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 독일 하인리히 하이네 대학 박사/ 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연구원

단군신화 속 곰과 호랑이.(출처=웹진 인벤)

[에듀인뉴스]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는 없었지만, 태어날 때부터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기록된 바, 부족국가 시대 때부터 해마다 제천행사를 통해 결속을 다졌을 만큼 흥의 공동체라는 것이 그 첫 번째다. 

거기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요소가 음주가무인데, 요즘 방송 트렌드만 봐도 이 분야는 시청률을 견인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음주는 즐기지 않고 가무는 재능이 0에 수렴하는 탓에 친해지는 게 불가능한 영역이라 나름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의 슬픈(?) 개인사에는 물론 아무도 관심 가질 리 없을 터이고. 

더 멀리, 건국신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로 한번 가 보자. 인간이 되기를 소망했던, 우리에게 친근한 두 동물은 하늘의 아들 환웅에게 자신의 소원을 빌 기회를 얻었다. 오냐, 가상하구나. 

이러이러한 조건을 충족하면 너희는 인간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하는 전지전능한 이의 명령을 따라 둘은 쑥과 마늘만을 지닌 채 동굴로 들어간다. 그렇다. 우리는 이렇게 자가격리로 역사를 시작했던 민족이기도 하다. 

인류사에 등장하는 몇 개의 사과 중 한 개를 소유하고 있는 17세기의 물리학자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의 제 1 운동법칙은 특정 물체에 작용하는 힘의 집합이 0일 때 운동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을 설명한다. 이른바 관성의 법칙이다. 

가던 버스가 갑자기 멈추면 그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앞으로 쏠리고, 서 있던 차가 갑자기 출발하면 뒤로 몰린다고 실생활 속에서 예를 찾는다.

동굴 속에 들어간 호랑이는 며칠 지났으면 그 속에서 지내는 것에 관성이 생길 법도 한데 결국 참지를 못하고 뛰쳐나간다. 

생명체에 있어서 관성이란 며칠 사이에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나보다. 그러하기에 어쩌면 본능은 가장 거대한 관성이라 칭할 수 있지 않을까? 뉴턴 오라버니의 멋진 공식에 토를 달 자, 그 누구인가. 물론 나는 그럴 능력이 없고, 그 전에 그럴 의지도 아예 없다. 단지 ‘물체에 작용하는 힘’에 대하여 부연 설명을 할뿐이다.

그 거대한 관성, 본능을 제어할 수단으로서의 힘에 대해서다. 곰과 호랑이를 동굴에 묶어 두었던 힘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욕망이었다. 뛰쳐나갔던 호랑이와는 달리 곰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었다. 

인내하고 인내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웅녀로서 단군왕검의 어머니가 되었다. 호랑이와 곰의 차이는 육식성과 잡식성의 차이였다는 흥 가득한 후손의 해학적 분석도 있지만 결국은 힘의 크기, 얼마나 간절한 욕망이었나가 관건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본다. 가정해 본다. 환웅이 내걸었던 조건 중 100일이라는 기간이 없었더라면 곰은 과연 견딜 수 있었을까 하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사람이 될 거야, 라는 애매한 말이었으면 애당초 자가격리를 시작할 수 있었을까 하고. 

(사진=픽사베이)

보통 동화의 첫 시작은 ‘옛날 옛날에’이고 역사에 빠지지 않는 구성 요소는 ‘서기 몇 년, 기원전 몇 년, 어느 왕 몇 년’ 등의 시대 표기다. 시대 표기가 명확하면 사료의 가치는 높아지고, 사람들은 그 역사적 사실 여부에 대해 의문 부호를 달지 않는다. 

숫자는 애매함에 선명성, 나아가 신뢰를 부여해 준다. 제목에 숫자가 들어가는 책들이 잘 팔리고, 결재자들은 그래프와 숫자, 퍼센테이지가 명된 보고서와 제안서를 선호한다. 

데이터를 근거로 하는 연구 결과에 후한 점수를 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과학이란 분야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 인식도 여기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일종의 마법과도 같다. 사람들의 심리를 파고 드는 숫자의 마법.

검사자와 확진자 수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정책은 신뢰를 주었다. 매일 발표되는 숫자가 그려내는 일련의 방향이 우리에게 무언가 예측 가능하다는 안도감을 선물했고, 그 가운데 나름대로 새롭다면 새로운 생활 패턴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만하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겠냐는 낙관론도 슬슬 고개를 든다. 그렇지만 개학이 늦어지고, 또 연기되며 사회적 거리두기의 기간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언제까지라고 했으면서 왜 또 연기하느냐고 투덜대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러나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예측은 늘 조심스럽다. 바깥에서 제시되는 숫자는 언제든 변동 가능하다는 걸 잊지 말자. 게다가 변수는 많고, 데이터는 턱없이 부족하다. 

2020년 자가격리,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대에 저 먼 옛날의 웅녀를 반추하며 오늘을 위로한다. 

단군의 어머니쯤 될 존재였으니, 그렇게 큰 욕망의 소유자였으니 100일이라는 시한이 없었더라도 환웅의 말을 믿었을 것 같다. 그래야 신화가 성립될 테니 말이다. 신화의 100이라는 숫자는 종종 ‘시한부’라는 의미보다 ‘많은 수’의 상징이니까. 

곰은 과연 어떤 숫자의 마법으로 그 기간을 견뎠을까? 곰은 미련한 동물이 아니라 영리한 동물이다. 너무 영리해서 때로 미련해 보이는지도 모른다. 곰과 사람, 관성을 제어하는 의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그래도 무언가 숫자가 주는 단기적 마법을 믿고 싶다면, 숫자가 주는 마법에 취해보고 싶다면 변동 가능한 것 말고 스스로에게 내면의 숫자를 제안해 보자. 

사회적 거리 두기의 시대, 오늘은 새로운 노래 10가지를 불러보기. 오늘은 지난번에 끝내지 못했던 책을 100페이지까지 읽어보기. 오늘은 오래 만나지 못한 지인 20명에게 카톡 보내기. 내 생활 속에서 숫자를 들이댈 부분은 무궁무진하다. 

아, 쑥 한 줌과 마늘 5개로 된장국 끓이기도 포함될 수 있겠다.

이정은
이정은

이정은=독일 하인리히 하이네 대학 석사를 거쳐 같은 대학 생화학 연구실에서 특정 단백질에 관한 연구로 생물학 박사를 취득했다. 귀국 후 한국생명공학연구원과 충북대에서 박사후 연구원을 지냈고 충북대와 방통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복지관에서 세계문화와 역사교실 강좌를 담당하며 어린 시절 꿈이었던 고고학자에 한 걸음 다가갔다. 또 계간 '어린이와 문학' 편집부에서 함께 일하며 인문학에서 과학으로, 다시 인문학으로 넘나들면서 크로스오버적 시각에서 바이오필로피아를 담은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