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덜위치칼리지서울영국학교)

[에듀인뉴] 학교 교육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이것은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출발점 질문을 건너뛰는 것이다.

‘바람직한 행동으로의 변화’라는 가장 보편적인 교육의 정의를 넘어 이젠 코로나19라는 팬데믹(pandemic: 세계적 대유행)을 겪으면서 우리는 진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되짚어 보게 된다.

지금까지 인류는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 교육학적 논의를 충분히 거쳐 왔다. 즉, 인간의 성장 과정을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단계별 구분하여 각 시기에 적합한 내용으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탐구함으로써 금과옥조의 이론과 실제를 구성해 왔다.

그런데 왜 다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가?

우리 교육은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존립해 왔다. 왜냐면 각 대상자에 무관하게 일률적으로 진학이나 승진, 그리고 순위를 정하기 위한 평가 위주로 교육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단연코 청소년기의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평가(고입, 대입)가 핵심을 이루어왔다. 그래서 전 국민의 최대 관심사는 바로 평가를 잘 받아 소기의 목표를 이루면 된다는 교육의 불균형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겐 코로나19 대응이란 특수한 상황을 맞이하면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의 문제를 재고(再考)하게 되었다. 비로소 교육의 수단과 목적이 뒤바뀐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는 위기가 가져다준 전화위복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교육은 이제 개인과 국가를 넘어 범지구적인 생존을 거론하며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 특별한 과제를 안고 있다.

대한민국 역사상 지금과 같은 학교의 모습은 처음이다. 최근 5개월 만에 입시생에 대한 배려를 목적으로 고3, 중3을 등교 1순위로 삼아 학년별로 순차적인 등교를 추진해 오고 있다.

외부인의 시선으로 보면 대한민국은 분명 입시를 숭상하는 시험 만능국가다. 어떤 위험한 상황이 되어도 입시와 평가가 최우선이다. 그러니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도 고3, 중3 우선주의에 따른 입시와 성적 평가가 최우선 가치였다. 거기에 더해서 우리 교육은 ‘정시 대 수시 비율’ 정하기가 교육정책의 최대 중점사항이다.

5월 21일 전국연합학력평가를 치르는 학생들.(사진=경남교육청) 
5월 21일 전국연합학력평가를 치르는 학생들.(사진=경남교육청)

역대 국가 지도자들은 이런 입시 방법을 변경함으로써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는 국가적으로 교육개혁이란 이름으로 온통 입시지상주의라서 가능한 일이다.

학생들에게 생각하는 힘과 다양한 경험, 새로운 지식과 가치를 어떻게 교육하여 훌륭한 인재로 키울 것인지에 대해 고민할 여유가 없다. 한마디로 빈약한 내용이라도 평가라는 중심축에 구속되어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는 소홀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관점을 현재로 옮겨보자.

학생들이 현행 온라인 수업은 단지 바이러스 감염에 따른 방역의 일환으로 어쩔 수 없다는 생각만 한다면 이는 교육적 측면에선 거의 최하 수준이다.

교육이 고민할 것은 이러한 사태를 초래한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학생들이 얼마나 깊이 있게 생각하고 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과거와 현재의 인류사에서 무엇을 알고 미래를 위한 행동으로 어떻게 전환해야 하는가라는 점이다.

팬데믹은 방역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크게는 인류 문명의 기원, 성장, 멸망에 관한 대서사이다. 그리고 역사상 모든 팬데믹은 희생양 찾기와 혐오, 그리고 새로운 세계관이 공통적으로 뒤따라왔다.

예컨대 과거 흑사병이 창궐해 유럽인의 3분의 1이 사망했던 14세기에는 유태인들이 희생양이었고, 농노들이 대거 사망함으로써 봉건제도의 기반 자체가 흔들렸으며, 중세가 무너지고 르네상스라는 휴머니즘이 등장했다.

이번 코로나19 팬데믹도 유사한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미·중 국가 지도자는 연일 서로에 대한 혐오를 쏟아내고 있고, 대한민국은 성소수자를 희생양 삼아 이태원 클럽 관련 집단감염에 대해 분노하고 있으며, 북미·유럽 중심의 선진국 담론은 이제 수명을 다하고 새로운 국제 질서가 싹트기 시작했다.

(사진=KBS 캡처)

가장 최근엔 미국 미네소타주의 한 백인 경찰의 과잉제압으로 비참하게 숨진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사건과 그로 인해 촉발된 미국 전역의 항의 시위는 팬데믹에 만연하는 인종 간의 혐오와 차별의 사례이기도 하다.

코로나19는 진화생물학, 통계물리학 같은 자연과학에서부터 문학, 역사, 철학 같은 인문학, 그리고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심리학 같은 사회과학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범주제인 셈이다. 이보다 더 좋은 텍스트가 또 있을까?

지금 학교에선 과거 1, 2차 세계대전 후에 전쟁에 대해 가르쳤던 것처럼 우리 아이들에게 팬데믹에 대해 상세하게 가르쳐야 한다. 우리에게는 인류가 겪고 있는 위협에 대해 후세들에게 해명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학교는 사실(Fact)과 가치(Value)를 전수하는데 세대의 말단까지 지혜의 혈액을 공급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학교는 문명의 심장이다. 전수하지 않으면 문명은 사라져 간다.

지금은 우리가 잠시 잊었던 중요한 사실을 다시금 소환해야 한다. 바로 어떻게 전수하느냐의 ‘how’ 보다 무엇을 전수해야 하느냐의 ‘what’ 의 문제가 더 본질적인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우리에게 내리는 준엄한 명령, 그것은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요구한다. 이 고민은 전 세계가 연대하여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왜냐면 현재 우리는 ‘초연결사회’이자 ‘위험사회’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전재학 인천 제물포고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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