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不運)함과 진정성

‘천재화가’란 말이 있습니다. 피카소 같은 사람한테 씁니다.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이분은 앞에 하나가 더 붙지요. ‘요절한 천재화가.’

누군지 아시나요? 손상기(1949~88)입니다. 관련기사를 먼저 보겠습니다.

“요절한 천재화가 손상기, 고향 여수서 25주기 회고전

(전략)...‘한국의 로트렉’이라 불리는 손상기(1949-1988)는 여수 출신의 천재 화가로 3살 때부터 구루병을 앓아 척추만곡이라는 장애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절망을 예술로 승화시킨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 미술계에서 일찌감치 주목 받아왔다. 프랑스 파리의 로트렉이 그러했듯, 손상기 역시 여수와 서울 하늘 아래 살며 세상의 어두운 곳에 빛을 밝혔고, 어깨 처진 쓸쓸한 사람들, 가난에 힘들어하는 이들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았다...(중략) 손상기는 초기 여수의 바다와 어시장 등을 배경으로 작업했으며, 향토적이고 민속적인 분위기가 짙게 깔린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그 중에서도 ‘자라지 않는 나무’는 자신의 신체적 결함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대표작이다. 1979년 서울로 상경해 세상을 떠난 1988년까지 10년간 작품 활동을 지속한 손상기는 이 시기에 작품 양식이 큰 변화를 보인다. 판잣집이 밀집한 달동네, 변두리 풍경 등 도시의 음산하고 우울한 풍경들을 짙은 회백색과 암갈색의 기조, 거친 스크래치 등으로 표현했다. ‘공작도시’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2010년 드라마에 노출되면서 유명세를 탄 ‘영원한 퇴원’도 이 시기 작품이다. 전시에서는 그의 부인인 김분옥 여사가 전시장에 직접 그의 아틀리에를 재현한다. 손상기 회고전에서는 처음 시도하는 일이다. 관객들은 아틀리에에서 유품과 드로잉, 오리지널 판화 등을 감상하며 치열한 삶을 살았던 작가 정신을 직접 느낄 수 있다. (동부매일신문 마재일 기자 killout1339@naver.com 2013.12.30. 10:30:38)”

‘공작도시-영원한 퇴원’(1986). 유화, 150x112cm, 1986.

죽기 2년 전에 그린 작품이군요. 살아있으면 68세. 한창 무르익을 나이입니다. 재작년 봄에 고향 여수에서 꾸며진 전시는, ‘영원히 30대에 머물러 있는 그를 잊지 못해 늙어가는 지인들’이 마련한 것으로 생전에는 한 번도 없었던 ‘첫 귀향전’이었지요.

기사에서 보듯이 작가는 세 살 무렵 ‘척추만곡증’을 앓는 바람에 꼽추가 되었습니다. 일찌감치 그를 알아본 것은 선배화가들이었는데요.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였던 윤형근(1928∼2007)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볼까요.

“음악은 슬퍼야 되고 미술은 소박해야 되는데 박수근 이후 가장 소박한 작가가 손상기다.” 이번엔 전혁림(1916∼2010) 선생님. “시커먼 그림이 빛을 발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드문 그림이다.” (중앙일보 기사 참조)

‘빛을 발하는 시커먼 그림’은 아마 이 그림 아닐까요. ‘아현동(기와집)’, 45x37cm, 1985.

저는 이 작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1979년에 상경한 그가 아현동 달동네에 화실을 차려 생활할 때입니다. 82년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고교 때 미술실기대회서 만난 서울친구가 그 근처에 살면서 미술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집을 나와 선배 작업실에서 먹고 자고 그림 그리고, 꼭 집시처럼 지내고 있었지요. 다들 그러고 살 때입니다. “아는 형인데 놀러가자”고 해서 만났습니다. 검색하다 우연히 사진을 한 장 찾았는데 그때 그 화실로 보입니다. (기분이 이상합니다.)

주위에 그림이 많지요? 그림 밖에 모르던 사람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 안 그래도 체구가 왜소한 터라 그는 마치 그림 속에 파묻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뒤 저 혼자 몇 번 ‘상기형 화실’에 놀러갔는데 다른 그림은 모르겠고, 이상하게 아래그림만 기억합니다. 아까 그림과 비슷합니다. ‘비슷한 걸 여러 장 그리는 구나’하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공작도시’, 50x41cm, 1985.

이제 보니 여수 고향집 풍경이 모티브였나 봅니다. 그림을 보실까요.

‘고향풍경 중에서’, 117x91cm, 1985.

이 그림은 4년 전인가 경매에서 1억 5천만 원에 낙찰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생전엔 그런 대우를 한 번도 못 받았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조금 아립니다. ‘나의 어머니’(1984)라는 그림이 있는데요. 자기 몸집보다도 큰 봇짐을 머리에 인 여인과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끄는 판자촌 아이가 나옵니다. 작업 스케치에 남긴 메모를 보면 짠합니다.

“무겁고 무겁다/ 인생 삶// 짐이 무겁고 아이가 무겁고 마음이 무겁고// 무거운 것/ 고달픈 것/ 그들을 도우소서.”

뛰어난 작가라고 모든 그림이 다 뛰어난 건 아닙니다. 냉정한 눈으로 보면 범작들도 많지요. 극적인 삶을 살다간 작가일수록 더 부풀려지는 측면이 더러 있습니다. 손상기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래도 다음 작품은 아주 좋습니다. 제가 보기엔 대표작으로 꼽을만합니다. ‘한여름’이란 뜻의 제목이 붙은 그림입니다.

盛夏(성하), 300x130cm, 1985.

작품을 직접 보면 울림이 대단합니다. 그림크기가 옆으로 3미터이니 대작이기도 하고요. 이런 그림은 아무나 못 그립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소박한 다음그림을 좋아합니다. 제목은 ‘10월’입니다.

10月, 70x60cm, 1986.

어느 가을날, 달동네 옹벽 언덕길을 어떤 사람이 리어카를 끌고 올라가는 중이네요. 어디서나 보는 익숙한 풍경이지요. 가만히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기분이 차분해집니다. 결코 그럴 분위기는 아닌데도 말입니다. ‘슬픔은 그 어느 것보다 힘이 세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데..... 정말이지 그렇습니다.

불운했던 화가 손상기는 이제 더 이상 그림을 못 그리지만, 살아서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분도 계십니다. 서로 맞비교하기는 뭣하지만 비슷한 느낌을 가진 화가 한 명을 소개하고 마칠까 합니다. 

이청운의 ‘작은 일터가 있는 풍경’입니다. 116.7×91cm, 2000. 하나 더 소개하지요. ‘바다-열정’, 73×53cm, 2001.

이분은 팬이 꽤 있는 걸로 압니다. 최근 전시는 재작년 봄에 있었습니다. 젊을 때는 ‘험한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이제 많이 부드러워지신 듯합니다.^^

제목이 ‘즐거운 우리집’(2000)입니다. 좋은 변화인지는 모르겠네요. 전시장 한쪽벽에 이런 자작시가 붙어있었습니다. 약간 달달한 면도 있는데, 뭐 뜻이 좋으니 다 같이 한번 읽어 보고 마치도록 하지요.

나의 그림 나의 화두 –이청운.

막걸리 한 양쟁이 마시고 나니/ 내가 사는 시대는 없어졌다.// 초고속 디지털 문화/ 뉴타운시대/ 슈퍼 물질 세상에 와있다.// 쓰러져 가는 것들은 하잘 것 없고/ 아름답다.// 도시의 뒷골목은 불이 꺼지고/ 산동네에는 달이 숨었다./ 변두리 사창가, 공장지대는/ 폐허와 적막함에/사람들은 떠나 버렸다.// 나는 여행자가 되어/ 그들이 버리고 떠난 자리에 서서/ 영혼의 메시지를 찾아/ 가슴으로 만나고 있다.// 그들의 힘과 열정/ 그들의 땀과 피눈물을/ 그들의 꿈과 사랑을// 나는 한 주움의 물감으로/ 그네들의 애환을 기록하리./ 그리하여 나는/ 즐거웠고 행복하였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