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인뉴스] “당신의 삶에서 무언가를 빼야 한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누구나 이 질문에 쉽게 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면 우리네 삶은 더하기만을 알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른바 직진 인생이다. 우회나 후진 인생은 실패자로 간주 된다. 특히나 우리의 빨리빨리 정신은 절대로 뒤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세상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암시하고 조장한다. 여기엔 살면서 더하기 욕망과 전진하려는 욕구가 끝없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물질적 욕망은 절대 빼기가 쉽지 않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하지 않는가. 보면 볼수록 더 많이 갖고 싶고 더 좋은 것을 원한다. 그러니 더하기는 당연한 이치요, 세상의 흐름이라 알고 살아간다.

그렇다면 그 반대의 삶, 빼기로의 회귀는 불가능할까? 

우리의 현실을 잠시 돌아보자. 직장에서는 업무에 치여 살기가 일쑤다. 거기엔 책임이 지워지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고 직위가 오를수록 일은 줄어들지 않는다. 그래서 온갖 스트레스로  병원을 찾게 된다. 

의사는 대뜸 질문한다. “요즘 스트레스가 많으신가요? 정서적 안정과 함께 좀 쉬는 게 좋습니다.” “작년까지는 좀 덜했는데 올해 들어 심화되는 것 같네요. 이제 나이가 60이네요.” 

아무리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늙으면 세포도 함께 늙는다. 소화력이 줄어들고 면역력이나 회복력도 떨어진다. 이런저런 진단에 의사는 덧붙인다. 

“과로나 스트레스를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이 절대 자랑거리가 아니에요. 자신을 빨리 죽이는 일입니다. 나이 든다는 걸 인정하고 일을 좀 줄이세요.” 

그렇다.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내 몸이 아직도 20~30대인 것으로 착각하고 젊어서 입력된 코드를 그대로 사용하려 한다. 그러니 몸은 적신호를 보내고 끊임없이 생활의 변화를 요구한다. 

둔감한 필자는 냄비 속의 개구리처럼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는 느끼지 못한다. 얼마나 자기학대를 하는 것인지 이제 몸은 과용 상태를 허용하려 들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36년을 변함없이 직장 일에만 몰두한 결과가 아닐까. 이제 인생 100세 시대에 견주어 결코 많은 나이는 아닌데 노화 현상이 발현하는 것은 분명히 몸에서 보내는 SOS라 여겨진다. 

그렇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머리로 ‘괜찮아’라고 생각하면 나를 속일 수 있지만 몸은 속이지 못한다. 청춘일 때는 며칠 밤을 새우고도 몇 시간 숙면을 취하면 거뜬했다. 

그런데 이제는 하룻밤만 잘 자지 못해도 2~3일을 휘청거리게 된다. 흔히들 인생은 60부터라고 한다. 이제 필자의 일상에서 일을 슬슬 뺄 때가 시작된 것 같다. 소위 뺄셈의 인생이 필요한 것이다. 

일만이 아니다. 감정도 그렇다. 특히 자식 사랑도 뺄셈이 필요하다. 무감각해지려는 것이 아니다. 적절히, 적당히 표현하려는 것이다. 

요즘 결혼한 자녀를 둔 지인들과 만나면 ‘자식에게 언제까지 토탈서비스를 해야 할까?’가 대화의 주제다. 지인들은 이제 자식을 놓아 주는 것, 아니 적어도 사랑을 덜 표현하는 것이 서로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좋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결론은 우리의 삶, 그 자체로 대화의 주제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과 정보의 홍수 시대다. 여기엔 간결함과 요약이 미덕이다. 무엇을 뺄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평생 배우면서 사는 게 인생이다. 하지만 여기도 뺄셈의 기술이 요구된다. 돈·감정·물건…. 어쩌면 자신의 욕심을 빼는 것, 그것이 건강하고 지혜롭게 나이 드는 비법이 아닌가 한다. 

인생 백세 시대라 해도 나이 들어 10년 이상을 환자로 지낸다는 통계는 결코 반갑지 않다. 굵고 짧게 인가? 아니면 가늘고 길게 인가? 하지만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없다. 

이왕이면 좋아진 세상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사는 동안 자기 것을 나누고 베푸는 뺄셈의 기술, 이것은 더 이상 가벼이 할 수 없는 삶의 지혜로 다가온다. 이젠 80% 아니 그보다 적은 것으로도 만족하고 살아가자. 

버킷리스트만 작성하지 말고 ‘비우는 인생’으로 더 행복해지도록 살아가자. 이것이 돈오점수(頓悟漸修)로 ‘인생은 60부터’라는 슬로건과 함께 필자의 삶에 문득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점진적 수행을 거친 결과임을 고백하고자 한다. 

전재학 인천 제물포고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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