진=ebs 캡처)

그리고 2년이 지났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대통령은 자기 입으로 한 약속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지난 2년간 이 정부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는 유, 초, 중학교 다 건너 뛰고 오직 대학 입시제도를 놓고 국가교육회의니 국민숙려제니 하면서 논란을 일으키다 수능정시가 조금 확대된 것 뿐이었다.

이로써 교육개혁의 시기를 놓쳤고, 동력도 소진되었다. 그래도 교사들은 실망하지 않았다. 적어도 현상유지는 되었으니. 언제 우리가 정부 도움받고 교육혁신 했는가? 묵묵히 하던 일 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힘은 빠지겠지만.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느닷없이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수능 정시를 확대를 확대해야 한다고 아주대놓고 요구했다. 약속을 잊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반대 방향으로 퇴행하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심지어 이 퇴행에 동조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교육부 장관을 불러 겁박하는 모습까지 보여 주었다.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을 보장한다는 헌법 조항이 도대체 어느 나라 헌법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일본 헌법인지, 북한 헌법인지. 분명 대한민국 헌법이지만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덕분에 메가스터디 등 사교육 기업 주가는 10% 이상 급등했고, 대치동 부동산은 통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문의가 폭주했다.

교원 단체 중에서는 현 정권편이 아님이 분명한 한국교총만이 환영의 뜻을 보여주었고, 그 밖의 모든 교원단체, 교육시민단체가 일제히 반발했다. 자유한국당은 빛의 속도로 반응하면서 어서 빨리 수능 정시를 확대하자며 지난 2년간 단 한번도 보여준 적 없던 놀라운 여야 협치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이미 이것만으로도 수능 정시 확대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분명히 드러난 셈이지만 역시 개의치 않았다.

더 나쁜 것은 핑계를 댔다는 것이다. 차라리 수능정시가 옳다고 말했다면, 원래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했다면 토론의 여지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수능정시가 가야할 방향이 아니고, 수시 학종이 미래교육이 지향할 길인건 인정하지만, 국민의 불신이 있고, 공정성에 대한 요구가 커서 어쩔수 없다고 애매하게 둘러 대었다.

비겁하다. 이건 교육자와 국민을 동시에 모욕하는 말이며, 정치인이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말이다. 교육개혁 포기 아니 퇴행의 핑계로 신뢰를 주지 못하는 교사, 혹은 올바른 교육의 방향을 알아보지 못하는 국민의 요구를 대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점잖게 말했다 해도, 이건 국개론의 다른 버전에 불과하다. 더구나 그걸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말하고 있다.

덕분에 온갖 탄압과 방해를 무릎쓰고 일궈왔던 지난 20년간 수많은 교육혁신 노력이 우스갯거리가 되었다. 지금 지난 5년간 혁신학교를 맹렬히 공격했던 수구보수 세력들은 표정 관리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마침 수능 정시 확대를 발표하는 그날 그와 정 반대되는 교육을 주장한 OECD교육국장의 연설은 그야말로 우리나라를 블랙코메디의 무대로 만들어버렸다.

이제 법꾸라지가 국민을 비웃는다. 너희들이 나를 비뚤어진 엘리트, 시험점수만 높았지 인성이 황폐한 괴물이라고 부른 까닭이 뭐냐고 되묻는다. 괴물을 만들더라도 그 과정이 공정하면 그게 올바른 것이며, 그게 너희들의 선택이냐고 되묻는다. 이런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나는 정정당당하게 공정한 시험을 통해 이 자리까지 왔다. 그런 나를 너희는 무슨 자격으로 끌어내렸는가? 그러니 너희가 개돼지 소리 듣는 것이다.”

이쯤 되면, 그 동안 비뚤어진 엘리트들을 비판했던 사람들의 생각이 의심스러워진다. 그 비판은 비뚤어진 괴물들이 엘리트가 되는 세상을 비판하고, 올바른 사람을 엘리트로 키우자는 생각이라고 믿었던 교사들만 순진한 사람 되었다. 그렇게 비판한 사람들이 권력을 잡았으니 이제 제대로 된 교육을 할 수 있겠다고 희망에 부풀었던 교사들만 바보가 되었다.

오히려 자신들도 충분히 비뚤어졌다고 생각하는데 그 자리에 가지 못한 것이 억울했던 또다른 괴물들의 거짓말이었음이 이제야 보인다. 참으로 슬픈 세상이다.

아아, 어째서 노무현을 바보라고 불렀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다. 

권재원 실천교육교사모임 고문
권재원 실천교육교사모임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