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 독일 하인리히 하이네 대학 박사/ 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연구원

하얀 목련꽃이 활짝 핀 모습.(사진=서혜정 기자)
하얀 목련꽃이 활짝 핀 모습.(사진=서혜정 기자)

[에듀인뉴스] 노랫말에 따르면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는 계절은 4월이었다. 그러나 3월 하순, 춘분이 이제 막 지났을 뿐인데 양지바른 곳의 목련은 이미 만개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하나 봄 햇살에 취해 꽃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어느새 지인들의 카톡 프사도 꽃으로 많이 바뀐 걸 보니 그래도 봄은 봄인가보다. 

농경의 역사가 오랜 우리나라에서는 24절기가 중요했다. 절기에 맞춰 씨를 뿌리고 경작하고 수확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이어졌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우리나라 고유의 명절인 설이나 추석 등은 음력인데, 24절기는 양력으로 계산된다.

해마다 하루 이틀 정도 차이는 있지만 입춘은 매해 2월 4일 아니면 5일이고, 춘분은 3월 21일 전후가 오차 범위다. 그렇다면 식물이 자라는 것은 달이 아니라 해의 주기와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옛 사람들은 더우면 곶 피고 추우면 닢 진다고 읊조렸지만, 꽃이 어떻게 피고 잎은 어떻게 지는지 그들이 그 메커니즘을 알 리는 없었을 게다. 식물이 어떤 환경에서 발아하고 개화하며 열매를 맺는지 탐구하는 것은 생리학의 영역이고, 무슨 유전자가, 혹은 특정 단백질이 어떠한 메커니즘으로 그 과정에 개입하는지를 밝히는 것은 분자생물학이나 생화학의 영역이 되겠다.

따라서 생리학의 역사가 더 길다는 것에 동의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매섭게 추운 겨울을 견뎌야지만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을 옛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과정과 원인, 관련 유전자나 단백질이 밝혀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한 번 뿌리박으면 평생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은 자신의 자리에서 가장 최선의 것을 이끌어내기 위한 방법을 물색하면서 진화해 왔을 것이다.

환경을 바꿀 수는 없으니 환경에 적응해나가기 위해서 유전자에서 끌어낼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을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 그런 주위의 환경 중에서 가장 덜 변덕스러운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절기였을 것이다. 지구의 자전, 공전과 함께 하는 낮과 밤의 길이에 맞춰서 식물은 자신의 생체리듬을 조절했을 것이다.

고도로 과학이 발달되어 일기예보쯤은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 4차 혁명의 시대, 21세기 AI의 시대에서도 우리 주변은 여전히 예측불가능한 것들로 가득하다. 전 세계는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와 전쟁을 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명절 덕담을 나눌 당시만 해도 2020년이 이렇게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2020이라는 숫자가 어쩐지 SF적이지 않느냐고 흘러가는 농담을 했던 지난 연말의 사적인 기억은 있지만 말이다.

호환마마가 무서운 시절이 있었다. 호환마마는 두려움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마마라는 극존칭으로 떡 하나 주며 달래보았던 천연두는 이미 역사가 되었다. 1977년 이후 자연감염의 예는 발생하지 않고 있다.

호환은 어떨까? 우리 전래 동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호랑이도 사실은 무서운 존재였다. 조선 시대에는 호랑이를 잡기 위한 기관이 따로 있을 정도로 호랑이가 주는 피해는 컸다.

한 지인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직업상 외국을 많이 돌아다니는 사람인데, 여러 나라 사람들을 접하다 보니 유독 한국 사람에게만 느껴지는 특징이 특유의 ‘냄새’가 없다는 것이었다.

마늘 냄새는 음식물의 냄새지 사람 자체의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냄새로 먹잇감을 찾아내는 호랑이를 피하고자, 특유의 냄새가 없는 사람들만이 우리나라에 살아남은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일견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떻든 한국 호랑이는 멸종된 상태가 아닌가 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호환을 극복했고, 호환이라는 말 자체를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시대에 살게 됐다. 참으로 끈질기게 살아남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 곳에 뿌리 내린 식물의 삶을 잠시 돌이켜 봤다.

우리 안엔 괴물도 살고 또 천사도 존재하는 것 같다.

재난이 터지자 그 장소로 향하는 의료진을 비롯해, 저마다의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증상을 인지하고서도 일부러 돌아다니는 사람, 의도적으로 지침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자주 귀에 들리니 말이다.

(사진=KBS 캡처)

사회적 거리두기를 권장하고 있는 이때에도 꽃놀이를 즐기는 상춘객들의 사진이 눈에 띄는 것을 보니, 인류의 진화도 아직은 진행 중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절기에 정직한 꽃들은 내년에도 필 터인데...

낭만주의 시인 퍼시 셸리가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라는 시를 쓸 당시, 그 아내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을 창조했다.

부부가 다 문학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람들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 안의 괴물을 키우기보다는 잠잠히 봄을 기다려야할 때가 아닌가 싶다.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바깥의 봄을 아쉬워하기보다는 내 안의 봄에 나만의 새 순을 보듬어보자. 비약이 심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2020년의 봄이 가장 찬란한 봄으로 기억될 수도 있지 않을까?

지인의 출산 소식을 들었다. 바이러스의 시대에도 새 생명은 태어난다.

새로 알게 된 봄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가야 해, 가야 해, 나는 가야 해. 순(筍)이 찾아 가야 해~~~"

이정은 
이정은 박사

이정은=독일 하인리히 하이네 대학 석사를 거쳐 같은 대학 생화학 연구실에서 특정 단백질에 관한 연구로 생물학 박사를 취득했다. 귀국 후 한국생명공학연구원과 충북대에서 박사후 연구원을 지냈고 충북대와 방통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복지관에서 세계문화와 역사교실 강좌를 담당하며 어린 시절 꿈이었던 고고학자에 한 걸음 다가갔다. 또 계간 '어린이와 문학' 편집부에서 함께 일하며 인문학에서 과학으로, 다시 인문학으로 넘나들면서 크로스오버적 시각에서 바이오필로피아를 담은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