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교육부 장관

습관은 어떠한 특성? 그리고 습관을 구별한다면?
"습관, 교육적 성장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에듀인뉴스] 교육계와 교육학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학계에서도 존 듀이(John Dewey)는 누구에게나 이미 잘 알려진 이름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알려진 만큼 그의 이론이 잘 이해되고 소개되어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의 사상은 ‘실용주의’, ‘실험주의’, ‘진보주의 교육’, ‘새교육’이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어 왔고, 우리의 교육계와 교육학계는 그를 현대적 교육사상의 근원인양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교육계에서 심도 있게 평가된 수준은 아니었다. 에듀인뉴스는 정치와 교육의 이념적 갈등이 극심하고 특히 자유주의적 전통과 강령적 기조에 대한 이해의 혼란이 심각한 수준에 있는 이 때, 존듀이의 실험주의적 자유주의와 이에 관련한 교육사상을 검토해 보는 ‘왜, 지금 존 듀이를 읽어야 하나’를 연재한다.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교육부 장관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교육부 장관

[에듀인뉴스] 우선, 만약 우리에게 습관이라는 것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면서 살고 있을까? 쉽게 생각해서, 잠자는 시간과 일어나는 시간이 일정하지가 않을 것이고, 배가 고프다고 느낄 때 무엇을 먹어야 하며 어떻게 먹어야 하는가도 정해진 것이 없다.

뿐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행동과 해야 할 행동으로 정해진 것이 없는 상태, 산다는 것은 그냥 그때그때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대로 움직이는 것일 뿐이다.

외부 자극에 반응하지만 그것은 단지 순간순간의 일시적 반응일 뿐이다. 조금 심각하게 말해서, 만약 갑자기 우리가 지닌 모든 습관이 일시에 사라져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본능만으로 적응하고 그 한계 속에서 살아야 한다. 일정하게 사물을 보는 방식이 없으니 순간순간 모든 것은 새로운 것일 뿐이다. 매일 만나는 사람도 만날 때마다 새로운 사람이고 세상에는 익숙한 것이라고는 없다. 대상을 변별하는 틀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부터 해오던 습관이 없으니 내개는 현재만이 있을 뿐이고, 앞으로도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라는 습관이 없으니만큼 생각할 수 있는 미래도 없다.

치매 상태에 있는 노인이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가족을 식별해서 보던 습관의 틀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치매의 노인이 어렵기는 하지만 우리와 함께 말하고 함께 행동하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직도 서로가 공유하는 많은 습관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습관만큼 함께 생활하는 데에 불편이 있는 셈이다.

더욱 심각하게 말하면, 모든 사람들의 습관이 일시에 상실되면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위하여 소리를 내어 말을 해 보지만 함께 기억하여 사용하는 소리가 없으니 서로 알아듣지 못한다.

모든 손짓, 발짓, 몸짓은 일회적인 순간의 것일 뿐이고, 서로 함께 지닌 습관이 없으므로 아무런 의미를 주고받을 수가 없다.

말이나 몸짓으로 다른 사람 앞에서 의사나 느낌을 표현하고 서로 교환하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과 함께 소리와 몸짓을 사용하는 습관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같은 언어나 관습을 포함하여 상징적 수단을 함께 사용하는 문화적 공동체는 구성원들이 상당한 수준의 공통된 습관적 형식과 내용을 공유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한 습관들의 공유 그 자체가 인간의 사회적 삶이다.

습관이라고 하면 흔히 신체적 습관을 쉽게 생각하지만, 신중하게 검토하는 습관, 기억하는 습관, 감정을 표현하거나 억제하는 습관, 남들과 잘 어울리는 습관 등 여러 가지의 형태가 있다.

청년이 되고 성인이 되고 노년에 이르러서도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이지적으로, 감성적으로 성장할 과제가 있고 습관의 형성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습관은 ”제2의 천성”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어 왔다. 사람마다의 “성격,” “자아,” “인격,” “인성” 등으로 일컬어지는 개체의 정체적(正體的) 특성도 습관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고, 흔히 말하는 인성교육은 습관의 형성과 재구성에 관한 것이다.

(이미지=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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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의 구조적 특성

한 개체의 인성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습관들의 유기체적 총체로 구성된다. 이러한 습관들 중에는 여러 수준의 것이 있다. 달리는 동작이나 웃는 표정이나 인사하는 몸가짐과 같이 매우 구체적인 행동의 반복으로 나타내는 '일상적 습관'이 있다.

그리고 약속한 시간을 잘 지킨다거나 좋아하고 싫어할 때 특별한 표정을 짓는 것과 같이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만 나타내는 '성향적 반응'도 있다.

또한 평소에 과묵하거나 사람들에게 친절한 태도를 보이거나 옳지 못한 일을 보면 의협심을 발휘하는 '성격적 특징'에 해당하는 것도 있다.

일상적 습관은 구체적 행동이 반복되는 것을 특징으로 하며, 성향적 반응은 대응해야 하는 상황의 성격에 따라서 거의 일정한 양상의 행동이나 태도를 보이는 것이고, 성격적 특징은 한 인격체가 거의 항시적으로 지니고 있는 독특한 경향성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습관'이라고 하면 일상적 습관과 성향적 반응을 의미하며, 성격적 특징까지를 습관으로 언급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우리가 모든 습관들을 이 세 가지의 어느 하나로 식별하는 데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 이 세 가지를 구분하는 것은, 한 개체가 가진 습관들이 인성을 구성하는 일종의 원자적 기본 단위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체적인 일상적 습관들과 성향적 반응들의 유기적 관계에 의해서 총체적인 성격적 특징이 결정된다. 아마도 윌리암 제임스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는 외관상의 특징으로 보면 “수없이 많은 습관들의 뭉치”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말한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한 개체의 성격이나 특징을 결정하는 것은 수많은 습관들을 낱낱의 구성요소로 한 집합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의 유기체적 관계로써 통합된 하나의 전체를 이룬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할 것은 개별적인 일상적 습관이나 성향적 반응이나 성격적 특징이나 간에, 우리가 어떤 것을 습관의 개념으로 감식하거나 인지하고자 할 때, 각각이 지닌 질성의 도움으로 구별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늦잠을 자는 습관이 있다거나 밥 늦게까지 독서를 하는 습관이 있다고 할 때, 늦잠 혹은 심야 독서가 하나의 습관으로 언급되는 것은 그 개인의 전체적 생활과 행동 중에서 물리적으로 혹은 기능적으로 분리된 단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개체의 전체와 함께 지니고 있는 부분적인 “질성”이 성립된 결과이다.

즉 습관(들)은 그 자체를 구별되게 하는 특징, 즉 각기의 “편재적 질성”을 명시적으로나 묵시적으로 식별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습관의 개념은 인성을 설명하는 기본적인 “자연주의적” 소재가 된다.

(이미지=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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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자의 교육적 성장과 구체적 습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여기서 지금 우리가 중요하게 여길 사항은, 학습자의 외부에서 작용하는 자연적-사회적 환경의 세력과 역할이 학습자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더욱 중요한 것으로 학습자 자신의 존재론적 실체가 성장을 주도하기 위하여 어떤 잠재적인 가능성과 생동적인 힘을 발휘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학습자가 환경과의 교변작용(交變作用)을 통하여 성장하지만 자체 속에 성장의 지속적 균형을 유지시키는 자체의 힘을 구비하지 못한 상태라면, 결국 성장은 단순히 환경에 기식(寄食)하는 것으로만 의미를 지닐 뿐이다.

기식한다는 말은 생명체 자체의 존립과 성장이 내적인 에너지보다 외적인 세력에 압도된 상태로 지속된다는 것이다. 외부의 힘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주도하는 힘으로 성장하는 것이라면, 그 힘은 일종의 습관적인 힘이다.

즉 “습관의 구조적 체제”가 성장을 주도하는 에너지를 저장하고 생동적으로 사용한다.

습관의 개념은 경험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지만, “습관”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경우로 보면 더욱 구체적이고 상대적으로 변별이 용이한 것을 지칭한다.

그러나 일상적으로는 대개 고도로 추상화된 반응의 양상은 습관이라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어떤 사람을 일컬어 “과묵한 사람”이라고 한다든가 “보수적인(혹은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할 때, 구체적 행동의 반복보다는 성격적 차원의 특징을 두고 하는 말이다.

경험의 경우에 우리가 상대하는 상황의 편재적 질성과 더불어 그 특징을 서술하지만, 습관을 언급할 때는 신체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의 활동적 특징으로 구별하기도 하고, 거의 의식의 수준에 있지 않다고 할 정도의 기계적 상태로 고착된 수준의 것도 있다.

습관은 학습자가 경험으로 구성한 요소들을 비교적 구체적인 표현의 언어로 언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습관의 개념에 함의된 특징적 의미를 더욱 확장하고 심화해서 생각하면, 경험의 개념으로 쉽게 다가오지 않아 명확한 이해에 어려움을 주는 부분, 특히 학습자의 인격적 특징이나 전인적 성장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설명력을 지닌다.

자연적 환경과의 관계를 두고 말한다면, 한편으로 인간은 환경으로부터, 예컨대 추위나 더위, 소란이나 적막과 같이 피동적으로 어떤 자극을 받기도 하고, 반대로 인간은 자의적으로 환경에 어떤 변화를 가하기도 한다.

또한 좋은 수목을 주변에 심어 놓으면 좋은 경관이 되는 것과 같이 환경을 변화시키면 다시 그런 것들로 인하여 환경으로부터 받게 되는 반사적 자극이 있다. 그러한 자극이 일정한 특징을 지니게 되면 거기에 일정하게 반응하는 방식이 생기게 된다.

말하자면, 누군가의 “습관”을 말할 때, 그것은 그가 어떤 상황 혹은 환경에 있게 되면 어떤 방식의 행동을 하거나 태도를 취하거나 생각으로 대응하게 마련인데, 그 대응하는 방식이 대체적으로 일관성을 지니고 그것이 다소간 항구적으로 유지되고 있을 때 그것을 일컫는 말이다.

예컨대, 사람(유기체)이 배가 고플 때 무엇인가 주변에 먹을 음식이 있다는 상황(환경)이 인식되면, 그것으로 배를 채우고자 하는 반응을 하게 되고, 그러한 반응방식이 일정하게 굳혀지면 음식을 먹는 습관이 된다.

축구 선수가 시합에서 발휘하는 개인기나 상황의 판단, 피아노의 연주자가 악보를 나름대로 해석하고 건반에서 손을 움직이는 기교, 조리사가 재료를 그 성질과 특성에 따라서 만지면서 발휘하는 조리의 솜씨, 대중을 상대로 허여 웅변으로 소신을 주장하는 정치가의 연설, 이런 것들도 모두 습관의 범주에 속한다.

몇 가지를 더 짚어보자. 곤경에 빠져 있을 때 거기서 해쳐 나오기 위하여 덤비지 않고 차분히 상황을 살피고 거기를 모면하는 침착함이 있는 것은 사려 깊은 반응이며 그것도 일종의 습관이다. 그러한 사려 깊은 행동은 일종의 습관이 작용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관습이나 전통을 중시하고 새로운 풍조를 쉽게 수용하지 않는 보수적 성향, 불행한 이웃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도우고자 하는 동정심,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고 인식될 때 자신을 희생하면서 나서는 애국적 열정, 뉴톤의 사과나무 이야기처럼 생활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도 그 이치를 알아보고자 하는 탐구심 등도 각기 모두 일종의 습관에 속한다.

습관에는 구체적 행동의 반복도 있지만, 한 개체 인간이 지니고 있는 기술, 지식, 능력, 태도, 정서, 성향, 사상까지도 위에서 언급한 습관의 범주에 속한다. 개체 인간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습관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 습관들은 각기 그냥 우리의 몸이나 마음속에 낱개의 물건들처럼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니다.

듀이는 한 개체가 지닌 온갖 습관들은 하나의 유기체적 전체 속에서 얽혀지며, 그 개체의 인격은 전체적 습관들이 하나의 융합된 상태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한 융합체(融合體) 자체도 다른 개인이 가진 것과는 구별되는 독특성이 있고, 융합체 그 자체로서 일종의 습관이며 그런 의미에서 한 인격체는 “습관들의 습관”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미지=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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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의 개념과 경험의 개념은 어떻게 다른가 

경험의 개념이 의미하는 것에는 과정의 의미와 결과의 의미가 있다. 우선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과정 그 자체가 경험의(하는) 과정을 의미하며, 그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경험한 바의) 모든 것도 경험이되 이 경우는 결과로서의 경험이다. 습관도 환경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것이므로 결과로서의 경험의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습관”이라는 말은 상호작용의 결과를 지칭할 뿐이지 그 과정을 언급할 때 사용하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경험에 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대개 제대로 의식하는 수준의 것을 언급하지만, 습관은 의식하는 수준 이외의 것이 체계적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묵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나는 파리를 여행한 경험이 있다”고 하면 파리에 관해서 상당한 정보도 소유하고 있으며 여행에서 경험한 다른 도시와의 차이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파리를 여행한 습관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습관의 개념은 오히려 그러한 경험들이 우리의 인격적 구조 속에 통합되어 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파리 여행의 견문으로 인하여 인지적 혹은 인격적 구조에 어떤 변화가 발생할 수도 있고, 여행의 의미나 가치를 새롭게 하는 데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경험처럼 명시적으로 습관을 서술하지는 못한다.

습관은 한번 만들어지면 그냥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습관은 때로는 더욱 경직되기도 하고, 유연해지기도 하고, 다른 습관과 결합되기도 한다. 때로는 변질되고, 퇴색되고, 분해되고, 소멸되기도 하며, 때로는 재생되고, 재구성되고, 다듬어지기도 한다.

(이미지=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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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언어로써 모두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종류의 습관들을 가지고 살아간다. 대충 구별할 수 있는 방식과 몇 가지의 종류만을 열거해 보자.

첫째, 인식의 여하에 따라서 구분될 수 있다.

이러이러한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식별하는 “의식적 습관”도 있고, 자신의 습관이지만 그것을 지니고 있는지를 모르고 지내는 “무의식적 습관”도 있다.

어떤 행동을 왜 했느냐고 물으면 “습관적으로 그랬다”고 답하는 경우라면, 내개 그러한 습관이 있음을 알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왜 그랬는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해 왔던 것 같다”라고 한다면, 모르는 사이에 어떤 습관이 만들어져 있었던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습관의 지배, 즉 습관에 따라서, “습관적으로” 행동하고 생활한다. 습관에 지배되어 변통이 없을 경우도 있고, 정교한 기술을 발휘하는 경우와 같이 습관의 덕택으로 쉽게 어떤 것을 처리할 수도 있다.

습관의 총체 중에서 어느 부분의 것이 더 많으냐는 사실상 헤아릴 수도 없고 그럴 방법도 없다. 습관들 중에서는 좋은 습관에 속하는 것도 있고, 나쁜 습관에 속하는 것도 있으며, 같은 습관이면서 때로는 좋은 것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나쁜 것이 되기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의식적 습관 중에도 자신의 의도적인 노력에 의해서 형성된 것도 있고, 모르는 사이에 어느 듯 형성되어 버린 것도 있다.

둘째, 선천적 요소와 후천적 요소의 어느 편이 주도적으로 작용하여 형성된 것인가에 따라서, “생득적(타고난) 조건에 따른 습관”과 “환경적(후천적) 요소에 의한 습관”으로 구분될 수도 있다.

타고난 유전적 조건, 심리적 기질, 신체적 특징 등 개체적 특징이 원인이 되어 습관을 결정짓는 경우도 있고, 이와는 달리 문화구조, 성장지역, 자연환경, 교육배경 등 사회-문화적 요소가 습관의 형성에 적지 않게 작용하기도 한다.

정확히 말해서 오히려 인간은 천성적 욕구나 잠재적인 능력, 그리고 개별적 의지 등이 자연적-사회적 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 알게 모르게 습관을 만들면서 살고 있다.

셋째, 습관의 내용에 따라서, 동작과 표정 등의 “신체적 습관,” 정서와 감정을 표현하거나 통제하는 “정의적(情意的) 습관,” 그리고 기억, 신념, 판단 등의 “인지적 습관” 등의 구별이 가능하다.

다소 유사하지만, 차원을 달리하는 “동태적 습관,” “정태적 습관,” “내면적 습관” 등으로 구별할 수도 있다.

습관의 가장 구체적인 것은 밥을 먹을 때나 운동을 할 때의 것처럼 반복되는 동태적 행동의 습관이다.

이에 비하여 정태적 습관은 성격이나 인품이나 취향을 언급할 때처럼 “과묵한 성격,” “보수적인 성향,” “낭만적인 취향” 등으로 표현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이 경우에 구체적 동작이나 행동보다는 생활의 어떤 양태, 스타일, 경향성, 모습 등이 다소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내면적 습관은 생각하고, 성찰하고, 음미하는 인간의 마음과 의식의 형태에 관한 것이며, 개체의 생활, 혹은 생애의 전체를 지배하면서 독특한 삶의 모습을 만들어 유지하기도 한다.

넷째, 변화가능성의 정도에 따라서 “경직된 습관”과 “유연한 습관”으로 구분될 수 있다.

좀처럼 살아지거나 바꾸어지지 않는 굳혀진 습관,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표현처럼 한번 형성되면 오래 동안 지속하는 평생의 습관 등과 같이 잘 변하지 않는 습관이 있다.

그런가 하면, 어렵게 애를 써서 개발해 온 습관(기술)이 있지만 계속적으로 관리하지 못하여, 혹은 환경의 영향으로 흐트러지거나 잃어버린 습관이 있다. 어릴 때 외국에서 배운 말을 오래 동안 사용하지 않아 어느새 거의 완전히 소멸해 버린 언어적 습관이 있다.

그리고 자전거 타기나 헤엄치기처럼 한 동안 없어져 버렸지만 약간의 반복적 노력으로 쉽게 회복되는 습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