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현 징검다리교육공동체 이사장/ 전 서울시교육감

(사진=mbc캡처)

[에듀인뉴스] 인헌고 사태는 곱씹어 볼 만한 구석이 많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학교 마라톤 행사에서 어떤 교사가 반일구호(“NO 아베”)를 선창하며 학생들이 따라 외치게 한 게 발단이었다. 이를 거북하게 느꼈던 일부 학생들이 ‘학생수호연합’(학수연)을 결성하고 정치편향교육의 중지와 사상의 자유를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이들은 “학생을 정치적 노리개로 삼지 말라”며 ‘정치교사’의 사과와 재발방지책 마련을 촉구했다. 보수단체들이 발 빠르게 개입했다. 날마다 학교 정문 앞에서 규탄집회를 열며 정치교사와 정치편향교육은 물론 전교조와 혁신학교를 싸잡아 성토했다. 혁신학교가 전교조와 정치교사, 정치편향교육의 온상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학교가 정치 논란과 취재 경쟁에 휩싸이며 면학분위기에 지장이 초래되자 공식적인 학생회가 나섰다. 학생총회를 열어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학수연의 주장에 과장과 왜곡이 많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인헌고 학생들은 학생총회 명의로 외부 개입 중지를 호소하며 혁신학교 학생들답게 모범적인 자치역량을 보여줬다. 결과적으로 학수연이 대폭 쪼그라들었다. 인헌고 사태는 몇몇 교사와 학생에 대한 보수단체의 고발과 내부 상흔을 남긴 채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학생들은 더 이상 정치편향 교육행태를 용납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인헌고 사태 직전에도 부산의 역사교사 2인이 정치편향교육 시비를 일으켰었다. 이영훈 교수 류의 생각을 가진 한 역사교사는 수업시간에 일본정부의 반도체 관련 수출규제로 악화일로를 걷는 한일관계를 들먹이며 문재인 정부를 비난하길 거듭했다. 듣다 못한 학생들이 스마트 폰으로 일방적인 수업내용을 녹화해서 교육청에 신고했다.

다른 역사교사는 조국사태에서 검찰의 역할을 강하게 비판하는 취지의 시험문제를 출제해 논란을 자초했다. 한쪽이 보수성향이라면 다른 한쪽은 진보성향이라는 점이 다를 뿐, 정치현안에 대한 본인의 판단을 수업과 평가 권한을 통해 학생들에게 주입한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상대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없었던 부산 역사교사 사례와 달리 인헌고 사태는 불가피하게 진영논리가 끼어들었다. 보수단체와 보수언론은 처음부터 인헌고가 혁신학교라는 점과 학사연이 지목한 교사가 전교조 소속이라는 점, 그리고 ‘NO 아베’가 친정부 진영 구호라는 점을 강조했다.

전교조 소속 ‘정치교사’들이 혁신학교의 보호막 속에서 대놓고 진보편향 정치교육을 하는데도 조희연 교육감과 유은혜 교육부가 한통속이 돼 감싸는 것 아니냐는 투였다. 그러자 인헌고 학생들이 그렇지 않다고 증언하기 시작했다. 교육청의 학생전수 조사결과도 이들의 진술에 힘을 실어줬다.

인헌고 사태가 나름 진정 국면에 접어든 지금은, 교육활동의 정치편향 시비가 일어날 때마다 사실 관계 시비를 가리는 것으로 그쳤던 기존 담론구조를 넘어서 정치편향교육을 차단할 근본 해법을 찾아야 할 때다.
     
인헌고 사태는 교육의 정치적 비편향성에 대한 우리 학생들과 시민사회의 요구수준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부산 역사교사 사태 역시 우리 학생들과 시민사회가 더 이상 교사의 일방적인 정치교육 행태를 관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학교교육의 일환으로 논쟁적인 사회현안을 다룰 때에는, 수업시간은 물론이고 문예체 행사에서도, 교사가 오직 교육적인 관점과 감수성에 입각해서 신중하고 균형 있게 접근해야 함을 말해준다.

그래서다. 나는 우리 교육계가 인헌고 사태를 본격적인 정치교육원칙을 수립하고 사회적 합의를 획득하는 일대 계기로 삼기를 희망한다. 드디어 학교민주시민교육의 활성화를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두 가지 사항, 즉, 정치교육의 교육원칙과 교원의 정치기본권에 대해 우리 사회, 특히 교육계가 본격적으로 논의할 시간이 왔다. 
 

(사진출처=민중의소리)

우리나라에선 정치교육이 특별히 민감하고 특별히 필요하다 
 
어떤 나라에서든 수업시간에 정치 주제나 사회 현안을 다루는 게 쉽지 않다. 가치관과 이해관계에 따라 의견이 나뉠 수밖에 없는 본질적으로 논쟁적인 사안인데다 이미 주요 정당과 진영이 입장을 정해놓고 격돌 중인 경우가 많아서다.

이런 상황에서 교사가 최종발언권을 행사하면 자칫 어느 한편을 대놓고 지지하는 모습이 연출되기 쉽다. 더욱이 근현대사에서 일제강점과 국권상실, 해방과 분단, 전쟁과 군사독재를 경험한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사와 관련하여 조심스럽게 다뤄야할 민감한 주제와 논쟁적인 현안이 너무나 많다.

지금도 과거사와 남북관계, 열강외교에 관련된 정치토론에서는 걸핏하면 종북, 좌빨, 친일, 토착왜구, 반민주, 반인권 등 인신공격성 언사가 춤을 춘다.     
 
바깥세상이 민주사회의 바람직한 공론장 모습에서 멀어지고 어지럽게 돌아갈수록 학교민주시민교육과 교사의 역할이 중요성을 더한다. 최소한 학교와 교실에서는 모든 학생이 존중받으며 목소리를 내고 경청되어야 한다. 아무리 민감한 주제라도 세상에서 논란거리가 되는 중요한 사안은 학교에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무엇이 중한지 아이들이 알고 바보가 되지 않는다. 다만 공동선과 공익, 공공재로 향하는 모든 정치의 길은 논쟁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에 민주시민교육, 특히 정치수업은 논쟁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학생들은 집단지성의 작동과정에서 자연스레 교사와 동료학생에게 배우며 성숙해진다.  
 
교사들은 논쟁으로 가득 찬 길의 안내자가 돼 학생들 사이의 논쟁을 촉진하는 역할을 맡게 될 뿐 자신의 판단을 주입, 세뇌하지 않아야 한다. 학생들도 공동선과 공익으로 가는 다양한 길 중에서 어떤 길이 제일 나은 길인지는 실천과 열매를 통해서만 입증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생각을 상대화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지적 독선과 오만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나아가서 학생들은 단순히 현실 인식에 머무르지 말고 작더라도 의미 있는 실천행동과 혁신실험에 도전하도록 끊임없이 격려 받아야 한다. 모두 학교민주시민교육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이렇게 볼 때 10년 후, 20년 후의 한국민주주의의 성패는 학교민주시민교육의 성패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교육청 단위의 사회적 합의 과정이 이미 시작됐다

 
민감한 주제를 위시한 중요한 사회 현안에 대해 학교민주시민교육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계가 민주시민교육, 특히 정치교육의 교육원칙을 합의하는 게 필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지난 9월부터 작지만 주목할 만한 진전이 있었다. 학교민주시민교육을 활성화하려면 학교정치수업의 교육원칙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교원의 정치기본권 확보가 필수적이다. 지금처럼 정치기본권이 없어서 선거와 정당, 정치의 세계에서 공식 차단된 유초중등 교원으로는 학교민주시민교육을 제대로 하기 어렵다. 본인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학생에게 잘 가르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설령 학교민주시민교육의 교육적 필요를 강하게 느끼는 교사라 할지라도 지금처럼 정치교육의 교육원칙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부재한 상태에서는 학교에서 정치현안을 교육적으로 잘 소화해내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일반 진도를 빼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논쟁성이 강한 관련 현안을 제대로 소화해서 수업에 임하는 건 웬만한 열정이 없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현안수업을 했는데 미묘한 부분에서 말 한두 마디로 정치편향 시비에 휩싸일 수 있다고 생각해보라. 이런 상황에서는 논쟁적 관련 현안에 대해서 언급을 회피하는 것이 교사한테 최선의 합리적 선택이 된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어떤 교사가 감히 현안 토론을 포함하며 살아있는 학교민주시민교육을 실시하겠는가. 교사가 보다 안전감을 느끼려면 두 가지 조건이 먼저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교육당국은 정치수업에 관한 바람직한 교육원칙을 수립하고 교사들에게 이를 제대로 연수시켜야 한다.

둘째, 학교장은 위의 교육원칙 이행을 조건으로 교사에게 관련 현안 토론을 포함한 정치수업을 권장해야 한다. 이래야만 학교민주시민교육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될 수 있고 이래야만 한국민주주의가 높은 민주시민 의식과 역량으로 고속 충전돼 보통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교원원탁토론 결과는 지역별, 학교급별, 직급별로 차이가 없다
 
이런 판단 아래 교사정치기본권연대는 시도교육감과 협력하여 지역교총과 전교조지부 소속 교사를 중심으로 교원 100인 이상이 참석하는 중규모 원탁토론회를 지역별로 열기로 결정하고 지금까지 광주교육청과 전남교육청 두 군데서 실천에 옮겼다. 올해 안에 경남교육청과 세종교육청, 그리고 서울교육청에서도 동일 주제로 원탁토론회를 진행할 예정이다.

징검다리교육공동체는 주관기관으로서 진행 책임을 맡았다. 원탁토론회에 참석해서 열정적으로 토론에 임한 현직교사들은 놀랄 만큼 동일한 의견을 제출했다. 교총, 전교조, 실천교사모임, 좋은교사운동, 한교조 등으로 소속과 지향이 제각각인 유초중등 교원들이 모였지만 토론주제에 관한 한 진단과 처방이 다르지 않았다.     
 
참석 교사들은 교원정치기본권이 과연 필요한지,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지, 나아가서 교사들에게 정당 활동의 자유 등 정치기본권이 주어졌을 때 교사들이 교육현장에서 정치기본권을 오남용하지 않으려면 특히 정치교육을 할 때 어떤 교육원칙에 따라야 하는지를 집중적으로 토론했다. 광주교육청에서는 7월 16일, 전남교육청에서는 10월 18일에 진행된 원탁토론회 결과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교사의 정치기본권을 지금처럼 제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사들은 5% 미만으로 드러났다. 교사에게도 정치기본권을 보장해야 할 근거로는 민주시민의 정치기본권을 단지 교사라는 이유로 부정당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인권의 논리가 단연 강했다.

민주시민교육을 잘하기 위해서 정치기본권이 필요하다는 교육의 논리가 두 번째로 많은 지지를 받았다. 교사는 민주시민을 길러낼 법적 책무를 부여받은 유일한 전문직업인이다. 스스로 민주시민이지 않고 민주시민을 길러낼 순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의 일과 정치에 관심과 경험을 갖는 교사일수록 교육적으로 바람직하다. 상대적으로 강한 정치적 관심과 실천 경험은 교사라는 전문직에 고유한 자격요건이자 권장사항이다. 
 
교사는 고도의 정치시민성과 고도의 정치중립성이 함께 요구된다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교사는 공동선과 공익에 관한 정치토론과 실천에 누구보다도 관심과 역량을 갖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정치적 존재로서 학교교육에 임해야 한다. 그러나 학부모와 일반시민들은 정치활동에 적극적인 교사가 수업시간 기타 교육현장에서 자신의 정치적 판단을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주입, 강요할까봐 걱정한다.

이러한 우려를 말끔하게 불식시키지 않는 이상 학부모와 일반시민은 교원의 정치기본권 보장을 반대하기 쉽다. 또한 교원의 정치기본권이 보장된 후에도 학교정치교육의 활성화에는 반대하기 쉽다. 학부모나 일반시민도 논란거리가 된 사회 현안을 학교수업시간에 교육적으로 다루는 편이 교육적으로 바람직하다는 점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뭔가 확실한 안전판이 없는 이상 아이들이 교사의 정치 세뇌 대상이 될까봐 불안하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교육전문가로서 바깥세상의 우려가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교사가 어떤 종교를 갖고 있다고 해서 수업시간에 함부로 포교하지 않는 것처럼 어떤 정당을 지지한다고 해서 수업시간에 그 정당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옹호하고 설득할 리 없다고 자부한다.

물론 교사의 자부심을 덮어놓고 믿어달라고 일반시민에게 호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교직사회가 학교민주시민교육을 활성화하고 정치기본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사 개개인의 정치신념에 따른 일방적 정치교육을 방지할 수 있는 일련의 교육원칙을 찾아내고 사회적 공감을 확보하는 게 필수적이다.  
 
교사들이 만들어낸 정치교육원칙은 보이텔스바흐 합의와 동일하다
 
광주와 전남에서 원탁토론에 참석한 100명 넘는 교사들은 역시 교육전문가다웠다. 매번 1시간도 안 돼 정치교육에 꼭 필요한 핵심적인 교육원칙을 찾아내 합의했다.

첫째, 교사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학생에게 주입, 교화, 세뇌해서는 안 된다. 둘째, 학생에게 다양한 입장을 균형 있게 제시해야 한다. 셋째, 교사는 학생 개개인의 정치적 판단과 선택을 권장하고 존중하여야 한다. 넷째, 학생들에게 정치지식을 넘어 민주시민의 덕목과 역량을 길러주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교육원칙에서 광주의 교사와 전남의 교사가 다르지 않았고 유초중등 교사가 다르지 않았으며 교장과 장학사, 평교사가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광주와 전남에서 교육감과 교원단체 대표들은 학교민주시민교육원칙과 교원정치기본권 회복을 위한 공동선언을 발표하며 학교현장에서 실천할 것을 다짐했다. 경남과 세종, 서울에서 각각 무대가 펼쳐질 때 경남과 세종, 서울의 교사들도 동일한 결론을 도출할 것으로 예상한다.

모든 원탁토론회에선 교사정치기본권 찬성 논거뿐 아니라 반대 논거도 똑같이 강력하게 개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석 교사들의 95%가 정치기본권 확보에 찬성하고 내용적으로 동일한 정치교육원칙을 만들어낸다. 이는 교사의 정치기본권 제약 논리와 정치현안교육 회피 현상에 대해 교사들 스스로가 조금도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말해준다.      
     
정치교육원칙 세우고 교사 정치기본권 보장해줘야 할 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한일 경제 전쟁과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학생들이 일부 교사의 정치편향 행태를 예민하게 문제 삼기 시작했다. 교육당국은 이제부터 정치편향 논란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대응방식에서 벗어나 학교현장에서 더 이상 정치편향 시비가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적 교육원칙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야만 교사가 그에 따라 학교정치교육을 활성화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학교가 세상의 주인이자 변화의 주역인 민주시민을 길러낼 수 있으며, 그래야만 공교육으로 민주주의를 강화할 수 있다. 
 
또 그래야만 헌법재판소도 마음 놓고 교원의 정치기본권을 제약해온 악법조항들을 위헌으로 선언할 수 있다. 교육의 정치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교원의 정치기본권 금압법규가 아니라 교원의 세뇌교육 방지에 필요한 일련의 교육원칙이다.

우리 사회는 교사들이 한 시간만 집단지성을 발휘하면 찾아낼 수 있는 정치교육원칙을 오랫동안 외면하고 교사들의 정치기본권을 박탈해왔다. 인헌고 사태를 계기로 우리사회도 이제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누구나 합의 가능한 정치교육원칙을 세우고 교사들의 정치기본권을 보장해줘야 할 때가 왔다. 

# 이 글은 교육을바꾸는사람들(교바사)와 함께 합니다.

곽노현 징검다리교육공동체 이사장( 전 서울시교육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