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무종 프랑스 건축가

한옥 그리고 멋,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정신을 찾다

[에듀인뉴스] "저희는 프랑스 파리에 사는 행정가, 건축가, 예술가, 보건전문가, 경영전문가, 평범한 직장인과 유학생입니다. 언젠가 자신의 전공과 삶을 이야기하다 한국의 많은 분과 함께 나누는 매개체가 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서로 다른 다양한 전공과 각자의 철학과 시선으로 느끼고 바라본 프랑스의 이야기에서 시사점을 얻어가길 바라며 프랑스의 한국인 이야기를 관심 갖고 지켜봐주십시오."

(출처=https://blog.naver.com/choijki2/20157291050)
(출처=https://blog.naver.com/choijki2/20157291050)

[에듀인뉴스] 서울의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경복궁이나 민속촌을 방문한다는 건 꽤나 흥분되는 일이다. 전통가옥의 모양도 모양이거니와 나의 삶의 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많은 부분이 눈에 띄어서 그렇다.

모두가 평지붕에 사는 요즈음, 지붕의 재료에 따라 초가집, 기와집, 너와집으로 불리는 이름도 흥미롭고, 필요한 공간이 밀접하게 붙어있는 아파트의 공간구조와 달리 방과 방 사이에 거리를 두는 모양새도 신기했고, 건물에 진입하기 전 마당을 거쳐 들어가는 구조도 재밌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옥은 조리가 끝나는 대로 식사가 가능한 아파트의 구조와 달리 부엌에서 밥을 지어 대청마루나 방으로 옮기려면 여간 불편한 구조다. 손님이 왔을 때 거실에서 현관문을 열러 나가는 거리와 대청에서 대문으로 나가는 거리를 따지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불편해 보였다.

무엇보다 이해가 안 됐던 것은 대지면적에 비해 초라할 정도로 작은 집 크기였다. 민속촌에서 집보다 큰 마당을 가진 전통가옥들을 보며 어린나이에 진지하게 어머니께 “저기에 마당을 두지 말고 전부 벽으로 둘러 방으로 만들면 집이 더 커지고 좋지 않겠냐”며 신이 나서 얘기한 적이 있다. 이후 나를 왕이 살았다던 경복궁으로 데려가신 어머니의 지혜 앞에 무릎을 탁 쳤다.

그러나 여전히 효율을 따진다면 전통가옥은 나에게 그저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과거의 유산에 불과했다.

이토록 비효율적이고 불편한 전통가옥을 건축을 전공한 이후 건축도시공간연구소에서 운영하는 국가한옥센터에서 진행된 연구를 살펴보며 다시 보니 가끔 말로는 정의할 수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필요이상의 것을 추구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멋’이다.

 

서양 파이프에 비해 필요이상으로 긴 곰방대 길이, 양복의 소매보다 풍성한 한복의 소매, 중절모의 챙 보다 커다란 갓 등 모든 크기는 필요한 기능만큼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필요이상의 여유를 두었다. 그리고 이를 ‘멋’이라는 딱 잘라 설명할 수 없는 단어로 정의했다.

건축학적 측면에서 기본적인 거주에 필요한 공간을 ‘제1의 공간’, 일을 하고 작업에 필요한 공간을 ‘제2의 공간’이라 한다.

두 공간의 특징은 기능이 사라지면 공간의 목적마저 사라진다는 점이다. 조리시설이 없는 주방, 혹은 데스크가 없는 사무공간을 상상해 본적이 있는가?

조선시대 사랑방의 모습.(출처: http://mobile.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160506000020)
조선시대 사랑방의 모습.(출처: http://mobile.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160506000020)

오래 전부터 건축가들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제3의 공간’이 있다. 바로 사색을 위한 공간이다. 우리나라 전통가옥에 ‘문방’이라는 방이 있다. 이 방은 특별한 목적이 있어 지어진 공간이 아니요, 특별한 가구를 들이지도 않는다.

선비들이 그림도 그리고 시도 쓰고 때론 손님과 함께 술자리를 갖기도 하는 사색과 놀이의 공간이다. 일과 놀이가 동시에 일어나고 낮잠도 자며 그 쓰임에 따라 방의 성격이 바뀌는 곳이다.

신기하게도 반기능적인 공간을 두었지만 그 누구보다 기능적으로 사용했다. 기능을 넘는 반기능적인 공간, ‘문방’이 그곳이다.

이처럼 공간에 여유를 두어 삶에도 여유를 두는 선조들의 지혜가 참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진정으로 인생에서 멋을 추구하고 멋을 즐기는 모습이 아니던가.

19세기 프랑스의 비스트로.(출처: https://ppss.kr/archives/81646)
19세기 프랑스의 비스트로.(출처: https://ppss.kr/archives/81646)

프랑스의 주거공간에는 없지만 우리나라의 문방 같은 역할 하는 곳이 있다. 거리마다 보이는 카페(Café)와 비스트로(Bistro)다. 가볍게 들러 커피나 맥주를 한잔하면서 사람들과 교류를 즐기며 때로는 토론도 하는 공간으로 쓰인다.

공간을 사용하는 이들의 특징은 토론이든 놀이든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본 프랑스 인들은 특별한 목적이 없이 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는 없다. 공간을 쓰는 형태를 보면 이들은 놀이와 일의 구분이 명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명확함이 그들이 사는 공간과 사용하는 물건에 반영되어 비록 효율적일 수는 있지만 단조로움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 효율성은 인정하며 지금 이 시대에 굉장히 필요한 부분이다. 그렇지만 그 효율성에만 집중하다 보면 삶이 단조로워질 우려가 있다. 그 단조로움을 막기 위해 우리의 삶에는 ‘멋’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의 집을 예전의 한옥처럼 바꾸라는 것이 아니다. 한옥은 여전히 나에게 불편하며 손이 많이 가는 효율성이 떨어지는 집임에는 변함없다.

그렇지만 우리 선조들이 가지고 있던 ‘멋’은 오히려 바쁘고 단조로운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정신이 아닌가. 치열하고 바쁜 내 삶에 남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있는가. 나의 삶에는 ‘멋’이 있는가.

무종 프랑스 유학생 홍익대 건축도시대학원 재학중. 프랑스 파리에서 해외 인턴쉽을 마쳤다. 이후 그르노블 Université Grenoble Alpes에서 도시설계학 석사를 마쳤고 파리의 Ecole spéciale d’architecture (그랑제꼴)에서 만장일치 합격과 félicitation으로 건축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Arep Group에서 실무 후 현재 Atelier Patrick Corda에서 Junior Architect로 근무중.

“We shape our buildings thereafter they shape us.”(우리가 건물을 만들지만 그 건물은 다시 우리를 만든다.)

영국의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의 말이다. 좋은 건축에서 살아야 좋은 삶을 누릴 수 있다는 환경결정론적 해석이 아닌 건물에 담겨진 이야기를 중점으로 칼럼을 쓰고자 한다.

건축은 오래전부터 우리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봐도 그렇다. 이 집에 오기까지 가지고 있는 각자의 사연, 집에서 살면서 늘어가는 저마다의 이야기들, 우리의 삶은 내가 살고 있는 공간과 함께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 또 하나의 건물을 중심으로 그 건물과 지역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들이 우리의 삶 주변에 감추어있다. 그래서 건축을 하는 사람들은 건물은 부동산적 소유재산 이전에 우리의 삶을 반영하고 담는 그릇이라 여긴다. 따라서 건물을 살펴봄으로 우리는 각 사람의 삶의 형태와 가치관을 어느정도 유추할 수 있다.

앞으로 글에서는 프랑스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살펴본 여러 공간(건물)과 그에 숨겨진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삶의 정서와 문화를 다루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