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형 청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문학박사

고전의 힘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닌 삶은 변화시키는 것"
"실천은 스스로 하는 것" 혼자의 힘 믿고 물과 같이 흘러가라

[에듀인뉴스-명교학숙 공동기획] 학생들의 인성교육 방향 정립을 위해 고전(古典)을 활용한 교육이 떠오르고 있다. ‘명교학숙’은 이러한 교육계의 움직임을 리드하는 초·중등교사 연구모임으로 동·서양 인문고전을 탐구하고 현장에 적용하는 교육방법론을 연구하고 있다. <에듀인뉴스>는 명교학숙과 함께 고전을 통해 우리 교육 현실을 조명하고 드러난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에듀인뉴스] 우리는 현재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 이 문장은 누구의 말과 비슷하지만 해석과 느낌은 다른 의미를 뜻하고 있다. 필자가 말하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는 ‘Industry 4.0’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다’라는 말의 의미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숙련도’라는 개념을 들어 이를 설명해보고자 한다.

먼저 조심스럽게 4차 산업 혁명이 도래하면 ‘숙련도’라는 개념은 달라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기존에 있어 ‘숙련도’는 시간에 비례하며, 사람과 사람사이를 차별하는 개념이었다.

한때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이 법칙의 의미는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1만 시간 정도를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공지능과 3D 프린터, 사물인터넷 등이 일상화된 시대에도 지금처럼 1만 시간의 의미를 강조할 수 있을까?

필자가 볼 때 1만 시간의 의미는 없다고 본다. 즉 ‘숙련도’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시간성과 차별성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 개념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숙련도’의 의미가 크게 작용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짧은 시간의 훈련을 통해 기술과 기계를 다룰 줄 아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구별될 것이다. 이제 세계는 우리에게 ‘숙련도’의 의미를 없애거나 완전 탈바꿈 된 환경을 제공할 것이다.

이처럼 세계는 급변하고 있으며 우리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곳’으로 인도하고 있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루이스 캐럴 저, 김민지 그림, 장윤희 역, 인디고, 2015)
거울 나라의 앨리스(루이스 캐럴 저, 김민지 그림, 장윤희 역, 인디고, 2015)

100마일의 속도로 변하는 세계와 우리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이하 ‘앨리스’)라는 작품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그 ‘앨리스’의 후속편으로 ‘거울 나라의 앨리스’라는 작품이 있다.

‘앨리스’의 후속편에 ‘붉은 여왕’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붉은 여왕이 지배하는 나라의 지형과 모든 사물은 한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움직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각색되어진 앨리스와 붉은 여왕과의 대화를 살펴보자.

앨리스가 숨을 헐떡이며 빨간 여왕에게 묻는다.

“저는 계속 달리고 있는데 왜 나무를 벗어나지 못하나요? 제가 살았던 세계에서는 이 정도 속도로 달렸다면 벌써 나무를 벗어났을 거예요.”

빨간 여왕이 답하기를...

“이곳에서는 그냥 달려서는 항상 제자리야. 나무를 벗어나려면 나무보다 더 빨리 달려야 해. 그러니 지금보다는 곱절로 더 빨리 달려야 해”

우리는 앨리스와 붉은 여왕의 대화를 통해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달리기를 멈추는 순간 뒤쪽으로 처지게 된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적어도 그 자리에 멈춰있을 수 있기 위해서는 항상 달려야 한다는 법칙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진화 학자 밴 베일런(Van Valen)은 ‘Red Queen's Hypothesis(붉은 여왕 가설)’을 제시하였다. 어떻게 보면 현재 세계와 우리의 관계에서 ‘Red Queen's Hypothesis’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내가 목표한 것을 성취하고자 할 때는 쉬지 않고 달려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세계의 변화 속도보다 곱으로 더 빨리 달려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지 멈추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뒤로 처지게 되는 씁쓸한 경험을 맞이하게 된다.

세계의 움직임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뒤로 처진다는 것’은 찰스 다윈의 이론에 의하면 강력한 ‘생존’에서 점점 멀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 1928~2016)는 그의 저서 ‘부의 미래’에서 ‘혁신속도론’을 이야기하였다. 기업은 100마일의 속도로 변하고, 노조는 30마일, 정부는 25마일, 학교는 10마일, 정치조직은 3마일, 법은 1마일로 변한다고 했다. 그의 말이 설득력 있다고 볼 때 세계는 최대 100마일의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과연 각 개인은 100마일의 속도에 보조를 맞출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100마일 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을까?

필자는 이에 대한 답보다는 100마일의 속도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세상은 항상 움직인다는 것과 인간은 그 세계와 관계하는 한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CEO 조 케저(Joe Kaeser)는 유럽 최대 제조 기업으로 설립 150년이 넘는 독일 지멘스를 2013년부터 현재까지 이끌어 오고 있다. 조 케저의 경영철학은 한마디로 나타낸다면 ‘찰스 다윈이 옳았다.’이다.

좀 더 풀어서 언급하자면 ‘생존은 가장 강한 자 내지는 가장 똑똑한 자에게 허락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조건에서 가장 잘 적응하는 자에게 허락된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한 개인이 열심히 살뿐 변화되지 않는다면 비효율적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비효율적인 삶은 물질적·시간적 투자에 비해 결과가 기대이하로 나올 확률이 높다. 그렇게 되면 주변 사람들을 향해 짜증을 내는 등 힘들게 할 확률이 높다.

따라서 ‘열심히 살았다는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일부는 열심히 살았음을 강조할 뿐 세계의 변화에 둔감하며 오히려 구조의 변화에 원망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몇몇의 경우를 제외하고 대개는 이 세계에서 열심히 살고 있으며 변화에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다. 다만 아직까지는 변화되고 구별된 삶을 살고 있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제대로 된 방법론을 탐구하는 이는 소수다.

고전의 힘과 나

100마일의 속도로 변화하는 세계에 대해 적응해야 한다면, 그 속에서 고전독서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이는 고전의 유용성 문제를 떠나 이 바쁜 시대에 그 어려운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전이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은연중에 앞 문장에서 대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읽어 보면 ‘Red Queen's Hypothesis’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었던 독일 지멘스 그룹의 CEO 조 케저가 자신의 삶을 통해 다윈의 말을 사실로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논의를 유연하게 살펴보기 위해 잠시 한 샤먼(shaman)의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

초자연적 능력이 뛰어난 샤먼은 죽은 자를 불러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한다. 그 샤먼은 항상 두 폭짜리 병풍을 펼쳐놓고 주술을 사용한다. 그런데 샤먼에게는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펼쳐 놓은 ‘이폭병풍(二幅屛風)’ 뒤에까지만 죽은 자를 불러올 수 있고, 병풍 앞으로는 여간해서 불러올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눈치 빠른 독자께서는 ‘이폭병풍’이 펼쳐진 책(册)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독서를 하겠다고 책을 펼치는 그 순간부터 영매(medium)로 변환될 수 있다.

문제는 영매의 능력에 따라 인류의 지혜를 병풍 앞까지 불러와 體化시킬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병풍 앞까지도 불러 오지 못해 죽은 자와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두 작품을 다시 한 번 이야기 해보자. ‘종의 기원’은 너무나도 유명해서, ‘거울 나라의 앨리스’는 동화이기에 이미 이 두 권의 고전을 읽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약 이 두 책을 펼쳐서 찰스 다윈과 루이스 캐럴을 책 앞까지 불러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체화를 시켰다면 더 이상 필자의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 고전을 통해 내 삶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면 굳이 비루한 필자의 글을 읽는데 시간을 소모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고전의 힘은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세계는 항상 변화고 있다. 따라서 세계와 관계하는 내 삶 또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진정으로 두 고전의 힘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이 변화되었다는 가시적 출발점은 어디이며 방법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이미지=픽사베이)
(이미지=픽사베이)

나 하나만 꽃 피워도 풀밭은 달라진다..."혼자의 힘을 믿고 물과 같이 흘러가라"

‘소학’은 주희의 저작으로서 소년들에게 유학의 기본을 가르치기 위한 책이다.

“옛날 小學에서는 사람들에게 물 뿌리고 청소하며 (말에) 응답하는 것과 나아가고 물러가는 예절과 부모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스승을 높이고 벗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道로써 가르쳤다. 이는 모두 ‘수신체가치국평천하’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 『小學』

위 인용문은 ‘소학’의 머리말에 해당한다. 이를 살펴보면 자기 집안 청소하는 것과 대화의 기술을 道로써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제일 먼저 언급하고 있다.

필자의 해석으로 볼 때 ‘소학’의 세계에서는 자기 주변을 청소하고 대화의 기술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삶의 변화이다. 그리고 세계의 변화를 맞이하는 출발점이다.

따라서 글을 읽고 있는 순간 자기 방과 집, 일하고 배우는 자기 공간의 청결함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 언어 습관을 숙고해보라.

생각과 숙고 이후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이러한 삶의 작은 변화는 ‘平天下’의 근본이 된다. 따라서 100마일의 속도를 쫓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활동 공간을 잘 정리하여 체계적 삶의 기초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과의 품격 있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 본인 스스로가 교양을 쌓아가는 것이다. 이후 품격 있는 대화 속에서 정보를 읽을 수 있다면 100마일의 체감 속도는 10마일로 다가올 것이다.

그렇다면 변화에 대한 우리의 모습은 어떤 형태로 진행되는 것이 좋을까?

“가장 탁월한 것은 물과 같은 것이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툼이 없으니 이는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이라. 고로 道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 『도덕경』 8장 水善

노자는 『도덕경』에서 가장 탁월한 물질을 ‘물’로 삼았다. 여기서 우리는 물의 성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은 고이면 썩는다. 그래서 썩지 않기 위해 항상 흘러가야 한다. 거기에 어떠한 형태와 모습도 마다하지 않는다. 둥근 곳에 처하면 둥글게 채우고, 네모난 곳에 처하면 네모난 형태를 갖는다. 언제나 그 틀에 맞춘다. 변화하면서 흘러가다 막히면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돌아가거나 뚫고 가기도 한다. 게다가 겸손하여 낮은 곳으로 흘러갈 줄 아는 능력도 있다.

이렇게 물처럼 변화에 가장 보조를 잘 맞추는 존재도 없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12세기 주자와 기원전 6세기를 살았던 노자가 21세기 우리에게 ‘변화’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실천하는 일만 남았다. 실천은 혼자가 하는 것이지, 누군가가 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혼자 할 수 있다는 것과 혼자의 힘을 믿어야 한다.

세계에 존재하는 가장 큰 공동체는 종교공동체이다.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등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각각의 공동체는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 부처님, 무함마드가 혼자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변화의 출발점과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만으로는 고전의 힘을 느낄 수 없다. 변화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현실에서 실천이 될 때 비로소 독서의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혼자 해야 하는 일이기에, 스스로가 자신의 힘을 믿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풀밭가운데서 홀로 꽃 피울 수 있다면 풀밭을 꽃밭으로 만드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세계의 변화를 이끌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홀로 꽃을 피우는 그 순간 인격적 독립을 선언하게 되는 것이며, 하나의 완벽한 개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세계의 변화에 나의 변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변화에 세계가 변화는 그 순간’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김도형 청계역사문화연구소장/ 명교학숙
김도형 청계역사문화연구소장/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