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음식 다문화 이야기] 왕실 제사에도 사치였던 만두, 설날 간식되다
[설 음식 다문화 이야기] 왕실 제사에도 사치였던 만두, 설날 간식되다
  • 한치원 기자
  • 승인 2020.01.2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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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명절 최고의 간식으로 자리 잡은 만두
떡만두국.(사진=만개의 레시피)

[에듀인뉴스] 곧 설날이다. 요즘 아이들이야 그렇지만, 설날이 다가오면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하나는 설빔이고, 다른 하나는 세배와 세뱃돈이고, 또 다른 하나는 떡국이다.

설빔은 새옷을 입는 것이 힘들었던 만큼 설 명절을 기해서 새로운 옷을 입었던 즐거움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기쁘게 하는 것은 설날 집안의 윗 어른들께 세배를 하고, 세뱃돈을 타는 것이었다. 

​그 기쁨과 다르게 또하나 설이 되면, 떡국을 먹고 나이도 한 살 더 먹는 일이었을 것이다. 설날 먹는 떡국은 가래떡을 동전처럼 썰어 물에 넣고 끓여먹는 것을 의미했다. 새해가 되어 동전같은 떡국을 먹으며 돈도 많이 벌고, 복도 많이 받으라는 뜻이었다. 그 떡국에 빠짐없이 들어가는 것이 만두다. 만두는 생김새 등으로 인해 복을 안겨주는 음식으로 생각했다. 

설날 먹는 떡만두국...상화(만두)는 고려 때 전해져 

그렇게 우리는 설날이면 떡만두국을 끓여먹었다. 그런데, 이때 들어가는 만두는 사실 우리나라 고유의 음식은 아니다.

만두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고려 때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도 많이 알고 있는 고려가요 중에 '쌍화점'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쌍화점이 바로 만두가게인 것이다. 즉, '상화(만두)'를 파는 가게집의 회회아비와의 염문을 다룬 것이 고려가요 '쌍화점'인 것이다. 

만두파는 집 '쌍화점'의 염문을 다룬 고려가요가 쌍화점이다.(사진=픽사베이)

​내용도 외설 스럽다.

"쌍화점에 쌍화사러 갔더니/ 회외아비가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말이 가게 밖에 들고 나며/ 조그만 광대새끼 네 말이라 하리라." 

쌍화점에 갔다가 회회아비와 눈이 맞고 밀회를 즐기는데, 이 소문이 밖으로 나면, 쌍화점에 드나들던 조그만 광대녀석이 떠들고 다닌 것으로 여기겠다며 다짐하는 노래다. 

​어쨌든 이 고려가요 속에서 만두, 즉 '쌍화'는 회회아비가 팔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요즘도 그렇지만 중국 화교가 와서 중국집을 운영하고, 베트남 결혼이주여성이 베트남 쌀국수를 만들어팔고, 아랍 이주민이 아랍의 케밥을 파는 것이 일반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아랍, 또는 위구르족 아저씨를 회회아비로 불렀고, 그 계통의 이주민이 음식점을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이 '쌍화'였던 것이다.

고려 때 들어온 만두는 대략, 북방 유목민 즉 터키나 위구르계통의 이주민들에 의해 전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다른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즉, 만두의 기원에 대해 '삼국지연의'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제갈공명이 만두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갈공명이 남만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풍랑이 이는 노수를 만났다. 이에 노인들이 사람머리 49두를 강물에 제물로 던지고 제사를 지내면 풍랑이 가라앉을 것이라고 말을 했다. 이에 제갈량이 '전쟁터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또 죽일 수 없다며, 밀가루 반죽에 양고기를 싸서 만두(蠻頭)라고 써서 바치고 제사를 지냈다. 이 만두에서 음식 만두(饅頭)가 된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조선시대 이익이 쓴 '성호사설'에서도 전하고 있다. "만두는 세속에서 전하기를 노수에서 제사를 지낼 때 처음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이 역시 겉은 떡이고 속은 고기이다. 다만, 뇌환은 작고 만두는 크며, 뇌환은 밀가루로 뭉쳐서 만들고 만두는 떡으로 만드는 것이 조금 다를 뿐"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만두의 기원에 대해 서술한 글을 보면, "만두는 제갈량이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제갈량이 활동하던 시기는 지금부터 거의 2000년 전인 기원후 얼마되지 않는 일이고, 거기에 소설 삼국지연의가 엮어진 것은 명나라 때의 일이다. 즉, 정사 삼국지에는 제갈공명이 남만을 점령하러 노수를 간 적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명나라 시대에 살았던 나관중이 삼국지연의를 지으면서 제갈공명의 재치에 만두이야기를 넣어 지어낸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그것은 대략, 두가지 이유에서이다. 즉, 지금은 만두가 전세계적으로 널리 퍼진 음식으로 다양하게 즐기고 있지만, 예전에는 밀가루 반죽에 음식을 싸먹는 형태였기에, 밀재배지 중심으로 발달한 음식이다. 하지만 제갈공명이 점령하러간 남만은 지금의 베트남쪽으로 밀의 재배지역이 아니라, 쌀의 재배지역이었다는 점이다. 다시말해 밀 재배가 용이한 지역에서 만두라는 음식이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몽골식 튀김만두 호쇼로...만두 기원은 수메르와 중앙아시아 지역

몽골식 튀김만두 호쇼로.(사진=ebs)

다른 하나는 지금도 중앙아시아 유목민들 사이에 만두와 비슷한 발음의 '만트'라는 음식이 내려오고 있다. 

몽골에서는 호쇼로라는 몽골만두가 주요한 음식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아도 유목민의 음식에서 기원한 것이지, 농경민의 음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우리나라에 만두가 전해진 시대가 몽골 지배 이후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자연스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쌀을 가지고 만들었다면 이미 이전에 한반도에 전해졌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베트남 쪽의 남만지역이 만두의 원산지였다면 몽골 침략 이전에 고려로 들어온 이용상 등 화산이씨 쪽에서 시작되었을 것인데, 그에 대한 기록이 없다.

오히려 쌍화점에서 보는 것처럼 몽골지배 시기에 위구르나 아라비아 이주민을 지칭하는 '회회아비'가 쌍화점 주인으로 그려지는 만큼, 유목민족의 이주민들이 자신들의 전통적 음식을 고려에 와서 팔고 있는 것으로 판단해야 옳바를 것이다. 이것은 중국에서 북방 유목민족이 대거 남하하는 5호 16국시대에 만두가 전래되었다는 일부의 설과 일치한다.   

​따라서 만두는 밀의 재배가 용이했던 수메르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기원한 음식으로 판단된다. 그 유목민, 목동들이 양을 치러 들판이나 산야로 나가면서 점심 겸 간식으로 밀가루 반죽에 음식을 싸서 가지고 갔던 것이 만두가 된 것이 아닌가 추론하고 있다.

지금도 밀가루반죽인 '넌' '또티야' 등에 음식을 싸서 먹는 케밥의 형태도 만두와 비슷하다. 이것이 한나라 시대 서역과 교역을 하면서 밀가루가 들어오며 만두라는 음식도 함께 전해진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 추론일 것이다. 

다양한 딤섬 요리.(사진=픽사베이)

중국 남부의 다양한 딤섬 요리...만트, 만두, 상화 

이렇게 중국에 전해진 음식이 동남아시아 등으로 퍼져가면서 이름도 만두에서 '딤섬' 등으로 변화되었는데, 이 '딘섬'이 우리말로 하면 '점심(點心)'이 되는 셈이다. 즉, 들에 나가며 간식으로 싸들고 나간 뒤, 들판에서 요기를 할 수 있는 음식의 대명사가 '만두'이고, 그래서 그 이름이 '딤섬(점심)'으로 변화된 것으로 추측된다. 

만두는 밀재배가 용이한 메소포타미아나 터키 등 지방에서 유목민인 목동들이 들판에 나가 가축을 돌보기 위해 '간식'으로 음식을 싸서 나가게 되고, 그때 가져갔던 음식이 만두로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이름이 '만트'였는데, 이것이 중국에 전해지면서 '만두'가 되고, 우리나라에선 '상화(霜花, 만두찔때 김이 서리고, 만두의 매듭이 꽃잎 같아서 붙여진 이름)'로 불리웠던 것 같다.

​물론, 만두가 고려시대 이전에 전해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도 그럴것이 한반도에 유목민족이 이주한 것은 훨씬 이전으로, 만두가 유목민들의 음식이라면 얼마든지 중국보다 앞서서 전해질 수 있었다고 보는 견해다.

그 근거로 거란의 요나라 벽화에는 만두를 찌는 그림이 있다. 즉, 원나라의 지배에 의해 유목민족의 음식인 만두가 유행을 했지만, 그 이전에도 만두라는 음식이 존재했다는 주장이다. 

어찌되었든 만두는 고려시대 원나라의 지배가 시작된 후 급속히 우리나라의 고유음식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고려시대 만두가 얼마나 인기 있었던 음식이었는가에 대해선, 충혜왕 시대 등장한 '만두도독'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충혜왕 시절, 궁궐 주방에 들어와 만두를 훔쳐먹던 도둑이 있었고, 이에 왕이 '그 도둑을 죽이라'고 명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밀가루 재배가 용이하지 않았던 만큼 만두는 귀한 음식으로 취급되었다. 목은 이색의 '목은집'에는 만두에 대해 이렇게 칭송하고 있다.

"신도가 스님을 먹이는 것이 원래 정상인데/ 산승이 속인을 먹이다니 놀라서 자빠질 일/ 흰 눈처럼 쌓은 만두 푹 쪄낸 그 빛깔 하며/ 기름 엉긴 두부 지져서 익힌 그 향기라니..". 

​심지어 세종실록에는 태상왕 태종의 수륙제를 앞두고 "(행사 참석인원들의 밥상에) 만두, 면, 병 등 사치한 음식은 일체 금단하소서"라는 상소가 등장한다.

만두 훔쳐먹다 죽는 도둑도 등장하고, 권문세가 유림인 목은 이색이 스님에게 만두를 얻어먹고 감사한 마음으로 쓴 글, 왕실제사임에도 사치한 품목으로 거론된 만두이고 보면, 전통적으로 최상의 고급 음식이었던 셈이다. 

터키의 '만트' 요리

터키 만트.(사진=스투미 플래너) 

이렇듯 중앙아시아에서 전해진 만두는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다만 밀 재배가 용이하지 않았던 만큼, 주요 재료는 밀가루라기 보다는 메밀가루 등을 사용했고, 중국 남부에서는 쌀가루를 위주로 발전한 것 같다.

중국에서는 '만두', '포자', '교자'에 '군만두', '튀김만두'까지, 거기에 빵 종류로 '꽃빵', '찐빵'으로, 거기에 전과 함께 떡병의 한자를 써서 '메밀전병'등 각종 '전병'으로 분화 발전해 왔다. 

또 중국 남부의 쌀 재배지역에서는 '딘섬' 등의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중앙아시아의 만두가 서양으로 건너가면서는 이탈리아의 '라비올라', '깔조네' 등이 되고, 남미대륙으로 건너가서는 '또르띠야' 등으로, 몽골에서는 '보츠', '호쇼르' 등으로 변화되었다.

이탈리아식 만두 깔조네

이렇게 만두는 중동과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에서 간식 형태로 생겨난 음식이 중국과 동양으로 퍼지고, 또 한편으로 이탈리아와 남미 등 서양으로 퍼지면서 다양한 형태의 음식으로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때, 우리에게 최고급 사치음식으로 취급되었던 만두는, 설날에 떡국과 함께 넣어먹고, 간식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음식이다.

특히 북방 유목민족과 가깝고, 산악지방에서 재배하기 좋은 메밀 등의 재료로 만들었기 때문에 추운 북한 지방에서 발달하게 되어, 북한 지방의 대표음식으로 자리잡게 됐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br>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대표

 

 

한치원 기자  eduin@edu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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