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서울시)

[에듀인뉴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There is no worth living without examination)” 

이는 2500년 전 인류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남긴 가르침이다. 지금처럼 민주화된 사회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인류에겐 특히 주목해야 할 말이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주위에는 성찰이 부족한 삶이 남긴 후유증이 일파만파로 커져 왔다. 인간 내면의 어둠과 권력의 부조화는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역사는 한 시대에 작은 울림을 주며 영향력을 미친 인물(Influencer)들의 비극적인 종말을 보면서 스스로 자신을 극복하지 못한 나약한 인간의 또 다른 비극 앞에 침묵으로만 대응할 수 없다. 

최근 한 유력 정치인의 죽음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파장이 크다. 그는 과거에 아름다운가게라는 알뜰시장 시민운동을 주도하고 또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국내 여성 성희롱 1호 사건을 변호하면서 인지도를 높이며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 근자엔 서울시장에 출마하여 3선을 지낸 경력으로 차기 대선 후보로서의 입지를 꾸준히 쌓아 온 정치인이다. 그렇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언급하는 것이다. 

갑작스런 죽음으로 항간에 무수한 추측을 낳고 있으나 직접적인 사망의 원인은 전직 비서의 성추행 사건의 고소가 촉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어찌 대낮의 날벼락인가. 그가 어떻게 부하 직원과의 성추행에 연계되어 생을 마감하는 비극이 발생했는지 수많은 사람이 충격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 후 잠시 진정의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의 복잡한 내면과 도덕적 해이, 이를 통제하지 못하여 발생한 권력형 범죄인 성추행 사건은 대중으로부터 거짓이 없는 사실, 즉 진실을 밝히라는 분노를 촉발하게 되었다. 

(사진=kbs 캡처)

최근 한 일간지의 이현상 칼럼(2020.7.17.)에 실린 글을 인용해 본다. “그럴 분이 아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피해자의 호소는 서울시 내부의 이 한마디에 묻혔다. 고립무원의 피해자는 4년을 시달리다 마지막 방법으로 고소를 택했고, 박 전 시장은 죽음을 택했다. 

인간은 자기분열적 존재다. 인간은 내면의 모순을 사회적 역할, 페르소나(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썼던 가면) 뒤에 감춘다. 자기 분열과 모순에 지친 자아가 쉬는 곳이 프라이버시다. 사적 공간에 공적인 권력관계를 침투시켜 버린 것이 박 전 시장 비극의 시작이다. 박 전 시장 주변 사람들이 인간의 내면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면 막았을 비극이다. (… ).

결국 한 인간의 자책이든 아니면 책임을 면피하기 위한 무책임한 행동이든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아있는 자는 그가 남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게 쉬운 일이던가. 진실은 어떤 식으로든 이해관계에 따라 공격과 방어를 취하는 자들의 입장으로 교묘하게 둔갑하여 진영 논리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실제로 각종 추문에 대응하는 여권의 방어 기제에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는 논리가 어김없이 작동했다. 조국, 윤미향, 안희정⋅오거돈의 사건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보다 앞서 2018년 청와대 특감반의 민간인 사찰 의혹이 터지자 당시 청와대 대변인은 “현 정부에는 그런 DNA가 없다”고 말했다. 

이 얼마나 오만한 권력의 우생학인가. 나치 시대 인종적 우월성을 바탕으로 얼마나 엄청난 반(反)인간적 폭력이 자행됐는지를 회고해 보자. 지금 박 전 시장 사건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2차 폭력이 ‘우리가 그럴 리 없다’는 권력 우생학의 산물은 아닌지 성찰이 필요하다. 

결국 이 사건은 어떻게 결론이 날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 공직자의 성인지감수성 결여와 도덕성과 인권의식에 대한 해이가 가져온 인지부조화의 부산물이란 것이다. 

다시 동(同)칼럼을 재인용 해본다. 안타깝게도 현실과 유리된 ‘무균실의 인간’, 순결한 DNA는 존재하기 어렵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불가피하게 티끌을 묻힐 수밖에 없다. ‘그분이 그럴 리 없다’는 믿음의 표출은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일제강점기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백선엽이 없었다면 6·25 영웅 백선엽도 없다. 일본 육사 출신의 박정희가 없었다면 산업화를 일군 대통령 박정희도 없다. 시대와 환경에 따라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모순과 복합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지독한 독선이다.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권력이 스스로를 경계할 수 있겠는가.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이는 1988년에 발표된 가요 ‘가시나무’의 노랫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는 신앙 고백의 노래였다. 지금은 목사가 된 작사·작곡가 하덕규는 “신 앞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죄를 말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이제 인간에 대한 연구를 새롭게 하자. 통제가 어려운 인간 내면의 어두운 본성은 솔직히 인정하자. 인간이기에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감추거나 변명으로 일관하여 위장하지 말자. 다만 어느 누구든 고위 공직자는 자신을 스스로 성찰하고 통제하지 못해 저급한 수준으로 타락하는 것에 대해서는 응당한 법의 심판을 감수해야 한다. 여기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어야 한다. 

전재학 인천 제물포고 교감
전재학 인천 제물포고 교감

강력한 권력이 주어지면 거기엔 합당한 책임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상식이다. 이를 위해 우리 사회는 지금까지 보다 더 민주적으로 진보할 필요가 있다. 모든 공직자에게 필수 사항이되 특히 고위 공직자는 그에 따른 높은 책임의식과 성인지감수성의 인지적 조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지난 시대의 왜곡된 성인식, 성인지감수성의 미흡함, 일상의 관계 맺기에서 작용해야 할 행동 규범으로서의 인권 존중 의식의 결여는 반드시 시대에 맞게 그리고 국가의 위상에 적합하게 강화가 되어야 한다. 

이에 우리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서 보듯이 특별한 사람이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악마가 된다고 했듯이 권력을 많이 가진 자가 공감 능력을 상실함을 경계하며 인권에 대해 사유하고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다시금 소환하여 자기성찰을 게을리 하는 자는 살아갈 가치가 없음을 재인식해야 한다. 더불어 인간을 수단이 아닌 최고의 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칸트의 정언명령을 다시금 주목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