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KBS 캡처)
(사진=KBS 캡처)

[에듀인뉴스] 일찍이 계몽주의와 독일 관념철학의 대표적 철학자인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도록 행위하라”고 주장했다. 

이는 실천 이성의 능력이자 정언명령(定言命令, Categorical Imperative)으로 모든 인간을 고귀한 목적으로 대우할 것과 결코 저급한 수단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 그대로 정언명령이라 하지 않는가. 이것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마 7:1-29)”는 성경의 가르침인 황금률로 이를 거역하는 것은 인간관계의 파괴를 의미한다. 

잠시 우리의 현실을 살펴보자. 지금 항간에 철인 3종 경기의 지방자치단체 대표 선수였던 고(故) 최숙현 선수에 대한 이야기가 지면과 뉴스를 온통 채우고 있다. 자신을 폭행한 자의 죄를 밝혀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극단적으로 생을 마감한 고인은 그를 보호하고 지켜본 가족과 동료선수 그리고 국민들의 가슴에 커다란 멍이 들게 하고 아픔과 분노를 남겼다. 

그뿐인가. 일전에도 국가대표 쇼트트랙 운동선수와 관련된 폭력 사건이 공개되면서 세상의 공분을 자아낸 적이 있다. 아직도 폭력에 의존하는 훈련방식이 국가대표와 성인 선수에서도 자행되고 있다는 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최고의 수준에다 최고의 역량을 갖춘 지도자와 의료진이 국가(지방자치) 대표 선수를 교육하고 관리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그 교육방식과 치료에서 과거 케케묵은 신체폭력을 동반하는 방법으로 지속된다는 것이 그저 의아할 뿐이다. 

억압과 강제적인 방식, 특히 신체적인 체벌, 나아가 성(性)적 폭력으로 훈련의 효과를 높이려 한다는 것은 지도자의 자질로서는 0점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물이 고이면 썩는다고 하듯이 한 분야에서 오랜 전문가일지라도 변화하는 새로운 교육방식과 인권존중의식을 따라가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태도를 고집하여 이것이 나타내는 일시적인 착시효과를 혼돈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지도자를 고용하여 선수들을 지도하는 해당 종목 연맹이나 기관은 냉엄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선수나 학생을 위해서 선의(善意)로 포장하여 이른바 사랑의 손찌검, 매질, 회초리를 들었다는 언어의 희롱을 이젠 더 이상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필자는 이에 앞서 교육기관인 학교에서는 어떠한 폭력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교육의 과거방식을 결코 기억에서 소환하지 말아야 한다. 농담으로라도 그때는 그랬지, 하고 체벌로 학생들을 훈육하던 향수나 추억은 아예 지워 버릴 것을 강력히 제안한다. 체벌과 폭력은 어떤 명분이나 개똥철학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필자는 고교 3학년 때 담임교사로부터 청소 시간에 제대로 청소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학급 전원이 마대자루로 엉덩이를 맞았던 아픈 추억을 가지고 있다. 

(사진=KTV 캡처)

당시 재학한 학교는 지방 명문고로 전국의 우수한 학생들이 지원하던 역사와 전통의 학교였다. 시대적으로 교련이란 군사과목이 존재하여 학교에서 집체훈련이 공식적으로 거행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체벌 한번 없이 존중받던 동기생들이었기에 정말 끔찍한 사건이었다. 명분이 책임감 고취란 것이었지만 지극히 잘못된 담임교사의 지도였고 40년이 넘은 지금도 유일하게 고교 시절에 체벌을 당한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이제 학교 폭력이 사라져가는 시대이다. 하지만 아직도 암암리에 체벌이 남아있다는 것은 치욕적이다. 체벌은 긍정적 효과보다는 부정적이고 정신적 트라우마를 평생에 남기는 아주 저급한 교육방식이다. 

물론 필자도 과거 젊은 교사 시절에 선한(?) 의도를 가지고 체벌을 한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때 체벌의 강도(强度)를 굳이 언급하며 변명하고 싶지는 않다. 어떤 식으로든지 학생 행동은 체벌 대신 지도할 수 있는 지혜로운 대안이 있다. 혹시라도 그로인해 아직도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제자들이 있다면 이 지면을 통해서라도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 싶다. 

마지막으로 가족공동체의 문제를 짚은 김희경 작가의 《이상한 정상가족》에서 체벌의 본질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부모의 체벌을 금지하는 스웨덴이 과거 우리나라처럼 ‘사랑의 매’를 용인하던 시절, 한 엄마가 잘못한 아이에게 회초리를 구해 오라고 시키자 한참 뒤 아이는 울면서 돌멩이를 주워왔다. 

아이는 회초리로 쓸 만한 나뭇가지를 못 구했다며, 대신 자신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했다. 참으로 기특한 아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지 않은가?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만이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는 예수의 말이 떠오르지 않는가? 어떤 명분으로 포장을 해도 체벌은 굴욕이자 고통일 뿐이다.

존엄의 가장 밑바닥을 헤집는 고문이다. 아이에게 돌을 던지면서까지 얻을 수 있는 명분은 세상에 없다. 그런 명분이 있다면 지옥으로 가는 길을 포장하는 선의일 뿐이다. 

우리는 아직도 많은 삶의 영역에서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폭력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그럴듯하게 포장되고 둔갑한 학생 체벌, 권위적인 가부장적 체제에 의한 가정폭력, 상하 간의 위계질서를 확립한다는 차원에서 버젓이 행해지는 군대폭력은 구시대적인 유물이다. 

최근에는 사람들 사이에 빈번하게 자행되는 사이버 언어폭력, 개인 신상털기, 악플에 의한 인격적 살인 등 심각한 인터넷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그 후유증이 말하듯 꽃다운 젊은 연예인들이 악플에 시달려 생을 마감한 비극적인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또 모모 재벌들이 빈번하게 자행했던 다양한 방식의 폭력이 국민의 공분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는 한 마디로 국가를 위한다는 기업 행위를 선의로 포장하여 실제로는 자신의 가문이나 개인의 이득을 추구하는 상행위를 구별하지 못하는 확증편향이 심화된 폭력이라 할 수 있다. 선의를 포장한 폭력은 이젠 언제, 어디든 영원히 차단해야 한다. 

그 대신에 ‘사람 위에 경쟁 없다’는 인간 중심의 교육으로 승리보다 값진 인간다움의 길을 걷는 진정한 교육(훈련)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시금 우리 교육은 인간은 최고의 목적으로 대우해야지 결코 수단으로 다루어서는 안 됨을 이번 스포츠 폭행 사건으로 아까운 생명이 사라짐을 계기로 더욱 각성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전재학 인천 제물포고 교감
전재학 인천 제물포고 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