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촉적 만남 없는 코로나시대 교육, 우리는 어떤 교육 향해 가는 지 고민해야

[에듀인뉴스] 코로나19는 당연시 하던 많은 것들을 낯설게 보게 만들었다. 교육도 마찬가지로 학생, 교사, 학부모, 교육청, 교육부 등 교육주체의 정체성과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게 되었다. 원격수업 체제를 정상적 교육과정 이수 방법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가? 교사와 학생 각자 숨기고 싶은 면은 숨기고, 보이고 싶은 면만 보여주는 격리된 온라인 수업환경은 인간소외 현상을 부채질하지 않겠는가? 온라인교육 플랫폼이 갖춰야 할 필수요소는 무엇인가? 국민의 돌봄과 복지 요구가 더욱 커진 코로나19 환경에서 학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돌봄과 복지는 학교 정규 교육과정과 더불어 운영될 수 있는가? 감염 격차가 매우 큰 상황에서 국가는 단일한 국가수준교육과정을 고집해야 하는가? 이번 기회에 수학능력평가를 자격고시화 하고 대학을 평준화 하면 어떨까? 등등...이런 문제에 대해 함께 논의해 보고자 한다.

설진성 서울 도봉초 교사는 고려대학교 겸임교수로 서울시교육청 수석교사, 홍사당 정책위원, 교장제도개혁모임 집행위원, 실천교육교사모임 정책위원을 맡고 있다. 중립적 민주시민교육 방안과 교사의 정기기본권 확보, 교장제도개혁, 방과후학교 정상화 등에 관심이 있다.
설진성 서울 도봉초 교사는 고려대학교 겸임교수로 홍사당 정책위원, 교장제도개혁모임 집행위원, 실천교육교사모임 정책위원을 맡고 있다. 중립적 민주시민교육 방안과 교사의 정기기본권 확보, 교장제도개혁, 방과후학교 정상화 등에 관심이 있다.

[에듀인뉴스] 오늘도 어김없이 온라인교육이라는 제한된 체제 하에서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사이버 접속 안에서 무엇인가 형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덜 잃어버릴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면서 수업연구를 하다 시간 가는지 모르고 학교를 나섰다.

코로나19가 만들어 낸 원격교육체제는 그동안 너무도 당연히 여겼던 학교 기반을 새삼스럽게 소중하게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평범한 수업 속에서 아이들과 그냥 대면하고 있다는 것이 실은 엄청난 혜택이었고, 교육적 기반이었음을 다시 한 번 절실히 느끼고 있다.

비대면 교육환경 안에서 잃어버리는 것이 너무도 많은데, 교사인 나만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도, 학부모들도 잃어버리는 것이 너무 많을 것 같다.

그 정체가 무엇일까? 아이들을 못 만나 갑갑한데 그 까닭이 무엇일까? 나는 무엇 때문에 수업계획을 세우며 이리도 막막해 하는가?

교육은 상호작용성의 토대 위에서 작동한다. 이를 ‘래포’라고도 하고, 마틴 부버는 ‘나와 너의 만남’이라고 하며, 움베르또 마뚜라나는 ‘구조적 섭동’이라고도 하고, 하버마스는 ‘합리적 대화상황’이라고도 한다.

교육목적을 사회화라고 하든지, 자아실현이라고 하든지, 시민양성이라고 하든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교사와 학생이 서로 온전히 만나 서로를 흔들어야 한다.

교육은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다. 학생은 교실에서 학문을 전수받는 것이 아니라 교실공동체 안에서 옥신각신 하며 지식을 재창조해야 한다.

화석화 된 교과서의 정답을 보물찾기 하듯 찾는 것이 아니라, 시를 읽으며 감각적인 추체험을 해야 하고, 평균과 분산으로 우리 반의 묘한 구석을 바라보아야 하며, 사회 현안에 대하여 정의감에 마음이 흔들려야 하고, 함께 모여 합창하면서 한마음의 떨림을 느껴야 한다.

협력적 상호작용을 통해 21세기 문제해결역량, 의사소통역량, 공동체 역량을 키우기 위해 아이들은 동료가 필요하다.

우리 학교가 극복하고자 했던 지식전달 방식, 내신경쟁, 입시기관 전락의 모습들에서 한 걸음이나 빠져나오긴 했는가? 현재 중고등학교의 학교풍토 안에서 온라인교육이 정합적으로 맞는다면 우리학교는 개혁하지 못한 것 아니겠는가? 인터넷 강의의 일타강사가 원격교육 체제에서 교사들의 롤모델인가? 자기 입증의 문제와 공정성의 문제로 수행평가는 너무도 쉽게 포기할 평가인가?

(이미지=픽사베이)
(이미지=픽사베이)

교사는 서로 만나 떨리기 위해 수업을 준비하고 아이들을 상담한다. 온라인교육은 무엇을 잃게 하는가?

첫째, 전인교육의 토대를 무너뜨린다.

화면으로, 텍스트로, 음성으로, 사진으로 만나지만 그것은 교사와 아이들의 꾸며진 편집된 모습이다. 보여주고 싶은 면만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은 것만 들려주는 마치 가면무도회의 입장객과 같은 ‘은닉된 만남’이다.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은 지극히 고립된 사이버 세상이며 정서적 상호작용이 부재하기 쉬운 조직이다.

사람들이 직접 대면하면서 겪게 되는 느낌이 사라지고, 전신을 통해 전달하는 수많은 의사소통이 단절되어 있는 온라인 환경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면대면교육과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기준을 세울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온라인 안에서도 얼마든지 뜨거운 미디어의 기능을 동원하여 정서적 상호작용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분의 합은 절대 전체가 될 수 없다. 사람과 사람이 직접 대면한 상황에서 전신으로 만나는 일은 낱개의 시각 자극과 낱개의 청각 자극을 합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아이들은 정보격차 속에서 양육 결핍이라는 또 하나의 장벽을 넘어야 한다.

아이들의 학력이 벌어지는 원인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사회문화적 결핍이라는 면으로 양육 결핍을 바라볼 수 있다.

한부모 가정이든지, 정보 장비를 갖추지 못하는 가정이든지, 노동시간이 매우 긴 노동자 가정이든지 여러 이유로 사회경제적으로 취약 계층의 아이들은 여러 면에서 불리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

학교를 등교하지 못하는 이때에 결핍된 아이들은 양육 결핍을 당하게 된다. 누가 깨워주지 않아 아침 식사를 거르는 아이들이 있고, 보호자가 늦게 퇴근하면서 아이도 덩달아 한밤중에 잠드는 아이들이 있다. 이런 아이들일수록 온라인 수업에 불성실하게 참여할 수 있고, 과제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학교에서 대리하였던 다양한 양육 기능들이 가정으로 넘겨지지만 사회경제적 취약 계층은 온전히 받아 안지 못한다. 노동시간이 비정규노동자일수록, 한시적노동자일수록 더 길어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긴 노동시간은 가정의 부족한 양육권으로 이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셋째, 교사와 학생의 교수학습 행동을 인터넷에 의존적으로 만든다.

이번 코로나19가 종식되고 학교 등교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온라인교육플랫폼 ‘위두랑’과 ‘e-학습터’에 익숙해진 나는 이전처럼 칠판에 쓰는 알림장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

중학교 선생님들도 이메일과 인터넷에 익숙해진 아이들에게 온라인교육플랫폼 안에서 과제를 제출하라고 하지 않을까?

Zoom 웨비나를 하시던 선생님, 구글클래스룸을 하시던 선생님, 구글 도큐를 쓰시던 선생님들 모두 매체들에 익숙해져서 온라인플랫폼을 놓으실 수 없으실 듯하다.

굳이 놔야할 필요를 느끼지 못 할 테니까. 맥루한은 미디어는 메시지라고 할 만큼 의사소통채널은 인간 삶의 결정요인이다.

그렇다면 온라인교육체제 하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는 덜 잃어버릴 것인가? 앞에서 위협받고 있는 부분에 대한 몇 가지 제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미지=픽사베이)
(이미지=픽사베이)

원격수업 환경 안에서 전인교육의 토대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교육의 주체 별로 강화해야 할 지향점을 제시해 본다.

첫째, 학교는 학교당 학급 수, 학급당 학생 수를 줄여야 한다.

현재와 같이 대규모 학교와 학급에서 교사와 학생 사이에 상호작용은 더욱 위협받게 된다. 원격이라고 할지라도 학생들의 학습과 생활 관리를 위해서는 반드시 학교와 학급을 소규모로 만들어야 한다.

둘째, 교사 교육과정을 강화해야 한다.

수업은 표준적인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특정한 학생들과 특정한 교사가 함께 흔들리며 섭동하는 깨달음의 과정이기 때문에 수업 주체들의 관계성이 독창적으로 빛나야 한다. 교사는 대체 불가능성으로 빛나야 하고, 학생은 적극적인 자기내면화로 빛나야 한다.

이것은 가면을 벗어던지는 행위인데 이를 풀어보자면, 자기 실수도 드러내고, 더뎌 보이는 행위도 드러내는 용기가 필요하다.

교사의 사고과정 오류, 개선해 가는 과정 자체가 실은 학생들에게 지식을 재생산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즉 교사는 기성 인터넷 강의에 반기를 드는 저항의식을 가져야 한다. 편집을 거부하는 용기도 필요하다.

양육 결핍을 해결하기 위한 국가적인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

첫째, 보호자의 양육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근로기준법 상 노동시간을 단축해야 한다.

특히 특수고용노동자와 비정규직노동자, 한시적 근로자들이 양육권을 누릴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둘째, 돌봄과 방과후활동의 토대를 갖추어야 한다.

행정력이 열악하고 정규 학제를 운영하는 학교에 욱여넣는 구조가 아니라 지자체가 양육을 담당할 수 있도록 법령과 인사조직을 마련해야 한다.

부동산에 쏠리는 자본을 조세를 통해 재분배해야 하는 주체는 정부이다. 이미 존재하는 아동복지법, 청소년기본법, 청소년활동법을 재정비하여 마을과 지역이 온전히 돌봄 복지를 안아야 한다.

학교와 교사가 건전한 미디어 비판 시민의식을 가져야 한다.

몇 가지 비판원칙을 세우고 대두되는 미디어를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첫째, 미디어의 의사소통 방식이 권위를 낮추는가?

단방향성은 교사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고, 학생 간 의사소통을 제한할수록 미디어는 교사의 권위를 강화한다.

둘째, 정보격차를 완화시키는 미디어인가?

다중 감각정보를 전달하는 미디어일수록 첨단장비가 필요할 수 있다. 각종 기기를 마련하는 것부터 사용방법을 익히는 것까지 정보격차의 덫은 교사와 학생 사이 의사소통을 가로막을 수 있다.

따라서 학교와 교사는 공교육의 보편성이 원격교육에도 발휘될 수 있도록 판단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코로나19가 만든 새로운 인프라 지형에서 학교교육의 고유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대한민국의 모든 교사들은 사이버 기반의 교육세상에서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 잃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을 하고 있다.

소설가 프로스트의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바보스럽지 않겠는가? 인지생물학자 마뚜라나는 안 가본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작은 바람은, 길 가는 과정에서 교육주체들이 인간소외를 겪지 않도록 섭동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형성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