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어로 점철된 교육 바이러스 팬데믹, 맞서 싸울 질본도 없어

[에듀인뉴스] 요즘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육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K-에듀라는 말도 나왔다. 별의 별 교육이 다 나오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2차 팬데믹이 온다는데, 그 다음에는 온갖 ‘무슨무슨 교육’이라는 유행어로 점철된 교육 바이러스 팬데믹 차례인 듯 싶다. 더구나 이 교육 바이러스는 맞서 싸울 질병관리본부(질본)도 없다.

교육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과정은 이렇다. 우선 사회에 뭔가 큰 화두를 던지는 사건이 하나 일어난다. 그러면 그 화두 때문에 교육이 이전까지와 전혀 다른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나온다. 물론 바이러스와 마찬가지로 그 뒤에는 각종 약을 파는 업자들이 뒤따른다.

교육을 바꾸자는데, 새로운 교육을 하자는데 왜 하필 ‘바이러스’라는 흉측한 이름을 붙이느냐 반문할수도 있다.

교육을 신체에 비유하자면 그 균형을 흔들어 전체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다. 교육이 쉽게 바뀌지 않는 까닭은 교육자들이 보수적이거나 고루해서가 아니다. 쉽사리 바뀌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아동기, 사춘기 시절로 언제든지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교육을 다양한 실험의 장으로 만들어도 된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학령기는 단 한 번 뿐이다. 그때가 지나면 돌이킬 수 없다.

바이러스의 백신이나 치료약 개발에 몇년에 걸친 신중한 임상시험이 필요하듯, 교육 역시 뭔가 바꾸려면 그 정도의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함부로 ‘무슨무슨 교육’이라며 떠드는 사람들은 바이러스 치료제나 백신을 뚝딱하고 개발했다며 호언장담하는 코스닥 작전세력이나 다름없다.

학교를 비판할때 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21세기의 아이들을 아직도 19세기 근대 교육의 산물인 학교에서 가르친다”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을 한번 뒤집어서 보자. 그럼 그 낡아 보이는 근대 학교 모델이 그만큼 보편적인 교육 모델이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그만큼 그 안에 교육의 어떤 보편적인 속성이 들어 있고, 그래서 21세기가 되어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심지어 지난 두 세기 동안 인류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처럼 코로나 19 정도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의 엄청난 격변과 재앙을 거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모델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은 끄덕없이 남아 있다.

교육에는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오랜 세월을 변함없이 이어지는 어떤 본질(core)이 있다.

만약 어떤 큰 일이 일어날때 마다 새로운 교육 모델이 세워져야 했다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교육은 포스트 시민혁명, 포스트 산업혁명, 포스트 세계대전, 포스트 스페인 독감, 포스트 냉전, 포스트 달착륙 등 수 많은 포스트들을 거쳐야 했을 것이고 -이들은 모두 코로나보다 더 큰 사건들이다- 19세기와 너무나 달라져서 깨알같은 주석 없이는 <수레바퀴 아래>나 <빨간머리 앤> 같은 소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바뀌어 있을 것이다. 

넷플릭스 빨간머리 앤 캡처 

하지만 우리는 학교를 주 무대로 하는 100년전의 저 소설들을 별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다. 많이 바뀌기도 했지만 동시에 바뀌지 않은 본질적인  부분들도 많은 것이다.

그러니 당장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처럼, 심지어 “우리는 결코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라고까지 말하며 지금까지의 교육과 작별인사라도 해야 할 것처럼 호들갑 떠는 사람들의 목소리로부터 잠시 귀를 닫아야 한다.

그리고 냉정하게 지난 200년 간의 교육의 역사를 돌아보며, 우리가 지켜야 할 교육의 코어는 무엇이며 유연하게 바꾸어야 할 주변부는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뭔가 새로운 것이 나올때 마다 지금까지 교육이 학교가 잘못되었다며 소란을 부릴 것이 아니라 우선 성찰해야 한다. 우리 교육에게 부족한 것은 변화가 아니라 성찰이다.

몇 년 전 인공지능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물리쳤을 때의 호들갑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때도 얼마나 많은 각종 미래교육론들이 쏟아져 나왔던가? 이름이 조금이라도 난 사람들은 너나 할것 없이 인공지능 때문에 사라질 일자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살아남으려면 어떤 일자리를 차지해야 하는지, 그러니 그런 일자리에 적합한 사람을 기르기 위해 교육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한 마디씩 거들었다.

70%의 학생들이 사라질 직업을 얻기 위해 하루의 대부분을 쓰고 있다는 식의 말로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을 무가치한 것으로 폄하해 가면서 말이다.

서울시교육청이&nbsp;내년부터 3개교를 선정, 인공지능(AI)-사물인터넷(IoT) 시범학교로 운영한다.(사진=오영세 기자)
서울시교육청이 내년부터 3개교를 선정, 인공지능(AI)-사물인터넷(IoT) 시범학교로 운영한다.(사진=오영세 기자)

하지만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기술이 아무리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교육은 사람을 기르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본질에 큰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교육의 본질 역시 쉽사리 바뀌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물론 세상은 변하며 거기에 따라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의 능력이나 성향이 달라질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달라져도 ‘사람으로서의 본질’, ‘본질적인 휴머니티’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교육은 먼저 그것을 튼튼하게 지키는 가운데 세상의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인공지능 시대에 필요한 교육은 단지 인공지능을 잘 다룬다거나, 인공지능이 하지 못하는 분야에 능숙한 사람을 기르는데 그쳐서는 안된다.

교육은 인공지능의 인간적인 활용, 인공지능을 보다 인간적이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도구로 정착시키고, 인공지능을 통해 자신의 인간성을 더욱 함양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길러내야 한다.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 진정한 인공지능 시대의 교육담론이다.

포스트 코로나 교육 담론 역시 마찬가지다. 이 말을 입에 담는 사람들은 한결 같이 감염병에서 비롯되는 언택트 사회, 그리고 여기에서 비롯되는 원격교육 방법 모색, 원격교육과 대면교육의 혼합(블렌딩) 등등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이 현란한 기술의 향연을 잠시 멈추고 좀 더 근본적인 물음부터 던져보자. 코로나 19가 우리에게 던져준 교훈은 감염병, 언택트 따위가 아니다. 

다만 “예상하지 못한 재난 상황”에 교육이 얼마나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느냐?”라는 커다른 물음이었다. 

코로나 사태 때 우리 교육이 드러낸 취약한 모습을 원격교육에 필요한 기술적 역량, 언택트 교육 모델의 부족에서 찾는 것은 너무 협소하다.

그때 우리 교육이 휘청거렸던 까닭은 그런 기술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경험하지 못했던 상황이 닥쳤을 때 여기 적응하는 유연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교육 당국이 기존의 방식에 미련을 남기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못할 것처럼 보였던 교사들이, 유연한 대응을 허용하자마자 순식간에 그 기술적인 격차를 만회하는 모습을 목격한 바 있다.

앞으로 우리가 직면해야 할 상황이 반드시 감염병 사태만, 그래서 언택트, 원격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상황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포스트 코로나를 그렇게 협소하게 이해해서 온통 원격수업 인프라 구축에 올인했는데, 대지진 같은 재난이 일어나 얼마 남지 않은 학교 건물에 많은 학생이 밀집하고, 학교간 학생간 원격 네트워크는 단절되는 정 반대 상황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교무업무시스템이니 뭐니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 오직 오프라인, 아날로그로만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끊어진 네트워크에서 공문 날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든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이라고 판단되는 교육을 당장 실행할 것인가?

코로나 사태는 바로 이런 문제에서 우리 교육이 가지고 있는 취약성을 보여주었다. 권위적이고 현장에 대한 통제권을 온통 움켜쥐고 있는 교육 행정체제의 취약성, 여기에서 비롯된  교사의 자율성 및 창조성의 부족 같은 것들. 매 차시 단위로 꽉 짜여진 교육과정과 시간표, 이를 교사의 자율적인 적용 여지 없이 전산화하여, 한치의 이탈도 허용하지 않는 콘크리트처럼 꽉 막힌 관료제 시스템이 교육을 얼마나 무능하게 만드는지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이게 바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훈이다. 이 문제를 다루지 않는 포스트 코로나 담론은 결국 또 다른 교육 바이러스 심지어 거기 편승한 약팔이에 불과하다.

코로나 사태를 통해 우리 교육에 반드시 필요함이 밝혀진 것은 네트워크 장비를 능숙하게 다루어 원격수업을 잘 할 수 있는 기술이나 인프라 같은 것들이 아니다.

갑자기 들이닥친 재난이 언택트를 요구하건, 반대로 밀접접촉을 요구하건, 현장의 교사가 가장 적합한 교육과정과 교육활동을 주어진 조건에서 빠르게 구축할 수 있는 유연함과 창조적인 능력이다. 모든 것이 파괴된 세상이 온다면 석기와 석판을 이용한 교육을 할 수 있는.

이 유연함과 창조성은 중심이 제대로 잡혀 있을때 빛을 발한다. 중심이 잡혀 있지 않은 상태에서의 유연함과 창조성은 교육이 아니라 혼돈이다.

코로나 사태 때 우리는 우리나라 교사들이 상상 이상의 유연함과 창조성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번번이 그들의 발목을 잡고 길을 가로막고, 막상 일이 정리된 다음에는 그들의 실적을 가로채어 경직되고 비창조적인 매뉴얼과 모델이라는 화석으로 만들어버리는 존재는 바로 교육부, 교육청 등의 교육행정기관과 행정가들이었다.

그들은 왜 그런 화석같은 행동을 했을까? 교육의 본질, 사람, 휴머니티에 기반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휴머니티를 중심에 넣고 사고했다면 “그까짓 시간표, 그까짓 시수, 그까짓 매뉴얼”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보다 추상적인 규정을 우선하는 한, 교육행정기관은 유연하고 창조적인 교육을 가로막는, 누구 표현대로 ‘반교육 기관’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바로 이들이 지금 온갖 종류의 포스트 코로나 교육이라는 말의 성찬을 주최하거나 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포스트 코로나 교육은 어떤 상황에서도 유연하고 창조적으로 적응하여 휴머니티를 지켜내는 그런 교육이 아니다. 다만 특정한 기술, 특정한 기기를 사용하는 특정한 유형의 언택트, 원격수업,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각종 프로그램일 뿐이다.

이들은 이런 몇몇 수업과 프로그램을 포스트 코로나 교육이니, 미래 교육이니 미리 규정해 두고, 여기 필요한 조건과 프로그램을 공문을 통해 학교에 지시하고 강요할 준비를 하고 있다.

출발부터 틀려먹었다. 이런 모습은 말로는 포스트 코로나를 외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코로나 이전에 그들이 움켜쥐고 있던 교육에 대한 통제력과 권력을 되찾고자 하는 욕망의 왜곡된 발현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물어야 한다. 어떤 재난 상황에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교육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가? 그것에 대한 교육 주체의 합의를 끌어냈는가? 유연성과 창조성으로 무장하고 이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성장한 젊은 ‘평교사들’에게 현장에서 비롯되는 교육의 자율성과 주도성을 양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물음이 빠진 온갖가지 포스트 코로나 교육담론은 다시 강조하지만 임상시험 없이, 치료 목적에 대한 공유 없이 무작정 신약 발표부터 하고 투자부터 모으고 보는 작전세력이다. 

권재원 서울 마장중 선생님/ 실천교육교사모임 고문.(사진=지성배 기자)
권재원 서울 마장중 교시/ 실천교육교사모임 고문.(사진=지성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