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픽사베이)

[에듀인뉴스] 부모가 자식만큼은 굶주리지 않고 살길 바라며 소 팔고 땅 팔고 집까지 팔아 자식 교육에 헌신했다. 가난한 부모가 소를 팔아 등록금 대는 일이 많았기에 대학의 상아탑을 우골탑이라 불렀다. 이를 ‘포퓰리즘’이라 비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식이 겪을 가난과 굶주림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기에 가정경제가 무너져도 그랬다. 마찬가지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 빚을 내서라도 보호해야 한다. 이를 두고 포퓰리즘이라 비난할 수 있는가. 

대다수 국민은 교육의 의무를 다한다. 국방의 의무도 성실하게 수행한다. 노동을 통해 근로 의무도 이행하며 국가 존속에 이바지한다. 소득에 대해선 국가에 꼬박꼬박 세금도 낸다. 생활용품이든 무엇을 구매해도 세금이 포함된다. 

선량한 대다수 국민은 교육, 국방, 근로, 납세, 선거 등 국민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며 살아간다. 의무에 충실한 국민이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먹고 살기 힘드니 먹고 살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는 삶을 영위하기 위한 국민의 권리이자 국가의 의무이다. 

그런데 국가는 그 의무를 다하고 있는가. 가난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이들을 보고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할까. 부모가 자식을 위해 빚을 내서라도 가르쳤듯 국민을 위해서라면 빚을 내서라도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야 한다. 그게 국가의 도리이다. 이를 두고 포퓰리즘 운운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를 망각한 것이다. 

포퓰리즘을 언급하는 자들의 내면엔 그들이 누리는 삶의 질을 모든 국민과 공유할 수 없다는 차별과 배제 그리고 특권의식이 자리하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자식을 위해 헌신함을 두고 포퓰리즘이라 비판하지 않듯, 국민을 위해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것 역시 포퓰리즘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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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은 무언가. 가장 열악한 계층부터 최소한의 기본소득을 보장해야 한다. 최저생계비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국민에게 우선 기본소득을 보장해야 한다. 2020년 최저생계비는 1인 가구 기준 105만4316원이다. 소득이 전혀 없는 가구에는 기본소득에 해당하는 최저생계비 지원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국민을 살리는 걸 두고 어찌 포퓰리즘이란 용어를 들먹이며 폄훼할 수 있는가. 가난과 굶주림, 질병으로 백척간두에 선 국민의 위기상황을 목격한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빚을 내서라도 국민을 먹여 살리는 일이다. 최소한의 삶을 보장해주는 기본소득제도를 서둘러 도입해야 한다. 

동시에 교육 기회만큼은 계층에 상관없이 보장되어야 한다.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교육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는 위험하다. 그래서 대학교육까지 무상교육을 실현하는 것이 양극화 해소에 중요한 지점이다. 

포퓰리즘 비난에는 혐오와 경멸의 시선이 담겨있다. ‘나’와 ‘너’는 근본적으로 다르니 구별되어야 하고 살인적 경쟁과 그에 따른 서열화가 필요하다는 사고의 결과다.

인간 존엄이 사라지고 소외와 차별만이 일상화된 사회의 민낯이다. 과도한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진 바이러스다. 

굳이 영화 ‘기생충’을 말하지 않더라도, 견고하게 굳어진 계층 양극화가 소외와 차별을 당연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부모의 소득 격차가 자녀의 교육격차를 만든다. 자녀의 교육격차는 다시 성인이 되는 자녀의 소득 격차로 이어진다. 이런 악순환이 계층이동을 가로막는 바이러스이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가 끝났다고 직감하는 기성세대의 탄식과 이번 생은 망했다며 ‘이생망’을 외치는 젊은 층의 자조적 탄식도, 우리에게 무거운 화두를 던진다.

경쟁은 서열을 먹고 자란다. 서열은 차별과 소외를 정당화한다. 그래서 경쟁은 지독하게도 야만스럽다. 이 야만의 바이러스를 치료하지 못하면 우리 삶은 빈곤하고 사회는 집단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전경원 전교조 참교육연구소 소장/ 하나고 교사
전경원 전교조 참교육연구소 소장/ 하나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