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형 청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교육자는 자기 학생들을 알 수 있는 기회 놓치지 않는 법, 그런 기회는 언제나 있다"

[에듀인뉴스-명교학숙 공동기획] 학생들의 인성교육 방향 정립을 위해 고전(古典)을 활용한 교육이 떠오르고 있다. ‘명교학숙’은 이러한 교육계의 움직임을 리드하는 초·중등교사 연구모임으로 동·서양 인문고전을 탐구하고 현장에 적용하는 교육방법론을 연구하고 있다. <에듀인뉴스>는 명교학숙과 함께 고전을 통해 우리 교육 현실을 조명하고 드러난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교사는 학생들이 읽을 수 있는 ‘무자서(無字書)’와 같다

[에듀인뉴스]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Juvenalis, 50?~130?)는 『Saturae』라는 풍자시집을 저술하였다. 유베날리스라는 이름과 그의 작품을 들었을 때 생소한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는 생각보다 친숙한 인물이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이 말은 그의 저서에서 나온 것이다. 또 ‘블랙스완’이라는 용어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것은 로마를 풍자했던 ‘빵과 서커스’라는 말이다.

“옛날 우리는 아무에게도 표를 팔지 않았지만 (현재는)태만해졌다. 통솔권·(높은)직위·군단과 모든 것을 위임했던 시민은 이제 단 두 가지를 초조하게 기대한다. 빵을 그리고 전차 경주를” - 『Saturae』 10권

유베날리스는 로마의 우민화 정책을 풍자하면서 ‘빵과 서커스’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빵과 서커스’는 세태를 비꼬는 말이기도 했지만 당시 로마 제국의 힘을 상상해 볼 수 있는 용어였다.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483~565)가 재위할 때 콘스탄티노플의 인구는 약 50만 명이었다. 황제는 그 50만 명에게 빵을 무상으로 제공하였다. 이에 대해 의심을 품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를 반증해주는 장부가 발견됨으로 인해 50만 명 무상 급식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당시 밀은 이집트로부터 계속 수입되었으며, 도시 전체에 퍼져있는 빵공장에서 빵을 만들었다. 아마도 24시간 365일 빵을 구웠을 것이다.

도시 전체가 빵 굽는 달콤한 냄새로 가득 찼을 것이다. 시민들은 매일 일종의 쿠폰을 빵가게로 들고 가서는 빵과 교환하였다. 유베날리스의 말처럼 빵을 받기 위해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시민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다. 이른바 태평성세를 일컫는 ‘고복격양(鼓腹擊壤)’이라는 말을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로마의 태평성대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으로 유명한 테오도시우스 1세(346~395) 때에도 여전했다. 이러한 로마 제국의 힘은 고스란히 교육에도 영향을 미쳤다. 시민의 자제들은 무상 급식을 받았고, 무상 교육에 준하는 수준의 학교교육을 받았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 초대 그리스도교 교회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이자 사상가. 고대문화 최후의 위인이었다. 중세의 새로운 문화를 탄생하게 한 선구자로 평가받는다.(사진=위키피디아, 설명=두산백과)
아우구스티누스(354~430). 초대 그리스도교 교회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이자 사상가. 고대문화 최후의 위인이었다. 중세의 새로운 문화를 탄생하게 한 선구자로 평가받는다.(사진=위키피디아, 설명=두산백과)

로마 제국이 제공하는 우수한 교육환경에서 자란 인물 중 유럽 지성사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는 지식인이 있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뛰어난 머리와 우수한 교육환경, 그리고 로마 시민이라는 자부심으로 인해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을 법하다. 그러나 그의 유년시절은 암울했다. 왜냐하면 당시 학교에는 교사들의 강압과 폭력이 난무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아우구스티누스는 학교에 가기 싫어했다.

특히 자신이 좋아하는 그리스·로마 신화마저 교사들이 강압적인 주입식 교육으로 가르칠 때는 일종의 공포를 느끼기도 하였다.

이때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그는 ‘지식은 어떻게 획득되는가?’, ‘생각은 어떻게 교환되는가?’, ‘학습 과정에서 가르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등의 문제의식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389년 『교사론』을 저술하는데 그곳에서 모든 의사소통은 지적인 존재의 해석을 전제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주영흠, 2007).

이렇듯 아우구스티누스는 강압적이고 주입식 수업이 존재하는 학교에 적응할 수 없었다. 그렇다보니 항상 학교 밖을 뛰쳐나갔고, 그때마다 종종 문제를 일으키곤 하였다.

어느 덧 그는 문제가 많은 청년이 되었다. 그러나 비상한 두뇌로 인해 학교는 마칠 수 있었으며, 아이러니 하게도 졸업 후 교사가 되었다. 그는 카르타고에 있는 수사학 학교에서 수사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운명의 장난’처럼 보이는데, 그 이유는 ‘문제적 소년’에서 ‘수사학 교사’로 대전환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또한 ‘운명의 장난’이라고 서술할 수밖에 없는 주된 이유는 자신의 청소년 시기와 비슷하면서도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더 문제적인 학생들을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다.

카르타고의 학생들은 엄청난 문제아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들은 항상 학교를 벗어나려고 했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강제적으로 배우는 것에 대한 반감이 사라졌다는 듯이 학생들을 억지로라도 가르치려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교사’와 ‘학생’이 보이는 ‘학습의지’는 왜 이렇게 현격한 차이가 나는지를 고민하였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탐구하였다.

결과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교사의 역할에 더 주목하였다. 그는 서로의 차이를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학생들의 능력과 의지의 차이에 따른 수준별 학습을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에 있어 시간상의 조화를 이루고자 고민하였다.

즉 어떻게 하면 ‘교(敎)’와 ‘학(學)’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가를 고민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고민은 한 인물과의 만남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암브로시우스(340~397) 대주교를 만난 것이다.

암브로시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알아주었다. 암브로시우스의 따뜻한 온화함과 학식에 그는 감동을 받았다.

여기서 잠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논하기 위해 중국 명나라 말기 홍자성(洪自誠)의 『채근담』 후집을 언급하고자 한다. 홍자성은 그의 저서에서 두 가지 종류의 책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은 글자 있는 책(有字書)은 풀어 읽을 줄 알지만 글자 없는 책(無字書)은 읽을 줄을 모르며, 줄 있는 거문고나 뜯을 줄 알았지 줄 없는 거문고는 뜯을 줄을 모른다. 흔적으로써만 사용하고 정신으로서 사용하지 못하니 어떻게 거문고와 책의 정취를 얻을 수 있겠는가?” - 『채근담』 후집

세상의 책을 글자가 있는 책과 없는 책으로 나누고 있다. 글자가 없는 ‘무자서’는 사람·자연·물건 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암브로시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무자서(無字書)’와 같은 인물이었다. 즉 스승은 제자에게 있어 글자가 없는 한 권의 책(고전)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스승 암브로시우스를 열심히 읽었다. 그를 닮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훌륭한 ‘무자서’와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이때 아우구스티누스는 교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체감하였다. 교사의 인격적 관심과 사랑이 학생의 학습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가 고민했던 교사의 가르침과 학생의 배움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음을 직접 경험했다고 볼 수 있다.

아주 기본적인 이야기이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4세기 고대 유럽이었다. 21세기에서 잘 실현되지 않는 이야기를 교육의 해법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이 교사를 읽고자 하는 욕망이 생길 때 교육 현장은 행복해 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교사가 학생을 알아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알아준다는 것’과 ‘알기 싫다는 것’에 대한 고사와 고전을 통해 그 결과를 알아보자.

알베르토 카뮈(1913~1960). 알제리 출신 프랑스 작가인 카뮈는 인간이 처한 실존과 정의의 문제를 제기하며 사르트와 함께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불린다.(사진·설명=노벨문학상 작가 열전)
알베르토 카뮈(1913~1960). 알제리 출신 프랑스 작가인 카뮈는 인간이 처한 실존과 정의의 문제를 제기하며 사르트와 함께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불린다.(사진·설명=노벨문학상 작가 열전)

‘알아준다는 것’과 ‘알기 싫다는 것’

1957년 10월 ‘오늘날 인간의 의식에 제기되는 제반 문제들을 조명한 작품 전체에 대한’ 노벨상이 선정되었다. 수상자는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였다.

그러나 수상의 영광 뒤에는 가난의 고통이 자리 잡고 있었다. 카뮈의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전사했고, 당시 어머니는 청각장애인이었다.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장애로 인해 카뮈의 삶은 고난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고난의 긴 터널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기적은 가끔씩 존재한다고 봐야 할까? 힘든 유년시절 카뮈는 초등학교 교사 루이 제르맹을 만나게 되었다. 루이 제르맹은 카뮈에게 있어 기적과도 같은 존재였다. 제르맹은 관심과 애정으로 카뮈를 도와주었고, 카뮈 역시 스승의 본심을 알았다. 그렇기에 그는 묵묵히 문학 활동에 전념하였다. 1942년 『이방인』이 발표되자 카뮈는 일약 문단의 슈퍼스타가 되었다.

이 후 그는 44세의 젊은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역대 최연소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러디어드 커플링(Rudyard Kipling, 41세 수상)이었다. 카뮈는 그에 이어 역대 두 번째 최연소 수상을 기록하였다.

아마 수상식 당일 카뮈의 머릿속에는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힘들었던 시절 자신을 알아주고 물심양면 도와주었던 초등학교 은사 루이 제르맹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을 루이 제르맹에게 헌정하였다. 이 모든 것은 1923년 루이 제르맹이 10살의 카뮈를 ‘알아주었음’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홍문영 유지에 조성되어 있는 범증(BC.277년 ~ BC.204)의 상.
홍문영 유지에 조성되어 있는 범증(BC.277년 ~ BC.204)의 상.

반면 ‘알기 싫다는 것’도 있다. 중국 진나라 말기 ‘범증(范增, BC277~204)’이라는 뛰어난 책략가가 있었다.

『사기』 항우 본기에 의하면 범증은 항량·항우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항씨 집안의 제일가는 책략가가 되었다. 범증은 항량이 죽자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項羽, 232~202)를 주군으로 삼았다. 범증과 항우는 표면적으로 군신관계였지만, 항우가 범증을 ‘아보(亞父, 아버지)’라고 호칭할 정도로 그를 따랐다.

항우는 어릴 적 부모님을 여의였는데, 그런 그에게 범증은 아버지이자 스승같은 존재였다. 범증은 항우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항우 역시 범증의 가르침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이간계’에 걸린 항우에 의해 불신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항우는 범증을 점점 의심하였고,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분노한 범증도 항우를 멀리하고자 하였다.

항우는 범증과 한왕(유방)이 개인적으로 내통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하였다. (그래서) 조금씩 범증의 권력을 빼앗았다. 이에 범증은 크게 분노하며 “천하의 일이 크게 정해졌으니 주군 스스로 알아서 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늙어 죽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항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범증은) 팽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등창이 도저 죽었다. - 『사기』 항우 본기

범증은 BC 204년에 사망하였고, 항우 역시 2년 뒤인 BC 202년에 사면초가를 겪으면서 전사하였다. 항우의 범증을 향한 ‘알기 싫은 의심’도 문제였지만 스승 범증 역시 ‘알아 가고자 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두 사람 모두의 몰락이었다.

만약 항우가 범증의 말을 따라 패공(유방)을 ‘홍문연’에서 죽였다면, 천하의 패권을 잡았을 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항우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면, 즉위식 날 항우가 범증에게 고마움을 표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항우와 범증은 서로를 알아주지 못했다.

루이 제르맹과 카뮈가 서로를 ‘알아준 것’은 상생의 길이었고, 범증과 항우의 ‘알기 싫다는 것’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죽는 것임을 알게 해준다.

교사와 학생의 만남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교사가 학생을 알아주고자 하지 않을 때 두 사람의 관계는 한 사람만 사는 것이 아닌 둘 다 죽게 되는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사가 학생을 알아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루이 제르맹은 카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너(카뮈)는 언제나 너의 타고난 성격과 감정들을 드러내는 것에 대하여 본능적으로 부끄러움을 표현하였지. 너는 단순하고 직설적이어서 그 점은 효과적이었단다. 그리고 정말로 착했지. 그런 인상은 내가 교실에서 받은 것이다. 자기 직업을 꼼꼼히 수행하고자 하는 교육자는 자기 학생들, 자기 자식들을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법이고 그런 기회는 언제나 있는 법이란다.

 

대답 하나, 행동 하나, 태도 한 가지도 많은 것을 드러내는 것이지. 그래서 나는 그 착한 꼬마 녀석이었던 너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 흔히 아이는 장차 그가 될 인물의 싹을 담고 있는 법이야. 교실에서 보면 너의 즐거워하는 모습이 눈에 훤히 보였지. 너의 얼굴에는 낙관적인 마음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너를 세심하게 관찰하면서도 나는 한번도 너의 실제 가정 형편은 짐작도 못했단다. (중략) 너는 언제나 모자란 것이 없었다(알베르 카뮈, 김화영, 1995).”

‘교육자는 자기 학생들(자식들)을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법이고 그런 기회는 언제나 있다’는 문장에서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루이 제르맹이 교실에서 카뮈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지금 한국 교실에는 카뮈와 같이 다양한 분야에서 천리마가 되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는 학생들이 있다. 과연 그 천리마들은 누가 알아봐주는가?

(이미지=픽사베이)
(이미지=픽사베이)

누가 천리마를 알아봐주는가?

당송팔대가 중 한명인 한유(768~824)는 명문을 많이 남겼다. 대표작으로 『원인(原人)』, 『원도(原道)』, 『사설(師說)』 등이 있다. 한유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스승에 대한 글을 남겼으며, 그의 공부법은 현재에도 유효한 방법론이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을 알아주는 자를 만나야 만이 재능을 꽃 피울 수 있다는 『잡설(雜說)』이라는 작품이 있다. 『잡설(雜說)』은 비교적 짧은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전달의 의미가 깊다고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모든 교사가 한번쯤은 읽어보고 난 뒤 교실에서 학생들을 바라본다면 그 전과 이후의 시각이 달라 질 수도 있을 것이다. 문장과 의미는 다음과 같다.

世有伯樂, 然後有千里馬. 千里馬常有, 而伯樂不常有.(세상에 ‘백락’이라는 인물이 있고 난 뒤에 천리마가 있을 것이다. 천리마는 항상 있었지만 백락 같은 이는 늘 있지 않았다.)

『잡설(雜說)』의 첫 문장이다. ‘백락’은 사람이름인데 본명은 손양(孫陽)이다. 그는 주나라 때 인물로서 말을 잘 감정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와 관련된 고사성어가 많은데 대표적인 것으로 ‘백락일고(伯樂一顧)’가 있다. 성어의 의미는 명마도 백락을 만나야 세상에 알려진다는 것과 백락이 한 번 돌아보자 가치가 올라갔다는 것이다. 즉 백락은 명인이었던 것이다.

첫 문장의 의미를 살펴보자. 천리마는 항상 있었지만 그 천리마를 알아보는 백락이 없기에, 어느 말이 천리마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말을 알아보는 이가 백락이라면, 응당 학생을 알아보는 이는 교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백락과 같은 명인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그 노력은 소홀히 할 수 없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故雖有名馬, 秪辱於奴隸人之手, 騈死於槽櫪之閒, 不以千里稱也.(그러므로 비록 ‘명마’라 할지라도 단지 노예의 손으로 모욕을 당하거나, 마구간에서 보통 말과 함께 죽어가고 있다면 천리마라고 불리지 못하는 것이다.) 

자칫 조금은 슬픈 이야기내지는 오해할 수 있는 문장이다. 모든 학생이 다 천리마와 같은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평범한 학생이 잘못된 것도 아니다. 이 문장을 통해 우리 교육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수준별 학습이 아닌가 싶다. 

馬之千里者, 一食或盡粟一石. 食馬者不知其能千里而食也.(말이 천리를 갈 때에는 간혹 한 번씩 곡식 한 섬을 먹을 수도 있다. (그런데)말을 먹이는 자가 그 말이 천리를 달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모르고 먹인다.) 

是馬雖有千里之能, 食不飽力不足. 才美不外見. 且欲與常馬等, 不可得. 安求其能千里也.(이 말이 비록 천리를 달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하여도 먹는 것이 가득차지 않으니 힘쓰기에 부족하고 (그로인해)재능의 훌륭함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천리마가)보통 말들과 같아지려고 해도 될 수 없으니, 어찌 천리를 달릴 수 있기를 바라겠는가?)

학생이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간혹 교사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할 때가 있다. 그 때 그 말을 들어주는 교사가 학생의 능력에 맞게 대응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렇게 되면 학생의 능력이 제대로 발현 될 수 없다. 따라서 교사의 정확한 도움이 중요함을 알게 해주는 문장이다. 

策之不以其道, 食之不能盡其材. 鳴之不能通其意. 執策而臨之曰.(채찍질을 하는데 도리(道理)로써 하지 않고, 먹여주지만 재능을 다 발휘할 수 있을 만큼 진심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울어도 그 뜻을 알아주지도 못하면서 (도리어)채찍을 잡고 다가서서 말하기를 ‘천하에 명마가 없다.’고 한다.) 

天下無良馬. 嗚呼其眞無馬耶. 其眞不識馬耶.(아! 진실로 말이 없는가? 진실로 말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인가?)

문장의 마무리 단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학교 현장에서 일어나는 많은 것들과 일치시킬 수 있다.

학생들을 훈계할 때는 도리(道理)로서 해야 하며, 가르침과 배움의 현장에서 학생의 재능이 잘 발휘될 수 있도록 교수법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생활지도나 상담에 있어서 학생들이 무엇이라 말하는데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하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그 뜻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서 ‘우리 학교’, ‘우리 교실’, ‘우리나라’에는 인물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각 분야에 적합한 훌륭한 학생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그 학생들을 지금도 못 알아보고 있는가? 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상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 천리마는 학생이다. 그 천리마를 알아봐주는 것은 백락이 아니라 교사인 것이다.

약 1200년 전 쓴 글이기는 하지만 현재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유의 『잡설(雜說)』은 비단 학교 현장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 전반에 걸쳐 내가 내 주변의 사람들을 잘 알아보고 있는 것인가? 를 질문하게끔 만드는 문장이다.

이것이 고전의 힘이다. 독자들도 『잡설(雜說)』을 통해 조금의 도움이라도 얻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한창려선생집』  『채근담』  『사기』 주영흠, 『아우구스티누스 교육사상』, 학지사, 2007 아우구스티누스, 김성웅 옮김, 김용규 해설, 『고백록』, 포이에아, 2014.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최초의 인간』, 열린 책들, 1995.

김도형 청계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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