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원 경기 위례한빛고 교사

수능 만점자 보도에 숨어 있는 불편한 진실들

(사진=kbs 캡처)

[에듀인뉴스] 일부 N수생에게 미리 성적이 공개되는 바람에 어수선한 가운데 발표된 2020학년도 수능 성적. 올해도 어김없이 수능 만점자를 추켜세우는 보도가 여기저기 쏟아지고 있다. 올해는 교육부가 정시를 40%까지 확대하고 난 뒤끝이라 보도의 방향이 예사롭지가 않다.

현재까지 나온 기사들을 종합해보면 만점자는 총 15명이고, 그 중에 재수생이 2명, 고3 재학생이 13명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처음 교육과정평가원 발표가 있었을 때에는 드라이하게 이 같은 통계치만 보도하더니 점차로 각 지역에서 누가 만점을 받았는지가 속속 알려지기 시작하자, 20세기 학력고사 시절 전국 수석 미담기사 같은 철지난 보도 양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올림픽 금메달을 따거나 해외에서 국위를 선양하는 활동을 한 사람에 대한 기사라면, 여러 스토리텔링이 덧입혀져도 약간의 팩트 왜곡이나 과장이 있다 해도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 그러나 시험 성적을 갖고 벌어지는 일들은 그렇게 단순하게 좋아해줄 수만은 없다. 

수능 시험을 망쳤다고 자살하는 학생이 나오는 현실에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처절한 영화가 나오던 학력고사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만점자 미담 기사를 우리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신문에 보도되는 건 모든 만점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나마 기자들에 의해 선별하고 선별해서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것들을 최대한 수집해서 나온 것이다. 만점을 받았다는 것 자체는 대단한 것이지만, 그 이면의 미담들에 대해서는 기사에서 메신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그리고 그것이 가져올 파급을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가장 눈에 띈 것은 지역에서 만점자를 바라보는 태도다. 얼마 안 되는 만점자를 배출해 그런지 ‘도내 유일’이라는 수식어가 눈에 띈다. 심지어는 만점자를 배출하지 못한 도에서는 ‘도내 만점자 없어’라는 표현으로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여전히 우리에게 대입 시험 자체가 계층사다리이며 입시를 통해 입신양명을 꿈꾸는 소망들을 대중들이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이 수도권에 비해 소외되어 있는 지방에서 더 크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중앙일간지에서 가장 많이 보도된 사례는 식당에서 일하는 홀어머니를 둔 수험생 사례다. ‘전교 꼴찌’와 ‘기적’이라는 수식어가 나란히 연결된다. 행간을 읽어보면 중학교 때부터 가능성이 보이는 학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교 꼴찌의 성적도 반 배치고사 성적이었기에 액면가 꼴찌로 바라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무엇보다 재학 중인 학교가 외고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러한 꼴찌가 아니다. 전교 꼴찌에게 엄청난 기적과 역전이 가능한 것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이미 1학년 첫 정기 시험에서 가장 낮은 성적이 수학이었어도, 그마저도 외고라는 것을 감안하면 절망적인 성적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이 사례는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양호한 스토리텔링이다. 아마도 최고의 압권은 서울에 있는 외고에서 내신 4등급을 받아 좌절했다는 기사일 것이다. 조국의 딸이 받았다는 그 4등급이 수시 합격으로 나타나면 엄청난 의혹이 되고, 수능 만점으로 나타나면 대역전극이 된다. 정치적 문제를 떠나 서울에 위치한 외고의 실제 학력을 감안하고 냉철하게 현실을 봐야지, 이걸 무슨 전국단위 4등급 수준으로 봐서는 안 된다. 

신문기사들은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지만, 신문에 보도된 만점자 분포를 보면 가장 먼저 보도해야 할 것이 만점자를 추켜세우는 영웅서사의 창조가 아니라, 그들의 출신학교 분포에서 느낄 수 있는 구조적 문제를 접근하는 심도 있는 기사를 써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 중3 학부모들이 보내고 싶어하는 고교 3종 세트. 바로 특목고, 자율고, 교육특구 소재 고등학교이다. 이미 이름에서 OO외고라는 타이틀이 붙은 학교가 많이 보인다는 것에서 특목고의 위상을 확인하게 된다. 

혹시나 해서 학교 명칭으로는 일반고와 구별되지 않는 학교들의 이름을 검색창에 쳐서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다. 학교 소개에서 전국단위 자율고임을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있었다. 특목고도 아니고 자율고도 아니라서 반가운 마음이 든 상태에서 홈페이지를 닫으려는 순간 학교 주소가 눈에 들어온다. 지방에 있으면서도 서울까지 그 명성이 자자한 교육 특구의 이름이 보인 것이다. 적어도 언론에 보도된 사례에서 3종 세트에서 벗어난 학교는 하나도 없었다.

가장 어처구니없는 기사는 학원 보도 자료를 베낀 듯한 언론보도였다. 재수생이 만점을 받은 모양이었다. 출신학교가 드러나지 않은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학원의 이름이었다. 학교를 알기 위해 더 정보를 캐고 싶지도 않았다. 정말로 내가 보고 싶어 하는 학교 이름이었다면 언론에서 먼저 찾아 보도를 해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의 특목고에서 나왔다는 만점짜리의 아빠가 다니는 회사는 공기업이었다. 신문은 평범한 맞벌이 가정에서도 이렇게 공부를 잘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보도를 하였지만, 도대체 저게 무슨 소리인가 눈을 껌벅껌벅하게 된다. 

지금 공시생 이야기가 늘 언론에서 보도가 되고 있는 현실에서 공기업을 다니는 아빠를 두었다는 것이 무슨 역경을 극복한 것이라는 식의 미담이 될 수 있는 건가? 우리는 얼마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수능 만점이 나올만하다고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20세기 학력고사 만점자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장래희망 보도이다. 20세기 시절에는 인문계의 기준이 서울 법대가 되긴 했어도 자연계에서는 유전학이나 천문학 등 매우 다양한 학문들을 공부하겠다는 장래희망이 보도되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어떨까?

단 하나의 예외 사례를 제외하고는 의사와 법조인이 장래희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직업들이 개천에서 용으로 승천하는 지름길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역의 어느 만점자는 이미 다른 의대를 다니고 있음에도 일류대 의대를 다시 진학하기 위하여 수능 시험을 다시 본 케이스였다. 같은 의사여도 강고한 학벌 구조가 동일한 직업군 내에서마저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도록 한다.

가장 걱정되는 인터뷰는 검사와 의사가 만점자 한 명의 입에서 동시에 나온 사례였다.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직업이 한 사람이 동시에 희망할 수 있는 장래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그리고 그곳이 외국어 영재를 기르는 외고라면 말이다.

천편일률적인 공부 과정을 보도하는 형태도 교사 입장에서는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교과서를 중심으로 학교 수업 충실히’ 식의 보도. 사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다는 보도에서 ‘전혀’는 매우 과장된 표현이다. 인강은 받았다고 나오는데, 인강이 사교육이 아닌 걸까? 

그래도 이건 애교에 속한다. 대치동 학원을 가지 않은 사실을 두고 사교육을 받지 않은 식으로 표현한 신문 기사도 나왔다. 집 근처에 있는 학원에만 다녔다는 것이다. 전국 단위 우열반  효과를 가져 오는 특목고 재학생 사례를 일반화할 수 있는가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서울 시내 한복판의 외고에 다니는 학생이 집 근처 학원을 다닌 것을 두고 사교육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는 식으로 보도하는 건 아무리 스토리텔링의 요소를 감안해도 정도가 심하다. 인강을 제외하는 것까진 모르겠지만, 대치동 학원을 가지 않았기에 사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식의 표현이 말이 되는 건가?

입시는 개인의 욕망을 드러낸다. 요즘 아들이 2차 지필평가 기간이라면서 공부를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함께 공부를 도와주는 아빠와 함께 해나가는 아들의 모습에는 분명 어떤 욕망이 발현되는 부분이 존재한다. 교육정책을 꾸리면서 이런 개개인들이 가진 욕망을 깡그리 무시한다면 그건 정책 실패를 불러올 것이다. 교육에서 특히 이런 이상주의적 모습을 경계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적으로 욕망 추구를 인정해야 한다는 극히 우파적 논리를 펴는 이들이 매우 이상주의적 실험실 상황을 가정하면서 입시 현실을 재단하는 것이다. 전혀 현실적이지 않는 현실주의. 이는 그 현실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오도된 현실을 가르쳐주며 존재하는 교육 모순을 은폐하게 만든다.

그럴 가능성은 없겠지만, 설사 우리 아들이 수능 만점을 받는다 해도 교사를 직업으로 둔 아빠가 있는 가정을 평범한 맞벌이 가정이라고 보도하면서 윤색하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부모가 공기업을 다니거나 행정직 공무원이거나 교사라면 이는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자식을 만점을 향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물적 기반을 쌓아놓고 있는 계층이라고 봐야 한다. 도대체 우리가 언제부터 이런 가정에서 나오는 우등생들이 마치 특이 케이스인 것처럼 대우하는 사회가 되었는가 말이다.

수능 만점자 보도는 신중해야 한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보도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보도 하나하나가 우리 교육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수많은 패배자들이 그 기사를 읽게 된다. 학교 수업만으로, 기본에 충실하고, 사교육 하나 받지 않고,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 만점을 받았다는 보도를 액면 그대로 보면 마치 이 사회는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우연히도 머리가 아주 좋게 태어나거나, 적어도 부모가 중산층 가정이거나, 중학생 때부터 공부를 잘해서 특목고를 간 학생들에게 주어진 특혜다. 자기가 성취한 것들이 오롯이 자기 혼자만이 이룩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배려와 때로는 자원몰아주기를 통해서 얻은 것일 수도 있음을 알게 될 때 좀더 어려운 이웃과 소외된 사람을 돌아보는 엘리트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15명 사례 중에서 그나마 스토리텔링을 만들 수 있는 일부 사례를 모아 수능은 공정하며 누구나 공평한 기회가 열려있는 것처럼 포장하는 것은 이제 20세기 유물로 보낼 때가 되었다. 적어도 학력고사 시절보다 만점짜리가 두 자리 숫자로 늘어날 정도로 아이들의 학력이 높아졌다면, 신문 기사도 그에 비례해서 수준이 높아져야 되지 않을까?

전대원 경기 위례한빛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