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공학, 우주와 같이 놓고 보면?"...듀이의 지력 개념⑤ 관조적 지력과 생산적 지력
"기술공학, 우주와 같이 놓고 보면?"...듀이의 지력 개념⑤ 관조적 지력과 생산적 지력
  • 서혜정 기자
  • 승인 2020.01.02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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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교육부 장관

[에듀인뉴스] 교육계와 교육학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학계에서도 존 듀이(John Dewey)는 누구에게나 이미 잘 알려진 이름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알려진 만큼 그의 이론이 잘 이해되고 소개되어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의 사상은 ‘실용주의’, ‘실험주의’, ‘진보주의 교육’, ‘새교육’이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어 왔고, 우리의 교육계와 교육학계는 그를 현대적 교육사상의 근원인양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교육계에서 심도 있게 평가된 수준은 아니었다. 에듀인뉴스는 정치와 교육의 이념적 갈등이 극심하고 특히 자유주의적 전통과 강령적 기조에 대한 이해의 혼란이 심각한 수준에 있는 이 때, 존듀이의 실험주의적 자유주의와 이에 관련한 교육사상을 검토해 보는 ‘왜, 지금 존 듀이를 읽어야 하나’를 연재한다.

(이미지=픽사베이)
(이미지=픽사베이)

기술공학의 가치를 경시한 과거 철학자들에 대한 비판

[에듀인뉴스] 듀이는 과거의 철학자들 대부분이 기술공학(Technology)의 중요성과 그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비판을 면할 수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기술공학에 대한 상대적인 부정적 편견은 대개 두 가지의 경향으로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기술공학적 활동에 종사하는 기술공이나 공예가들이 하는 작업의 내용과 소재들은 그때그때 쓰고 버리는 일시적인 것들이며, 이론적 지식을 다루는 경우와 같은 항구적 유용성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러한 일은 주로 무엇인가를 제작하거나 손발을 움직이는 활동에 종사하는 계급의 사람들이 맡은 천한 일이라는 편견이 있다.

다른 하나로는 기술공학적 방법이 바로 우리의 사회적 삶을 민주화하는 원리일 수 있다는 생각, 즉 민주적 사회를 만들고 유지하는 과정도 어떤 의미에서 기술공학의 방법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온갖 기술과 방법들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우리는 매일같이 그것들을 사용하고 개발하며 거물처럼 엮으면서 삶 자체를 영위하고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일을 평생의 과업으로 계속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든 순간이 기술과 방법을 사용하고 만들어가는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듀이는 1892~1898년 초기 저술에서 과학과 산업기술 그리고 일반학교와 기술학교의 차이와 관계를 다루는 데 관심을 바친 바가 있고, 1899~1924년의 중기 저술에는 인간 지력과 기술공학의 관련성에 관한 논의에 무게를 둔 적이 있다. 1925~1952년의 말기 ‘경험과 자연’(1925), ‘경험으로서 예술’(1934)에는 인간의 지력이 실천적-생산적 활동과 어떤 관련을 가진 것인가를 다루는 상세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그는 고대와 근대와 현대의 기술공학을 철학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많은 쟁점과 논의를 제시하고 논의하기도 하였다.

듀이의 주장에 의하면, 과거의 철학자들은 과학과 형이상학과 사회사상에 비해 기술공학을 가장 잘못된 관심의 대상으로 제쳐 놓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각기 차이는 있지만, 공히 ‘공학적 솜씨’와 같은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무엇인가를 다듬어 만드는 장인(匠人, Artisan)의 손길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보고, 사유하는 인간은 변화 가능한 물질과 상호작용하는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외면해 버렸다.

특히 플라톤은 세계를 만들어 가는 일종의 거대한 손이 있지만 그것은 자연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고,1)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 그 자체를 거대한 손으로 보았지만 그 손은 자체로서 관조적 사유의 대상이 되는 고정된 목적이지 무엇을 위한 도구적 기능을 하는 개념은 아니다.

1) Plato, Timaeus

그 결과는 기술공학의 의미를 왜곡한 정도가 아니라 과학과 사회적 탐구의 성장을 방해하였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론’은 방대한 사회사상적 논의를 담고 있지만, 인간 경험의 완전한 의미를 충실히 담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 논의로 서술하여 특히 민주주의와 인간 경험과의 관계를 비켜가게 만들었다.

감각과 경험은 진리의 세계, 즉 이데아의 세계에 접근할 수가 없다. 플라톤은 ‘기술’(Techne)의 개념을 한편으로는 생산적인 활동에 종사하는 기능적 활동에 한정하여 사회-정치적 구조의 최하위에 속하는 생산자 계급의 속성에 관련시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시에 기술을 ‘비물질적 형상’으로 특징지으면서 전체주의로 구상한 국가의 사회공학적 구조에서 통치자 계급의 가장 순수하고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속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플라톤은 기술의 실천에서 사용하는 힘의 효율성은 밝히면서 그 개념은 신체적 경험으로 활동하는 생산계급의 경우와 이성적 사유로 이데아를 관조하는 통치계급의 경우는 그 특징에 있어서 확연히 다른 것으로 서술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도시국가는 자연에 의해서 ‘주어진 목적’에 근거하여 정당화된 것이고, 기술을 구사하면서 목적을 실현하는 생산자의 활동은 플라톤의 경우와 같이 매우 엄밀하게 승화된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 실천자인 거대한 손은 철인왕의 관조에 의존하는 초자연적 체제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이다. 초자연적 실체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플라톤 보다는 자연에 충실한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그도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장인의 작품이 지닌 창조적이고 사회적인 가치를 그 내용과는 무관한 다른 곳에 옮겨 놓았다.

(이미지=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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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기술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듀이의 평가

듀이는 과학에 대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관념은 당시에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기술에 대한 잘못된 태도의 일면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것들을 싫어하는 경향으로 인하여 기술공학의 내용과 과제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반면에, 영구적이고 불변적인 것을 즐겨 추구하는 과학(학문)에 이지적 관심을 집중하였다.

일시적 변화를 조작하여 무엇인가를 만드는 기술적 작업보다는 이미 완성되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을 밝히려는 이지적 과학의 사유기능이 인간의 수월성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였다. 과학은 무엇을 만들고 변화시키는 활동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의 관조를 통하여 진리를 밝히고 그것을 증명하는 사유의 형식이었다.

이와 관련 듀이는 탐구의 행위가 이미 본질적 특성이 어떤 것이라고 인정된 영역과 대상에 집중하게 되면 실제로 존재하는 그대로의 사물에 관한 지식의 확충을 기대하기가 어렵다고 보았다.

이러한 한계는 그 탐구가 기술공학적 재료와 작품에 관한 것이든지, 자연의 개념적 모형에 관한 것이든지, 혹은 사회적 조직이 형성되는 방식에 관한 것이든지 그 어느 경우에나 마찬가지다.

근대과학의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갈릴레오(Galileo), 케플러(Kepler), 뉴턴(Newton) 등에 관해서도, 듀이는 그들이 과학의 진보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사유(思惟)의 노력보다는 실천의 활동에 기인한 바가 더 크다고 보았다. 그리고 당시에 그들의 참신한 이론은 분명히 과학적 활동을 한층 더 진보된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러한 과학에 관련한 형이상학, 인식론과 같은 메타이론은 그 실질적 과학이론들의 참신성을 파악하는 데 실패한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도 수학에서 대입법과 같은 새로운 기법은 높이 평가하였고 극한에 이르는 교환과 전환의 체계를 구성하였다고 언급하였다. 그리하여 과학적 사고의 내용들은 상호간의 대입에 의하여 서로의 변형이 가능하게 되었다.2)

2) Dewey, Experience and Nature (Carbondale, Ill.: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1981), LW1. p.115

그러나 새로운 과학에 관한 당시의 형이상학과 인식론은 이미 더 이상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세계, 즉 ‘종결되어 버린 세계’에 관한 낡은 관념에 여전히 몰두하고 있었다.

(이미지=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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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이는 과학의 진보를 어떻게 평가하나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근대적 과학의 과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공식적 견해는 여전히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경향이 있었다. 추정적 진리, 논리적 추론, 확언적 결론 등의 규칙에 매여, 오늘날 정초주의(Foundationism), 대응설적 진리관에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듀이는 17세기의 새로운 과학은 과학의 진보 그 자체에서만 아니라 사회적 생활양식에 민주적 방법을 이끄는 변화를 가져왔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새로운 과학의 특징으로 지식이란 확실성을 밝혀가는 작업이지 추정적 방법에 의한 확실성이 확보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자료 혹은 소재에 대한 탐구 그 자체는, 갈릴레오가 그랬듯이, 더욱더 개념적 다양성을 유발하는 조건이 되며, 새로운 방법론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한층 더 구체적인 응용을 가능하게 한다.

듀이는 기초과학과 기술공학의 관계에 관한 논쟁에 중요한 기여를 한 셈이다. 중요한 것은 탐구의 자료에 관련한 지력은 우리가 흔히 과학이니 사회사상이니 하는 부문에 관련된 지력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탐구 방법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세계의 지식이 발전하자면 두 영역이 서로 협동적인 관계에 있어야 한다.

듀이는 ‘경험으로서 예술’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강하게 지적한 바 있다. 즉, 예술작품을 생산하는 데는 지력의 역할이 필수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편견은 우리의 사고란 그 특징상 오직 언어나 기호 등의 상징적 수단을 사용할 때에만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화가나 조작가가 여러 가지 질성들의 관계를 소재로 하여 작품에 몰입하고 있을 때, 그는 수학자나 과학자가 언어나 기호를 가지고 사고하는 것에 조금도 못지않은 엄격성을 유지하고 있다.

실제로 언어는 쉽게 기계적인 방법으로 다루어질 수 있지만, 예술작품을 생산하는 데는 아마도 ‘지식인’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소위 ‘사고’라고 일컫는 활동에 종사하는 어떤 경우보다 더 많은 지력이 요구될 것이다.3)

3) Dewey, Art as Experience (New York: The Berkeley Publishing Group, 1934), pp. 236-7.

‘실용적’이거나 ‘기술적’인 작품들도 이러한 범주에 포함하는 데는 다소 주저함이 없지 않았지만, 듀이는 적어도 ‘예술’이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행하거나 만드는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며, 기술공학적 예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듀이에 의하면,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시대의 근대철학도 기술공학을 제자리에 두고 평가하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철학이 관조적 형이상학, 추정적 진리, 논리적 추론, 확언적 결론에만 충실하고자 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분석은 쉽게 합리론자들만을 등지고 경험론자들의 편에 서지는 않았다. 근대철학자들 중에는 감각작용에 의한 추정적 진리를 수용함으로써 이성에 의한 추정적 진리를 인정하는 경향도 있음을 지적하였다. 근대적 경험론 자체도 똑같이 터무니없이 일종의 기초주의를 수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미지=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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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기계를 같은 것으로 보면?

근대에는 많은 철학적 논의들이 자연을 하나의 거대한 기계와 같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듀이도 다윈의 그늘 속에 살면서 그 영향을 받았지만, 그는 ‘기계’라는 은유적 개념 대신에 ‘유기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당시에 기계적 세계관을 초월한 경지의 철학적 이론에서도 방법론적으로는 여전히 기계적 특징들이 사실로서 존재하는 것 같이 상정하고 문제를 그것에 관련시켜 논의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런데, 우주를 기계와 같은 것으로 보면, 적어도 세 가지의 특징이 있는 경우로 논의할 수 있다.

우선, 기계는 더 이상의 변화가 없는 최종적 실체가 될 수도 있고, 철학과 과학은 그것의 작용과 활동을 관조함으로써 지식을 생산한다.

이와는 달리 기계는 완전한 것이지만 가끔은 수리를 요하는 것일 수도 있고, 이보다 더욱 급진적 사고로서 기계의 특성들을 계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불안정한, 일시적 현상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각각은 자연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 17~18세기 기계론적 세계관의 특징에 관한 철학적 논의는 주로 세 가지 중에서 첫째와 둘째의 경우에 집중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듀이의 경우 세 번째의 것이 자연과 교변작용에 대한 제대로의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고 보고, 교변작용에 대한 이해 내용은 바로 과학의 메타이론에 포함된다고 하였다.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세계를 고정된, 완성된 기계와 같은 것으로가 아니라, 수리하고 고쳐갈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것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기는 하지만, 낡은 초월적 자연주의(Supernaturalism)와 외계적 자연주의(Extranaturalism)를 극복하는 거대한 진전이었다.

듀이는 '자유주의와 사회적 행위'(Liberalism and Social Action)에서 이러한 진전에 기여한 벤담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기계적 세계를 단순히 검토하고 보수하는 대상으로만 볼 것은 아니라고 경고하였다. 그러한 사고는 결국 인류를 계산기와 같은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벤담의 기계론적 은유는 인간과 정치적 환경의 관계가 계속적으로 변화하는 관계이고 개체들의 불안정성이 시작하고 끝나는 매듭이 있는 관계로 그 특징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그 관계는 계속적으로 재평가되고 사회적 차원의 검토를 통하여 구조적 조정이 있어야 한다.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교육부장관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교육부장관

서혜정 기자  eduin@edu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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