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주 프랑스 유학생/ 예술가

[에듀인뉴스] "저희는 프랑스 파리에 사는 행정가, 건축가, 예술가, 보건전문가, 경영전문가, 평범한 직장인과 유학생입니다. 언젠가 자신의 전공과 삶을 이야기하다 한국의 많은 분과 함께 나누는 매개체가 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서로 다른 다양한 전공과 각자의 철학과 시선으로 느끼고 바라본 프랑스의 이야기에서 시사점을 얻어가길 바라며 프랑스의 한국인 이야기를 관심 갖고 지켜봐주십시오."

[에듀인뉴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어릴 적부터 왔다 갔다 하며 꽤나 긴 시간을 외국에서 살았지만, 나와 내 부모님과 부모님의 부모님과 또 그들의 부모님은 내 짧은 생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한국에서 내린 자잘하고 깊은 뿌리들이 내 안에 이어지는 것을 느낀다.

개인에게 모국으로 느껴지는 곳이 있다는 것이 더 좋은 건지, 덜 좋은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단지, 나에 관해서는 이어진 뿌리가 느껴지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살 때 나는 친하거나, 잘 모르는 사람들도 종종 집에 초대하곤 했다. 하지만, 이들을 우리 집에 들이는 순간에 나의 시선이 어떤 것들을 품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타지로 기약 없이 떠나왔을 때 비로소 이방인으로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크게 돈 걱정 하지 않고 소속된 학교에 적응한 유학생으로서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이방인으로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프랑스 Cergy 시청 건물 주변에 줄을 서고 있는 프랑스의 외국인.(사진=홍성주)
프랑스 Cergy 시청 건물 주변에 줄을 서고 있는 프랑스의 외국인.(사진=홍성주)

약 두달 전 <에듀인뉴스>에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프랑스 속 경계선”이라는 제목으로 시청 앞 대기 줄에 관한 글을 썼다(http://www.edu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595).

프랑스에서 살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해 추운 새벽부터 3~6시간을 밖에 서서 기다리는 외국인들 중 한명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아, 나는 이방인이구나. 나는 프랑스 안에 있는데, 아직 프랑스에 들어오지 못한 것 같다. 이 춥고 긴 경계선을 지나고 나면, 이 나라에 정말 들어올 수 있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때에도 나는 마음이 여유로운 이방인이었나 보다. 그 경험은 나로 하여금 궁금함을 가지고 매일 줄을 서 보며 일기를 쓰고, 그 일기를 같이 줄 서는 사람들과 나누며 함께 추위에 덜덜 떨고, 함께 웃고, 또 함께 분노하는 귀한 시간을 보내게 해주었다.

내가 이방인에 대한 시선을 정말로 깊이 생각하게 된 계기는 이보다는 시간이 지난 후이다. 2019년 2월 초, 나는 시청으로부터 신고를 당해 경찰서에 가서 진술을 했다.

당시 나는 또 한 번 세르지(Cergy) 시청 앞에서 새벽 대기 줄을 한 달 정도 서보면서 생각하고 관찰하는 중이었다. 1월은 정말 추워서, 바지를 네 개 입고 외투도 세 개는 입어야지 새벽 추위 속에서 견딜 수 있었다.

이른 새벽 체류증을 발급 받기 위해 유모차를 끌고 시청 앞에서 줄 서 기다리는 프랑스 이방인.(사진=홍성주)
이른 새벽 체류증을 발급 받기 위해 유모차를 끌고 시청 앞에서 줄 서 기다리는 프랑스 이방인.(사진=홍성주)

주위를 보면 유모차를 끌고 온 엄마들이나,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들도 있어서, 체류증 획득이 아닌 개인적인 이유로 줄을 서는 내가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누군가 한 사람에게라도 도움이 되면 좋지 않을까 싶어 종이에 “몸이 불편하거나 줄을 서기 힘든 사람이 있다면 내게 연락을 하라고, 나는 어차피 줄 서 있다가 시청이 문 열 때 즈음 떠나니까, 한 사람은 대신 줄을 서줄 수 있다”는 메모와 내 연락처까지 적어 시청 주변에 붙였다.

아무도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2주 후 처음으로 연락이 왔다. 경찰이라고 했다. 시청이 나를 신고해 경찰서로 진술을 하러 와야 한다고 했다. 알고 보니, 불법으로 대신 줄을 서주고 돈을 받는 사람들이 있어, 나를 그렇게 오해하고 신고한 것이었다.

경찰서에 가서 시청 앞 새벽 대기 줄에 대해 내가 느낀 점과, 그로인해 이 안에서 더 살아보고 싶어 줄을 계속 서러 오게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그동안 썼던 일기들을 보여주었다.

경찰관과의 진술은 잘 지나갔다. “내가 사람을 도우려는 의도로 줄을 대신 서 준다는 전단지를 붙였다는 것을 알았으니, 아무 처벌이 없을 것이나, 조심은 하라”고 했다. 경찰서에 다녀온 후 좀 멍-해져서 당분간 줄을 서러 가지는 않기로 했다.

그 일이 있고나서 한 달 쯤 후에, 나는 집 주변에 있는 다른 시청에 학생 체류증을 새로 받으러 갔다. 창구 앞에 앉아서 내 번호를 부르길 기다리는데, 이상하게 불러야 하는 시간보다 훨씬 더 시간이 지나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쳐갈 즈음, 그 시청의 상급 직원이 나를 따로 부르더니, 문제가 있다고 했다. 내 서류 안에 내가 불법으로 대기 줄에서 자리 매매를 한 범죄자라는 식의 글이 적혀 있다는 것이다.

나는 경찰관에게 진술 했던 것처럼 그 사람에게 설명을 했지만, 내 서류에 그렇게 표시가 되어있으니 완전히 믿지는 않는 눈치였다.

오늘은 이미 내 체류증이 나왔으니 받아갈 수 있지만, 다음번에는 어려울 수도 있다며, 기다렸다가 창구에서 부르면 체류증을 받아가라고 하였다.

기다렸다가 드디어 창구로 가니, 직원이 굳은 표정으로 내게 체류증을 주면서 “이렇게 불법매매를 했으니, 이번을 제외하고는 프랑스에서 더 이상 체류증을 연장받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런게 아니고 그냥 불편한 사람을 도우려고 한 건데 오해를 받은 거라고 말했으나, 그 직원은 단호하게 나를 바라보면서 아니라고, 나는 불법으로 돈을 벌었다고 말했다.

나는 정말 도우려고 했을 뿐이라고 또 다시 말했고 그 직원은 아니라고 나는 돈을 번거라고 또 다시 말했다.

그때 그 사람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1톤 쇳덩이가 떨어지는 것처럼 쿵— 하고 내 마음 깊숙이 박혔다. 그 시선의 진실을 정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나를 향한 그 시선에 대해 가장 날것의 단어로 표현하자면...

버.러.지. 

집에 돌아와 수치심에 벌벌 떨며 울며 엄마와 통화할 때 내가 받은 시선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 식으로 보지 않았겠냐며 엄마가 담담하게 말해준 단어이다.

다음 날 학교에서 모로코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는 국적 때문에 시청에 갈 때마다 직원에게 그 시선을 받는다고 했다. 마음이 아팠다. 나는 나의 무언가 때문이 아니라 오해로 인해 알게 된 시선이지만, 그 친구는 모로코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항상 그런 시선을 받고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외국인 이민자들이 많고, 이들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다. 이에 대해 나는 어떤 의견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지 않고, 사실 그에 대해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이것에 대해 파고들고자 함이 아니다. 좀 더 근본적으로 ‘집 안의 나’가 있고 ‘바깥에서 온 당신’이 있는 한 존재하는 ‘당신, 이방인’을 보는 우리의 시선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이 글을 쓰면서 나와 상충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과 만났을 때 나의 모습을 거울을 두고 비춰보았다. 겉으로는 다름으로 인정하는 척 끄덕이지만, 속으로는 그를 내려다보는 삐죽삐죽한 나의 시선을 보게 되었다.

나의 가치관, 집, 속한 그룹 또는 나의 나라 안에 들어온 이방인을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가. 우리의 시선을 그저 가는대로 흘러 보내지 말고 한번쯤은 거울에 비춰보듯 바라봐보면 어떨까?

홍성주. 이화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다니는 도중 예술을 하는 것에 반하여 중퇴한 후 프랑스로 갔다. 엑상프로방스 시립 순수미술학교에 입학, 남부의 따뜻한 햇살과 함께 자유로운 미술공부를 시작 했으며 다시 다른 맑은 에너지를 찾아 세르지 국립 고등미술학교에 편입, 깊은 경험들을 했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자신에게 정직해야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학교 다니는 동안 모로코의 예술가들과 함께 예술을 통해 타인을 내 속안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는지 바라보기도 했고, 또 독일 학생들과 40년된 1톤짜리 오프셋 인쇄기를 사서 트레일러에 싣고 두 나라를 가로지르며 여러 메세지를 인쇄하는 여행을 1년간 추진하다가 실패해 보았습니다."

"환대의 형태와 멜로디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저것 하면서요. 보이지 않는 것을 사랑한다면, 그것을 살아보는 수밖에 없잖아요. 찾아가는 길목에서의 작은 만남들을 언어로, 목소리로, 노래로, 가끔은 선과 색깔로 남기면서 느릿 느릿 가 보는 중입니다. 타지 사는 외국인으로서 여러 상황이 생기다 보니, 보이지 않는 것, 보지 않으려 하는 것,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늘 생각합니다. 여기서는 프랑스 순수미술 학교를 다니며 살아본 몇 가지 소중한 순간들과의 만남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