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일찍이 맹자는 인간의 본능으로 4가지를 들었다. 측은지심, 수오지심, 시비지심, 그리고 사양지심이 그것이다. 이는 각각 연민(동정심), 부끄러움(수치심), 옳고 그름(정의감), 그리고 양보와 배려(나눔)라는 4가지 특성으로 규정되어진다. 

그런데 현대 발달심리학자들은 이를 집약하여 두 가지 본능으로 요약한다. 이 둘은 인간의 사회성 형성 과정에 필수적 활동으로 간주된다. 

왜냐면 누구나 놀이와 게임을 통해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배우기 때문이다. 문제는 놀이와 게임이 발전하여 싸움이 되면 인간의 숨겨진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특히 국가 간 전쟁은 인간의 무의식까지 드러내는 통로가 된다. 이것이 바로 상반된 인간의 두 가지 본성인 공격과 연민이다. 

간단히 살펴보자.

첫째, 인간의 잔인한 공격성이다. 프로이트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전쟁과 죽음에 대한 고찰’이란 제목의 글을 출간했다.

여기서 그가 주목한 결론은 개개인의 무의식 가운데 숨어 있는 공격 본능이다. 누구나 낯선 타인을 적으로 낙인찍고, 적을 죽이거나 그의 죽음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전쟁은 우리가 나중에 얻어 입은 문명의 옷을 발가벗기고,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원시인을 노출시킨다”라고 진단한 바 있다. 전쟁 중에 드러난 인간의 공격성은 전쟁이 끝나도 타인을 자꾸 적으로 보는 순간마다 고개를 든다. 

둘째, 연민(compassion)이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은 적군과 마주했을 때 정작 사살하지 못했던 일을 회고한 바 있다. 왜 총을 발사하지 못했을까? 찢긴 옷을 반만 걸치고, 바지를 움켜쥐고 헐떡거리는 타인의 겁먹은 눈을 바라보았을 때 생긴 연민 때문이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병사 중 오직 15%만이 적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는 보고서도 이런 연민의 본성을 잘 보여준다. 또 ‘우물가로 기어가는 아이를 보면 즉시 달려들어 목숨을 구하려는 것’이 바로 동일한 인간의 본능인 것이다. 

눈을 잠시 밖으로 돌려보자.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그들의 공격성은 지금도 살아 유령처럼 배회한다. 전쟁가능국가로 개헌을 갈망하는 일본의 아베에게 한국은 결코 경쟁하고 협력하는 이웃이 될 수 없다. 

아베는 자신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 늘 죽어야 할 사람은 다른 사람, 바로 이웃나라 한국과 일제침략의 옛 추억이 서린 동남아 사람들이다. 

반면에 국내로 시야를 돌려보자. 일본 대사관저 앞에서의 수요시위는 최근에 1434회를 넘었다. 수요시위의 정식 명칭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다. 이는 단지 정치성이 강한 이들만의 행사가 아니다. 

참가자 중에는 기차를 두 번 갈아타고 왔다는 여고생들도 있었다. 이 아이들은 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감정에 복받쳐 있던 한 학생은 말했다. “저보다도 어린 나이에 저런 일을 당하신 거잖아요” 그 여학생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인간 내면에 연민의 본성이 없다면, 누구도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집회에 나올 수 없다. 연민의 본성으로 가득 찬 수요시위는 일본의 사죄를 목 놓아 외치지만, 타인에 대한 연민보다 공격 본능에 충실한 아베는 전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공격과 연민의 본성을 동시에 가진 인간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 코로나19로 인해 격리와 봉쇄, 사회적 거리두기로 고군분투하는 이 지구촌에서 동시대인으로 함께 살아가면서도 연민보다 공격에만 사활을 거는 정치행위엔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눈앞의 자신만의 이득과 기득권 수호에 몰입해 진정한 리더십을 상실한 국가는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이제는 적의 죽음과 공격만 생각하는 정치적 인간보다 피해를 입은 이들의 상처를 공감하는 연민과 인류애가 충만한 사회적 인간이 이 땅에도, 일본에도 그리고 미국을 위시한 전 세계에도 더욱 많아지길 기대한다. 

전재학 인천 제물포고 교감<br>
전재학 인천 제물포고 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