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교육부 장관

[에듀인뉴스] 교육계와 교육학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학계에서도 존 듀이(John Dewey)는 누구에게나 이미 잘 알려진 이름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알려진 만큼 그의 이론이 잘 이해되고 소개되어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의 사상은 ‘실용주의’, ‘실험주의’, ‘진보주의 교육’, ‘새교육’이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어 왔고, 우리의 교육계와 교육학계는 그를 현대적 교육사상의 근원인양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교육계에서 심도 있게 평가된 수준은 아니었다. 에듀인뉴스는 정치와 교육의 이념적 갈등이 극심하고 특히 자유주의적 전통과 강령적 기조에 대한 이해의 혼란이 심각한 수준에 있는 이 때, 존듀이의 실험주의적 자유주의와 이에 관련한 교육사상을 검토해 보는 ‘왜, 지금 존 듀이를 읽어야 하나’를 연재한다.

(이미지=픽사베이)
(이미지=픽사베이)

[에듀인뉴스] 습관은 어느 것이나 한번 형성되면 그 자체가 힘으로 작용한다.

내가 하고 싶고 내가 바라는 바를 이루고자 할 때, 필요한 습관이 형성되어 있으면 의식적인 관심을 두거나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원하는 바를 바로 그 습관의 힘으로 쉽게 달성할 수 있다. 이런 경우가 빈번하게 생기면 관련된 습관은 좋은 습관에 해당한다.

그러나 내가 가진 좋지 못한 습관도 있다. 특정한 습관이 항상 좋거나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필요에 따라서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일종의 도구적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어떻든 습관은 그 자체가 힘이다.

그렇다면 습관이라는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자아의 성장을 가져 오는 길이 되는가?

첫째, 우선 가장 쉽게는 일상적 문제의 처리에 습관의 힘을 사용한다.

우리는 일상적인 생활 상황에서 수시로 겪는 외부의 공격이나 자신의 좌절이나 갈등 등을 습관들을 동원하여 쉽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감당해낸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에서 자주 필요로 하는 습관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새로운 상황 혹은 환경에 적응하는 데 유리하다.

어릴 때부터 구구단도 잘 익혀두고, 엔간한 수준의 암산능력도 길러두고, 달리는 방법도 익히는 것은 바로 습관의 일상적 효용성 때문이다.

둘째, 성장을 위한 자기관리의 방법은 습관의 관리를 의미한다.

필요로 하는 좋은 습관을 만들거나 좋지 못한 습관을 버리는 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 때 성공적인 자기관리를 하는 셈이 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인격자”라고 칭찬할 때, 그것은 바로 자기관리를 위한 습관의 힘을 잘 사용한 경우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내가 어떤 인물이 되고자 하는 야망이나 포부가 있다면, 그것을 실현하는 길은 바로 어떤 습관을 기르고 어떤 습관을 버려야 하는가를 가리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운동선수가 자기관리를 위하여 어떤 습관은 만들고 어떤 습관은 고치거나 버린다.

셋째, 개개인의 성취역량은 필요한 습관들을 얼마나 균형 있게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우수한 과학자가 되자면,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갖추어 사용하는 습관이 요구되고, 실험이나 조사나 토론을 하는 기술과 방법을 연습하여 습관의 수준에 있게 하여야 하고, 필요한 지식과 정보, 능력과 기술을 유지하기 위한 긴장이 습관화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힘을 지닌 습관들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의도적인 노력에 의하는 경우도 있고 자연적으로 부지중에 형성되어 버린 경우도 있다. 부지중에 형성된 것 중에는 좋은 습관도 있고 좋지 못한 습관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습관의 형성을 위한 노력에는 두 가지, 즉 새로운 것을 형성하려는 적극적 관리의 노력과 잘못된 것을 교정(혹은 제거)하려는 소극적 관리의 노력이 있게 된다.

흔히 습관은 행동의 부지중 혹은 의식적 반복을 통하여 형성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구체적 행동으로 나타나는 습관의 형태는 반복의 과정을 통하여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고, 마음의 내면에 형성되어 있는 심리적 성향의 특징을 지니는 습관은 행동의 반복에 의한다기보다는 특정한 동기가 지속적으로 유지됨으로써 습관적 특징을 지니게 된다.

전자가 “외현적 습관”이라면 후자는 “내면적 습관”이다.

구체적 행동으로 나타나는 외현적 습관, 예컨대 암기 혹은 기억, 기술, 기능, 숙련 등은 반복적 연습을 통하여 습관의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그리고 주의력이나 신중성 등도 의식적 집중의 반복으로 우리의 마음에 자리 잡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관용성이나 인내성 같은 행동적 성향도 우연한 일시적 기회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 통제의 반복된 과정을 요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내면적 습관은 어느 것이나 그 특징에 있어서 반드시 반복적 과정을 필요로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동기의 지속적 유지에 의해서 형성된다.

탐구심이나 모험심 같이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는 습관은 탐색적 관심의 장기적 유지에 의하는 것이고, 자제력이나, 동정심, 반성적 성향 등은 내면적 성찰이 항시적으로 유지된 습관의 형태이며, 의협심이나 정의감 등은 얼핏 일시적인 감성적 혹은 격정적 반응의 표출로 보이지만 이러한 정서를 유발하는 내면의 동기가 일종의 성향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종합적으로 정리해서 학습자의 개체적(인격적) 성장은 선천적인 잠재력의 실현과 환경적 영향의 결정체이지만, 그냥 피동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각기의 자아는 습관들을 형성하고 교정하고 관리함으로써 개성(혹은 인격)의 유지와 성장의 삶을 영위한다.

그러므로 개체의 인성은 습관들의 구성체이고, 또한 인성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거대한 습관”이기도 하다.


인간의 기본적 동인인 '의지', 듀이는 습관의 복합체로 보다


동서양 문명권의 인간사회에서 보면 진지하고 합리적인 사고와 행위를 존중하는 전통이 있고, 인간이 지닌 의지의 개념이 그 중심에 놓여 있다. 즉 인간에게는 진지하고자 하고 합리적이고자 하는 의지가 그 중심에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 혹은 가치를 설정하게 되면 그것을 실현할 수단을 선택하려는 의지가 작용한다. 의지는 바로 인간 행위의 기본적인 동인이다.

이러한 의미의 의지란 무엇인가를 실천하고 이행하는 어떤 정신적 힘으로 여겨진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의지”라는 것 그 자체는 원천적으로 목적과 수단에 관한 선택과 집념과 집요한 실천력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듀이는 오히려 의지란 습관의 복합체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하였다.1)

1)위의 책, Dewey, Human Nature and Conduct, pp. 21-22

의지도 한갓 습관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습관의 개념은 반복적 행동의 수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를 지배하는 일종의 관성적 힘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의지는 습관적으로 이루어진 행위의 결과에 따라서 그 행위를 기피하거나 수용하는 그런 성격의 힘은 아니다. 오히려 의지는 습관을 지키고 그러면서도 습관의 지배를 받는다. 듀이의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는 습관의 의미를 크게 확장시켜 준다. 특히 개성 혹은 인격에 대한 체계적인 자연주의적 설명의 길을 넓혀 주기도 한다.

인간의 행위는 어느 것이나 그 원인과 결과에 있어서 그가 속한 특정한 사회 혹은 특정한 구성 집단의 작용이나 영향을 필연적으로 받게 마련이다.

내가 나의 의지로 무엇인가를 결심한다면, 결심 그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환경이 작용하였고, 또한 그 행위가 습관으로 자리 잡는 데도 그 환경이 허용해야 하며, 때로는 환경의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경지에 있기도 한다.

인간의 활동은 한 개인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그것은 그를 둘러싼 물리적-사회적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습관으로 만들어지기까지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수용하든지 거부하든지 저항하든지 지원하든지 공감하든지 할 것이다.

그리고 평범한 인간이 일상적으로 행하는 많은 것들은 신중하게 결정된 것도 아니고 미리 계획된 것도 아닌 것이 보통이다. 오히려 습관적인 것이다.

책 '인간 본성과 행위1' 표지.(존 듀이 지음, 최용철 옮김, 붐, 2020)
책 '인간 본성과 행위1' 표지.(존 듀이 지음, 최용철 옮김, 붐, 2020)

그러면 습관이란 본질적으로 어떤 것이냐? 흔히 우리는 습관이란 어떤 행동의 반복적인 특징이라고 생각하지만, 듀이는 「인간 본성과 행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습관은 어떤 행위가 단순히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좋건 싫건 간에 독특한 성격을 띤 어떤 특정한 자극들에 대하여 일정한 방식으로 민감하거나 아니면 둔감한 반응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2)

2)위의 책, p. 32.

이러한 의미의 습관은 의지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와는 다소 다른 것 같이 여겨진다.

우리들에게는 일정한 시간에 잠자고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는 습관이 있다. 그냥 반복적으로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좀 더 엄격히 검토해 보면, 해가 지고 어두워져서 밤이 깊어지는 환경의 변화가 찾아오면 잠자리에 들고, 날이 새는 환경이 찾아오면 잠에서 깨고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습관이 있다.

집에서도 그렇고 여행 중에도 그렇다. 그냥 단순한 기계적 반복이 아니라 특정한 환경이 주는 상황적 조건(자극)에 반응하는 특정한 방식이 바로 습관이다.

“나의 습관”은 이전 행위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며 그런 점에서 내게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내가 획득한 것이지만 외부와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습관, 예컨대 잠에서 깨어 일어나는 습관 그 자체 속에는 자질구레한 동작이나 기분 등의 요소들이 어떤 모양의 질서에 따라서 체계화되어 있다.

눈을 뜨고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펴는 등의 움직임과 다소 몽롱한 상태에서 점차로 정신을 차리는 순서가 있듯이 그 질서가 바로 습관의 힘을 발생케 하는 바탕이 된다.

습관의 질성적인 특징은 잠복된 상태에 있을 때는 활동적이지 않지만, 상황이 적절히 주어지면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출되고, 그 행동을 지배하면서 역동적인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많은 습관들을 우리의 체질 속에 잠재적인 상태로 두고 있지만, 그 습관들이 그냥 기계적으로 발휘되고 힘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환경적 요소들이 구조적으로 충족될 경우에 가능한 것이다.3)

3)위의 책, 같은 부분.

듀이는 습관과 행위에 관한 논의에서, 우리의 신체적인 동작이나 상태를 스스로 제어하는 습관은 도덕적인 품행과도 관련성이 있다는 점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4)

4)위의 책 pp. 26-27.

그는 예를 들어 신체적으로 “똑 바로 선다는 것”을 두고 그것에 넓게 의미를 부여하였다. 바로 선다는 것은 단순한 신체적인 제어와 동작의 형태이지만 “좋은 자세”는 환경과 신체와 의지를 함께 포괄하는 특징을 지닌다는 것이다.

엄격히 말해서, 아주 순수한 의지(“나는 지금부터 똑 바로 서 있고자 한다”)라고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실제로 행동을 자유자제로 하지는 못한다. 바른 자세를 취한다는 개념은 우리가 신체적으로 좋은 자세를 취한 상태를 생각할 때 가능한 것이다. 오직 올바른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만이 똑 바로 서는 것의 개념을 형성할 수 있고, 그러한 개념을 가진 사람만이 “옳은 행위”에 관해서 생각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내용을 지니게 된다.

말하자면, “똑 바로 선 자세”의 질성적 내용이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듀이는 실제적 습관들에는 일반적으로 그것들이 만들어지는 사회적 맥락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5)

5)위의 책 pp. 15-20.

달리 말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즉 그들에게 노출된 상태에서 행동과 습관을 획득하게 된다.

그런데 흔히 사회적 제도와 관행, 집단적 관습에 관하여 말할 때, 그것들이 개체적 습관들의 통합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말하자면, 제도, 관행, 관습 등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형성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이러한 가정은 잘못된 것이다. 한 집단이나 사회에 속하는 사람들은 상당한 정도로 관행이나 습관의 동질성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유사한 상황에서 유사한 방식으로 반응한 결과이다.

그런데 관습들이 다소 오래 동안 지속하는 것은 그 사회적 환경 속에 사는 사람들이 기존의 관습에 의해서 형성된 사회적 조건을 물려받아 거기서 그대로 개인적 습관들도 형성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방법론적 지역주의”6)의 관점이 성립한다.

6) methodological localism

즉 개체는 사회적 관행과 규범의 지속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듀이 사상이 지닌 하나의 독특한 관점, 즉 개인의 사회적 형성이라는 일면을 보여 준다. 개체들은 누구나 유아로 태어나서 그들의 생애를 시작한다는 사실을 자세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젊은이들의 가소성(可塑性)은 더욱 넓은 경험을 소유하고 싶어 하고, 결과적으로 거역할 수 없는 더 큰 힘에 귀속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도록 한다. 현재의 체제에 순응하는 데 집착한다는 것이다.

교육은 바로 젊은이들의 이러한 무력성을 이용하여 습관을 형성하고 관습의 장벽을 유지하도록 보장해 주는 제도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7)

7)위의 책, pp. 90-91.

더욱이 개체의 습관들은 다시 사회적 특징을 새롭게 조성하는 데 작용한다.

그리고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습관들은 사회적-문화적 환경 속에서 형성된 것이므로 구성원들 간에 서로 인간성을 끝없이 연결시키는 고리가 된다.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한 사회적 공동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서 볼 수 있다. 그 연결의 중요성은 앞서간 세대로부터 전해오는 환경에 의존하여 습관들이 이어져 간다는 데 있다.(비유컨대, 마치 같은 물속에서 자란 물고기들처럼.)

말하자면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갈 미래의 세계에서 지금의 우리가 노력하는 바가 어떤 결실을 가져 올 것인가를 예측할 수 있게 한다.

습관은 호흡하고 소화하는 것과 같은 생리적인 기능에 쉽게 비유해 볼 수도 있다. 생리적인 기능은 분명히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인데 비하여 습관은 오히려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분명히 차이가 있다.

하지만 습관이 여러 가지 점에서 생리적인 기능과 유사하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유기체와 환경의 상호협력적인 관계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호흡은 폐가 작용하는 것이지만 공기와도 함께 하는 것이고, 소화도 위의 조직이 작용하는 것이지만 음식과 함께 하는 것이다.

사물을 본다는 것도 눈과 시신경의 작용이지만 빛과 함께 하는 것이다. 걷는다는 것도 다리뿐만 아니라 땅과 함께 하는 것이고, 말을 할 때도 발성기관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공기가 있어야 하고 말동무나 들어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호흡하고 소화하는 것은 자연적 조작기능이고, 말을 하고 정직하게 행동하는 것은 학습된 기능이지만, 모두 인간이 환경과 더불어 함께하는 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느 것이나 유기체적 구조와 학습된 성향, 그리고 환경이 함께 협동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같은 공기도 어떤 조건하에서는 호수에 격랑을 일으키거나 건물을 파괴하기도 하고, 어떤 조건 하에서는 혈액을 맑게 하는 데 작용하기도 한다. 결과는 공기가 무엇에 작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사회적 환경이 작용하는 양상도 사람들이 가진 본래의 충동적 기질과,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 그리고 그들이 지니고 있는 도덕적 습성에 따라서 달라진다.

사람이 그때그때 취하는 행동들의 일반적 속성도 그래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특별한 사례를 두고 생각하는 데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배타적으로 차단해 버리면, 이는 자칫, 마치 호흡하고 소화하는 것이 인간의 신체 속에서 완성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할 수도 있게 한다.

도덕적 논의에서 어떤 합리적 근거를 얻고자 할 때, 한편으로 우리는 생리적 기능과 학습된 습관,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환경과 더불어 통합하는 방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맥락에서는 둘이 서로 분리해서 생각될 수 없기 때문이다.

듀이가 자주 시도하는 방식으로, 습관은 예술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해도 같은 의미를 전달할 수가 있을 것 같다. 즉, 하나의 습관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감각과 운동을 담당하는 신체적 기관, 교묘한 솜씨를 발휘하는 기능, 그리고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소재 등이 함께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습관은 객관적으로 주어진 에너지를 흡수하고 결국에는 환경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습관은 자체의 질서를 세우고 자체를 스스로 다듬어 무엇인가를 다루는 확실한 기술과 같은 것이 되기도 한다.

습관에는 시작과 중도와 종결이 있다. 단계마다 소재와 도구를 다루면서 발전하고, 소재를 실질적으로 활용이 가능한 수준에 이르도록 수정하면서 발전한다.

석물(石物)을 다루는 데 능란한 솜씨를 발휘하는 사람이 자신의 예술적 기능은 어떤 대상물과 도구의 도움도 없이 자기 안에 있는 재능이 발휘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비웃음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도덕과 관련해서도 그러한 독선적 사고에 깊이 빠져 있는 경우가 있다. 즉, 도덕적 성향은 전적으로 한 개체의 자아에 속한다는 생각이 그러하다. 개체의 내심에 도덕성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아는 자연적-사회적 환경에서 고립된 상태에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 학파에서는 도덕적 문제를 인격의 개념에 한정하고 있다. 인격을 실천적 행동과 분리시키고, 또한 도덕적 동기를 구체적 행동과 분리시키면서, 거기서 얻은 결론을 바탕으로 화려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론을 펴는 경우도 있다.

도덕적 행위도 일종의 기능이며 예술(기예)에 비유할 수 있다고 보면, 도덕성을 주관적이고 “개인적”이라고 생각하는 근거를 뿌리째 뽑아버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도덕성을 땅에 내려놓게 된다. 만약에 여전히 하늘에 올려놓고자 하면, 그것은 땅의 하늘일 뿐이지 다른 세계는 아니다. 정직, 순결, 악의, 역정, 용기, 천박, 근면, 무책임 등은 한 개인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개인적 자질이 환경의 힘에 적응하는 행태일 뿐이다.

모든 덕성과 악성은 객관적 힘에 합일하려는 일종의 습관이다. 한 개체의 성품에 영향을 준 요소들이 바깥 세계에 의해서 제공되는 요소와 상호작용하는 양태이다.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교육부 장관
이돈희 에듀인뉴스 발행인/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교육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